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세월 살다간 DJ 못 다 이룬 꿈 …
영욕의 세월 살다간 DJ 못 다 이룬 꿈 …
  • 인상준 기자
  • 입력 2009-08-25 09:33
  • 승인 2009.08.25 09:33
  • 호수 800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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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화합·남북통일 과제 남아

대한민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관계 개선 등 뚜렷한 업적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치 인생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사형선고, 납치 사건 등 수차례 목숨이 위태로웠던 일들을 겪으며 더욱 정치력을 과시했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낙선을 거듭하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5대 대통령에 당선돼 대한민국을 이끌었다. 하지만 DJ 생전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있다. 이제 그의 정신을 받들기 위한 정치인들이 그의 꿈을 어떻게 이룰지 관건이다. 지역감정 타파, 남북통일 등 정치적 현안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다. DJ의 굴곡진 정치인생과 그의 업적, 그리고 끝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알아본다.

김 전 대통령의 인생은 한국의 정치사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군사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한 가운데 서서 55차례 가택연금, 6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또한 5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의 상징성엔 언제나 김대중 이라는 세 글자가 아로 새겨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DJ는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군부 독재의 탄압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민주화에 앞장섰다. 그런 만큼 고난의 세월도 상당했다”며 DJ의 상징성에 대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72년부터 87년까지 숱한 핍박을 받으며 암울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73년 일본 망명 시절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다행히 미국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다. 74년에도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한 혐의로 3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80년 ‘서울의 봄’을 맞으며 김 전 대통령에게도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신군부의 군화발에 무참히 짓밟혀 내란 음모혐의로 구속,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구속은 민주화를 부르짖는 민심을 더욱 요동치게 만들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신군부의 독재에 항거하던 김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갖은 노력 끝에 사형에서 20년 형으로 감형 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신군부에서는 김 전 대통령에게 망명을 요구했고 결국 82년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해외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고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다.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DJ와 YS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13대 대선에서 낙선한 김 전 대통령은 이후 우여곡절 끝에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데 성공한다.


남북관계 개선, 수평적 정권교체 이뤄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IMF의 위기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는 데 노력한다. 2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IMF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물론 당시 국민적인 금 모으기 캠페인 등 모두가 하나 된 노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대통령으로서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후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키면서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남북관계 개선에 지대한 역량을 발휘한다. 통일에 대한 DJ의 꿈은 남북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기에 충분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비무장지대 지뢰 제거, 경의선, 동해선 철도와 도로 연결, 개성공단 착공 등 많은 변화가 이뤄졌다.

이러한 공로는 또 다른 쾌거를 낳았다. 2000년 10월 한국인으론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당시 노벨상위원회는 “김 대통령은 50년 넘게 이어져 온 남북한의 적대 관계를 해소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라며 김 전 대통령의 수상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통일 조국을 경험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면서 DJ의 못다 이룬 꿈이 남아 있는 상태다. 특히 MB정부의 남북긴장관계에 대한 개선책 등 서거하기 직전까지도 남북관계에 대한 고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만 보더라도 통일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DJ는 지역주의 타파에 대한 열망도 절실했다. 본인 스스로도 지역주의에 대한 편승에 많은 고심을 해왔다. 대통령 취임 후 많은 특강에서 “지역주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다시는 동서분단을 방치해서는 안된다”며 지역주의 타파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DJ 본인도 97년 대선 당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DJP 공조를 이뤄 대권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어 지역주의를 이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퇴임 후에는 ‘민주세력의 대연합’,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전국 정당화를 모색해야 한다’ 등 끊임없이 지역주의를 해소하기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그의 꿈은 미완의 정치실험으로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정신 계승 작업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세력 대연합이라는 큰 틀을 이루기 위한 작업도 함께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DJ가 끝내 이루지 못한 미완의 정치실험들이 민주당을 축으로 얼마나 완성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인상준 기자] sky0705in@dailysun.co.kr

인상준 기자 sky0705in@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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