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유대인<3>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美 퀀텀펀드 회장
현 국내외 정세가 예사롭지 않다. 저 멀리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과 대립이 상시적인 가운데, 이스라엘의 대 레바논 전격 침공은 국제사회의 생생한 공분을 일으켰다. 또한 미국이 장악한 이라크 내에서는 연일 테러 정국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북핵 파문을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의 혈맹관계에 급속한 균열이 가해지고 있는 형국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국제정세 진단 시각은 동서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세계 유일의 패권자라는 인식하에 반미 중심축이 팽배해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옥상옥 즉 미국 위에 군림할 뿐 아니라 세계 전반에 걸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다국적 초국적 지배세력에 대한 통찰 부재가 지구촌 흐름을 조망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분야에서 막강 위력을 과시하면서 독보적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수민족 유대인에 대한 면밀한 미시적 조망이라 할 것이다. 이에 일요서울에서는 기획특집으로 ‘세계 속의 유대인’ 시리즈를 기획했다. 독자 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호응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
1998년 1월 3일 심야 김포공항 귀빈실.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든 수수한 옷차림의 신사가 나타났다. 바로 그 주인공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초청으로 한국을 급히 찾은 조지 소로스였다. 한국은 1997년 말 발발한 외환위기 사태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빌려야 하는 절박한 처지였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미국 금융계의 거물들을 초청해 한국에 대한 투자를 신신당부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첫번째 방문객이 조지 소로스였다.
‘금융의 연금술사’, ‘20세기 마이다스’, ‘월가의 황제’ 등 갖가지 각종 화려한 수식어를 등에 업고 있는 소로스(76). 지난 10월 18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제7회 세계지식포럼 개막총회 참석차 다시 한국을 찾은 소로스는 김대중 전대통령과 8년 만에 반갑게 조우했다. 당일 두 거목은 비공개 회합에서 북한과 미국 두 나라가 양자회담에 임해야 하며, 또 양자회담만이 북핵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이처럼 소로스는 국제금융계의 시저로서 군림할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에 직간접으로 관여·개입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폭넓게 확장시켜 왔다.
갖은 고생 끝에 ‘퀀텀펀드 설립’
금융시장에서 소로스가 투자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면 그 상품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소로스의 투자 자체가 금융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함에 다름 아니다. 실제, 1993년 초 소로스가 미국 한 광산업체 주식을 사들였다는 소문이 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금값이 폭등하기도 했다. 또 96년에는 일본에 출몰한 소로스가 “일본 주식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닛케이지수는 폐장 직전 10분 동안 270포인트 이상 치솟았다.
1999년 1월 대림산업이 보유하고 있던 서울증권을 657억원에 사들이기도 했던 소로스,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의 다채로운 이력에 궁금증이 더해온다. 월스트리트의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20세기 최고의 펀드 매니저 조지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상류 생활의 한 유태인 변호사 티바다르 소로스(Tivadar Soros)의 아들로 출생했다.
소로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히틀러가 동유럽을 전격 침공한 덕분에 14세 때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갈 일촉즉발 상황에서 다행히도 아버지 덕분에 비유대인으로 위장하여 학살위기를 모면하였다. 헝가리 농업장관의 양자로 위장 입적되면서 구사일생의 일대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것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헝가리로 돌아왔지만 다시 소련 군정을 피해 영국으로 탈출했다.
이미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 포로로서 러시아 차르의 폭압 아래서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후에도 볼셰비키 혁명 후 벌어진 백군과 적군 사이의 3년 내전 동안에도 그의 부친 티바다르 소로스는 여러 차례 사지(死地)를 넘나들었다.
티바다르 소로스는 이런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앞서 위기를 직감하는 능력을 갖게 됐고, 이 능력은 아들 조지 소로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게 된다.
“신만이 그 흐름을 아는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예측불허의 세계, 천문학적 거금이 전광석화처럼 초스피드로 종횡무진 넘나드는 복마전 속에서 소로스가 금융계의 절대신으로 불리는 밑바탕에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생존 본능이 이미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소로스는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은닉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었다. 현기증 나는 초대형투기판에서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까닭에 소로스는 냉정한 승부사, 미스터리 맨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러한 소로스의 자수성가 비결에는 고달픈 영국 이민시절 또한 단단히 한몫 거들었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훗날 그가 “내 생애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배고픔과 고난의 나날이었다.
소로스는 새벽녘까지 부자들이 춤추고 술 마시던 쿼그리노의 웨이터로 일하며, 식사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새벽에 이들이 남기고간 음식 찌꺼기로 배를 채워야 했다. 웨이터 생활을 하면서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그는 ‘런던경제스쿨(LSE)’에 진학하여 1952년 졸업한다.
당시 이 대학에는 세계적 석학 ‘칼 포퍼교수’가 재직했다. 포퍼교수는 반전체주의, 반마르크스 성향의 신우익 사상가이자 양자 역학 등 물리학을 철학적 분석틀로 즐겨 사용하던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소로스가 1979년 설립한 자선단체격인 ‘열린사회 재단’도 포퍼의 저서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따온 것이며, 자신이 세운 회사에 ‘퀀텀(Quantum-양자) 펀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포퍼와 무관하지 않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철도역 짐꾼, 여행 세일즈맨, 은행 수습사원으로 고달픈 생활을 꾸려나가던 그는 56년 미국으로 건너와 제 기량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한다. 증권회사 주식분석가 및 펀드담당자로 근무하다가 39세에 독립하여 퀀텀펀드를 설립했다. 퀀텀펀드의 승승장구로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으면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쟁취하게 된다.
소로스가 1969년 1만달러로 시작한 퀀텀펀드는 20여년 후 2,100만달러 규모로 확대됐다. 소로스는 약 19년 동안 복리로 연 34%라는 최장 최고의 수익률을 올림으로써 공모 펀드의 황제로 등극한다. ‘외환· 증시· 선물’ 등 돈벌이가 되면 어떤 상품이든 공격적 투자를 한 결과다.
영국과 환율전쟁서 KO승
소로스의 오늘이 있게 만든 퀀텀펀드는 ‘국제적 환투기꾼’으로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일명 헤지펀드의 선봉장 격이라 할 수 있다. 조지 소로스의 ‘퀀텀그룹’은 전 세계 헤지펀드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조지 소로스는 동남아시아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돼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는 그를 겨냥해 ‘자본주의의 악마’라며 노골적 적개심을 드러내며 맹비난했다.
특히 헤지펀드는 100명 미만의 투자가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자금을 모아 파트너십(partnership)을 결성한 후에 카리브해의 버뮤다제도와 같은 조세회피 지역에 위장거점을 설치하고 자금을 운영하는 투자신탁이다. 일반인들의 자금을 모아 투자하는 뮤추얼 펀드와는 달리 소수 갑부들의 돈을 모아 맹수적 투자를 감행하는 것이다.
이미 10년전인 1996년말 헤지펀드의 자산운용 규모는 3조7,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서방 7개국(G7)을 포함한 OECD의 모든 중앙은행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 규모가 5,00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헤지펀드가 국제금융 시장에 미치는 위력이 얼마나 파괴적인가 하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1996년 9월 금융기관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남아메리카와 동유럽 등 투자위험성이 비교적 높은 신흥시장에 집중 투자하는 헤지펀드가 최초로 생겼다.
소로스가 국제금융시장에서 독보적 인물로 추앙받게 된 절호의 계기는 다름 아닌 영국중앙은행과의 전면전에서 이룬 쾌거였다. 한 나라 통화의 가치보존을 제1과업으로 삼고 있는 중앙은행과 벌이는 총성 없는 전쟁. 바로 그 투기적 공격이 1992년 10월에 파운드화를 향해 전격 감행되었다.
1990년 영국은 경제의 취약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1파운드당 2.95마르크의 환율로 유럽환율조정체제(ERM)에 가입했다. ERM 이란 유럽공동체가 유럽 단일 통화권으로 가기 위한 이전 단계로 유럽 각국의 통화가치를 연계해 만든 장치였다.
그러나 파운드가 고평가돼 있다고 확신한 소로스는 대대적으로 파운드화 매도에 나섰다. 이에 편승하여 유럽 외환시장에서는 경제력이 더 나은 독일 마르크화를 사기 위해 영국 파운드화를 투매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당시 유럽환율조정체제(ERM)에 따라 마르크화 대비 파운드화 가치를 유지해야 했던 영국은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단 하루 만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속수무책으로 급감하자 영국은행은 무려 280억파운드를 투입해 환율 방어에 나섰으나 시장의 투매를 막지 못했다.
하루 사이에 영국은 이자율을 10%에서 12%, 15%로 올렸지만 결국 영국 파운드화는 20%나 가치가 하락했고 영국은 ERM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검은 수요일(92년 9월 16일)’ 단 하루 만에 10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돈을 벌어들였고 영국은 33억 파운드라는 막대한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당시 영국 여왕의 돈이 파운드화를 침공한 퀀텀펀드에 투자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85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한 소로스는 1979년 설립한 자선단체 ‘열린사회재단’을 운영하는 세계적인 자선사업가로도 명망이 높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자선사업에 투입한 액수가 총 250억 달러에 달한다. 이런 노력으로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꼽은 자선가 순위에서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열린사회’ 설립 ‘민주화 성원’
소로스는 자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칼 포퍼의 뜻을 따라 ‘열린사회’ 구축을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섰다. ‘열린사회’를 통해 독립언론과 공정선거를 촉구해온 그의 첫 자선활동은 1979년 아파르트헤이트(흑인 차별정책)로 신음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 학생 지원으로 시작됐다. 1980년대 말에는 동유럽·구소련 체제변화에 가속도를 붙이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구소련 붕괴 후 과학자들의 생계가 막막해지자 1억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열린사회’는 우즈베크와 키르키즈(옛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크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5개의 구소련에 2억 달러를 투입하여 보건·법률 및 사법개혁, 교육지원사업을 후원하여 왔다.
지난 10월 24일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소로스는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전직 고문인 제레미 벤 아미 벤튼 커뮤니케이션 부회장과 이스라엘 정책포럼의 데이비드 엘코트, 소로스 회장이 설립한 열린사회 연구소의 모트 할페린, 개혁 성향의 유대교 랍비 데이비드 사퍼스타인 등이 참여하게 될 팔레스타인 평화정착을 지원하는 로비 단체 설립을 전격 검토 중인 것으로 보인다.
2004년 미국 대선 당시 2,500만 달러를 부시 재선 반대 운동에 쏟아 부었던 소로스. 스스로 부자임에도 부자의 배를 채워주기 위한 부시 대통령 감세안에 반대한 소로스는 자신을 "금융적, 박애주의적, 철학적 투기꾼 등 복합 이미지로 불러 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상극의 단어들이 유일하게만 소로스에게 들어맞는다.
소정현 국제전문 oilga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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