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도 부자 나름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백만장자’(millonaire)는 엄청난 재산가로 통했다. 부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을 백만장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요즘은 백만장자는 부자의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가 됐다. 이른바 ‘슈퍼부자’가 수도 없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백만장자는 은행의 예금, 보험, 증권, 채권 등 금융자산을 합친 금액이 100만 달러(약 10억원)를 넘는 사람을 말한다. 백만장자 수는 세계적으로 약 950만명. 세계인구의 약 1.5%에 해당한다. 지난해보다 18% 불어난 것이다. 100만달러 이상 금융자산을 가진 사람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한때 부의 상징이었던 백만장자는 이제 평범한 부자로 전락했다. 영어로 ‘Merely Rich’라고 불리며, ‘그렇고 그런 부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무늬만 부자’라 어디 가서 더 이상 돈 자랑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도 있다.
최근 새로 등장한 슈퍼부자는 금융자산이 3000만 달러(약 300억원) 이상인 사람을 말한다. 즉시 투자가 가능한 유동자산이 3000만 달러가 있다는 얘기다. 영어로 ‘Super Rich’로 쓴다. 부자 중에도 상 부자라는 뜻이다. 아무리 목에 힘을 주고 다녀도 손색이 없다는 뜻에서 ‘Super’란 말을 썼다.
슈퍼부자는 세계 9만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메릴린치와 캡제미니가 ‘세계 부자 보고서’(World Wealth Report)를 통해 발표했다.
슈퍼부자 수는 2005년보다 11.3%나 늘어난 것이다. 이들 부자가 갖고 있는 금융자산은 13조1천억 달러. 전년보다 16.8% 늘었다.
슈퍼부자 한 사람이 지난해 늘린 금융자산은 평균 504만달러(약 50억원). 금융자산이 이 정도니 부동산까지 합치면 그들이 벌어들인 돈은 천문학적이다.
슈퍼부자가 9만5000명이라고 했으니 각 나라 재벌들은 거의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웬만한 재벌그룹 회장은 개인적 금융자산이 3000만달러를 다 넘을 것이다.
반면 유동자산 규모가 100만~500만달러 수준인 일반부자들 재산은 6.4%가 늘어나는데 그쳤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반 부자가 흔히 말하는 ‘백만장자’다.
백만장자 자산은 모두 37조2천억달러. 2005년보다 11.4% 늘었다. 37조2천억달러는 세계 부의 4분의 1에 해당하며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3배에 달하는 액
수다.
백만장자는 자산이 100만 달러 이상인 재산가를 모두 포함했기 때문에 슈퍼부자도 여기에 들어간다. 백만장자 950만명 중 슈퍼부자(9만5000명)를 빼면 940만5000명이 무늬만 부자인 ‘보통 부자’인 셈이다.
슈퍼부자와 보통 부자는 그들이 보유한 자산의 차이와 수적인 면에서 비교 자체가 힘들다.
백만장자의 64%가 미국, 일본,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에 몰려있다. 나라별로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의 순이다.
미국의 백만장자는 292만명이나 된다. 영국은 48만5000 명이다. 최근 급속 성장하고 있는 중국에는 34만5000명의 백만장자가 살고 있다.
우리나라의 백만장자 증가율은 세계에서 5번째로 높다. 금융자산이 100만달러 이상인 한국 사람은 9만9000 명이라고 이 보고서는 전했다. 2005년보다 14.1%가 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은 어떤가. 과연 무슨 부자인가. 백만장자인가. 슈퍼부자인가. 아무 부자도 아닌가.
우리의 경우 금융재벌보다 부동산재벌들이 많다. 그래서 메릴린치 발표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서울 강남, 여의도, 목동, 분당 등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 중 10억원이 넘는 아파트가 수두룩한 까닭이다. 여기에다 값비싼 땅과 상가, 건물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실제로 우리나라의 백만장자는 말 그대로 1백만명에 달할지도 모른다.
수백억~수천억 원의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이 ‘금융자산 10억원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통계는 그런 방식으로 집계된다. 그래서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합쳐서 집계한다면 백만장자 수는 훨씬 더 늘게 된다.
싱가포르는 백만장자가 21.2% 늘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싱가포르 백만장자 수는 6만7000명. 다음은 인도 20.5%(10만명), 인도네시아 16.0%(2만명), 러시아 15.5%(11만9000명), 아랍에미리트 15.4%(6만8000명)의 순으로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4만8000명의 백만장자가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전년도보다 13.3%가 늘어난 것이다. 이스라엘도 7000명의 백만장자가 살고 있다.
12.9%가 늘었다고 메릴린치는 밝혔다.
#갈수록 벌어지는 소득 격차
소득 격차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우선 백만장자와 슈퍼부자의 차이에서 격차를 뚜렷이 느낄 수 있다. 지난해 백만장자 수는 950만명으로 8%, 9만5000명인 슈퍼부자는 10% 늘었다.
백만장자 950만명의 유동자산은 모두 37조2000억 달러. 이 가운데 35%가 슈퍼부자 9만 5000명의 손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슈퍼부자 손이 얼마나 큰지 알만한 수치다.
세계 부자 보고서는 시장 확대와 세계화로 슈퍼부자와 일반부자 사이의 소득격차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세계화와 시장 확대는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부를 쌓기에 좋은 여건을 만들어왔다고 꼬집었다.
쉽게 말하면 개발도상국이 강력히 내건 세계화, 선진국이 밀고나가는 시장 확대가 여러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부자들에게 더 큰 돈을 쥐어준다는 것이다. 돈이 돈을 벌지만 정부 정책도 돈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뜻이다.
일반부자와 슈퍼부자의 소득격차가 이렇게 벌어지고 있다면 부자가 아닌 사람과 백만장자, 슈퍼부자 사이의 소득격차는 말할 것도 없다. 백만장자와 슈퍼부자 자산은 계속 늘고 일반인들 재산은 줄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세계 슈퍼부자는 어떻게 즐기나?
메릴린치의 세계 부자보고서 발표와 비슷한 때에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100만달러를 갖고는 화려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이색적인 보도를 했다. 부동산값 폭등과 물가상승으로 요즘의 100만달러가 예전의 100만달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돈 가치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현재의 100만달러는 20년 전의 54만달러에 불과하다. 100만달러는 주요 대도시의 괜찮은 집 한 채를 약간 웃도는 금액이다. 또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돈이 많이 풀린 데다 금리까지 낮아 100만 달러를 투자해도 넉넉하게 쓸 돈이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100만달러로 미국 재무성의 10년 만기 채권을 살 경우 연간수입은 2만7000달러(약 2700만원)에 불과해 이 돈으로 화려한 노후를 보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만달러를 가진 부자는 이름만 부자다.
그렇다면 슈퍼부자들은 어떻게 즐길까. 그들은 절약하는 면이 있지만 한번 쓸 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마구 써댄다.
막대한 부가 들어오는 대신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일반부자의 11%, 슈퍼부자의 17%가 자선사업 등에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 맨해튼에는 1월이 되면 수백만달러 하는 고급아파트가 잘 팔린다. 연말에 실적에 따라 두툼한 보너스를 받기 때문이다. 이들이 받는 보너스는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몇 백만, 몇 천 만원이 아니다. 수십억, 수백억 원에 달한다. 그러니 좋은 아파트를 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최근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보도내용에 따르면 슈퍼부자들은 품격 있는 취향을 찾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과시적이고 값비싼 물건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만이 특별히 얻을 수 있는 것, 비밀스러운 것, 놀라움과 유머 같은 개인적인 감동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다. 특별히 만든 비싼 옷이나 좋은 자동차를 더 사서 폼을 잡고 다니기보다 학교건립, 기금모금 등을 내세워 유명스타나 노벨상을 받은 권위 있는 학자들을 리조트로 초청하길 좋아한다. 그곳에서 자선공연을 하고 특별대담을 즐기기 위해서다. 떠들썩한 패션쇼에 얼굴을 내미는 대신 자신의 집에
친구들을 초청, 특별패션쇼를 만끽하기도 한다.
슈퍼부자들 취향이 바뀌면서 사치산업도 바뀌고 있다. 미국의 한 출판사는 슈퍼부자의 요청으로 사진과 개인적 편지 등을 담은 자서전을 저술·출판해 제공하고 있다. 책값은 무려 10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또 다른 슈퍼부자는 최근 아내로부터 돈 많고 권력 있는 친구들과의 얘기를 담아 특별히 제작한 책을 선물로 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을 정도다. 3000만 달러의 재산가 입장에서 볼 때 책 한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들은 감탄하고 있다.
슈퍼부자를 공략하기 위한 호텔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한 때 초대형 플라스마 TV나 고급생수를 공짜로 주는 게 큰 서비스였지만 이젠 달라졌다. 고객의 승용차에 그 지역의 토종 꽃을 꽂아준다. 호텔주인이 자주 가는 곳에 함께 가고 주문한 요리의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슈퍼부자들을 위한 전용호텔까지 등장
하고 있다.
###슈퍼 부자들의 투자 특성
닉 디커는 메릴린치의 글로벌 파리이빗 클라이언트 그룹 책임자로 슈퍼부자 특성을 잘 나타내는 말을 했다. 일반부자와 슈퍼부자의 소득격차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슈퍼부자들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슈퍼부자들은 매우 ‘공격적’ 투자자들로 일이 잘 풀리면 떼돈을 번다. 물론 실패하면 크게 잃는 것은 말할 것 없다. 슈퍼부자들은 투자에 신중한 일반부자들보다 더 큰 성과를 낸다.
같은 부자이면서 일반 부자는 투자에 신중하고, 슈퍼부자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공격적인 투자로 나온 다는 것이다. 위험이 큰 만큼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부자들은 지난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등에 대한 투자인 대체투자를 줄이는 대신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늘렸다고 부자보고서는 전했다. 대체투자 비중은 전년의 20%에서 10%로 낮추고 부동산투자는 16%에서 24%로 크게 늘렸다.
이들은 특히 아시아와 동유럽 등 리스크가 큰 자본시장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엄청난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또 원유와 원자재 값 상승도 슈퍼부자들 수를 급격히 늘렸다. 중남미·아프리카·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슈퍼부자들 재산이 급증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부동산과 주식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돈 있는 사람들의 좋은 투자처가 된다. 우리나라 갑부들이 부동산과 주식에서 많은 돈을 버는 것과 같다. 이런 흐름은 세계적 현상이다.
결국 돈을 벌려면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되 안전성만 좇지 말고 모험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돈이 있어야 하고, 배짱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
지를 다 갖춘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돈은 있지만 배짱이 없는 사람도 있고, 돈은 없으면서 배짱만 있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돈은 아무나 버는 게 아니다.
정우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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