유괴범은 거액의 돈을 요구했고 린드버그는 몸값으로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돌아오지 않았고 아기로 추정되는 사체가 숲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2년에 걸친 수사 끝에, 경찰은 독일 출신의 목수 브루노 하우프트만을 유괴범으로 체포합니다.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린드버그 아들 유괴살인 사건은 전 미국인이 추앙하는 영웅의 아기가 범죄 대상이었다는 사실과 많은 미스테리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세기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린드버그 신드롬'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유명인 가족을 유괴함으로써 같이 유명해지려는, 돈보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유괴범의 심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린드버그 아들 유괴 사건 이후 그와 비슷한 또다른 큰 유괴사건은 1974년 2월 4일 벌어진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손녀 패티 허스트 납치 사건입니다. 허스트가문의 상속녀인 19세의 허스트가 극좌게릴라단체인 심비오니스 해방군에 납치된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일년 후 게릴라의 일원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은행을 털다가 경찰에 생포돼 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체포 당시 허스트는 납치범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납치된 동안 게릴라에 세뇌 당해 조직에 가담했고 납치범 한 명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피랍자가 납치자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동조하는 이상심리를 일컫는 '허스트 신드롬'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이 때부터입니다.
허스트 신드롬보다 더 넓은 의미로 알려진 말로 '스톡홀름 신드롬'이 있습니다. 1973년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은행강도 사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은행강도들은 6일 간 인질들을 잡고 대치하다가 경찰에 제압됐고 인질들은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질들은 경찰들에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질들은 차츰 인질범에게 동화되어 자신들을 구출하려는 경찰들에 반감을 갖고, 재판에서도 강도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질 사건처럼 극한 상황에 처하면 두려움의 증폭으로 인질범들이 해치지 않는 것을 고맙게 여겨 차츰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구출하려는 경찰들에게 반감까지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스스로를 인질과 동일시하면서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을 '리마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1997년 페루 리마에서 반정부조직 요원들이 127일 동안 인질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족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고, 미사를 개최하는 등의 현상을 보였다는 데서 유래된 용어입니다.
최근 캘리포니아에서 18년 간 납치 감금됐다가 극적으로 가족 품에 안긴 제이시 리 두가드 사건도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열한 살의 나이에 등굣길에 납치된 소녀가 범인에게 성폭행을 당해 두 딸을 낳고 18년 간 오두막에서 살았다는 충격적인 내용도 그렇지만 이 같은 반문명적인 범죄가 세계 최고의 인권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졌다는 것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잊었습니다.
언론은 제이시가 이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지만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고 범인 필립 가리도를 사실상 남편으로 인식하며 그를 도왔다고 전합니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지만 충분히 가능한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미숙하고 여린 열한 살짜리 여아를 편집광적인 부부가 납치해 폐쇄된 공간에서 끊임없이 세뇌하는 과정을 거치면 거의 로보트처럼 충실한 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는 주어진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감히 항거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외부 세계와는 차단한 채 반복된 생활을 시키면 나중에는 가두지 않아도 탈출할 생각을 못합니다. 도리어 나가면 불안한 심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물을 길들이면 풀어놓아도 집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제이시는 처음 몇 년은 감금된 채 가족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폭행과 임신, 출산 과정을 거치며 미움과 증오가 희석되고 연민과 자포자기의 감정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과거 미국에서는 탈주범에 의해 납치된 교도소장의 아내가 10년 간 탈주범과 함께 닭을 키우며 살고 있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이 여성은 주변에 도움을 청해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습니다. 어른도 이런데 하물며 어린 소녀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잔학한 범죄자의 소행이 몸서리쳐질 뿐이지요.
어린아이 유괴는 항거 불능의 약자를 대상으로 하고 자신의 몸보다 더 소중한 자녀의 부모와 가족의 피를 말리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범죄입니다. 제이시처럼 미성년의 여아를 철저하게 짓밟고 유린해 종으로 삼는 행위는 그 어떤 신드롬으로 규정할 가치조차 없는 일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유괴범에 의해 희생된 한 아빠의 말은 우리들 가슴을 울립니다. "20년도 지났지만 지금도 딸아이 꿈을 꿉니다. 우리 예쁜 딸이 '아빠!'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노창현 뉴욕 특파원 robin@m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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