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國富)펀드가 세계 금융시장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이 남아도는 달러나 오일 머니를 이용해 선진국의 기간산업을 야금야금 인수합병(M&A)하며 엄청난 수익을 올리자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국부 펀드를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부펀드는 세계 최대의 외환 보유국인 중국, 일본, 달러가 넘치는 중동국가 등의 정부가 직접 수백~수천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국제 채권, 주식, 부동산 등에 투자하는 것으로 수익이 많은 게 특징이다.
석유로 벌어들인 달러나 무역수지 흑자로 쌓아 놓은 달러가 국부펀드의 주요 재원이다.
국부펀드를 운영하는 나라는 아랍에미리트(UAE), 중국, 한국, 러시아, 쿠웨이트 등 20여개 국가를 넘는다. 이들이 운용하는 펀드의 규모는 약 3조 달러. 우리 돈으로 따져 3000조 원에 이른다.
모건스탠리는 2015년이면 국부펀드의 규모가 12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모건스탠리 전망이 맞아 떨어진다면 세계 경제는 국부펀드가 주름잡을 날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부펀드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랍에미리트 국부펀드 큰 손
민간 투자기관에서 운용하는 수십조 달러의 자금이 투자처를 찾아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정부에서 투자한 3조 달러가 가세하고 있는 것이다.
국부펀드가 채권, 주식, 부동산, 상품 등 어느 쪽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금융시장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현황을 보면 국부펀드가 왜 문제가 되고 그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국부펀드를 가장 크게 운용하는 나라는 UAE다. 자그마치 8750억 달러. 전체 3조 달러의 30% 가까이 된다. 쉽게 말하면 UAE정부가 8750억 달러를 세계 금융·부동산 시장에 투자한다는 얘기다.
싱가포르는 싱가포르투자청과 테마섹을 통해 40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국부펀드의 주요 재원은 크게 오일 달러와 무역에서 남는 돈이다.
오일 달러는 중동국가들의 전유물인데 UAE,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브루나이, 이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국가들은 막대한 오일 머니를 외국에 직접 투자하는 것은 물론, 기름을 팔아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경제 대국의 달러를 끌어들이고 있다.
다음은 무역수지 흑자로 달러가 넘치는 경우로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1조3000억 달러의 외환을 갖고 있다. 자고나면 외화가 들어와 쌓아놓을 곳조차 없을 정도다.
외화가 너무 많아 미국 등지로부터 무역수지 균형을 위해 노력하라는 ‘압력’도 받는다. 일본과 한국이 각각 9136억 달러와 2507억 달러를 갖고 있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다 무역수지 흑자 때문이다. 외환 보유국도 독일과 브라질을 빼면 1등부터 모두 아시아 국가들이다.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나라는 대부분 중동과 아시아국가에 몰려있다. 미국과 노르웨이를 빼면 모두 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이다. 세계 곳곳에 고루 퍼져 있어야 할 돈이 중동과 아시아에 몰리고 있다는 증거다.
한때 ‘못사는 나라’의 대명사였던 아시아와 중동이 넘쳐나는 달러를 가지고 세계 경제무대에 우뚝 선 것이다.
국부펀드는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 경제시스템을 갖춘 나라에서 볼 때 골치 거리가 아닐 수 없다. 국부 펀드의 운용이 선진화, 안정화된 시스템을 따르기보다 수익만 추구해 자칫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부펀드가 각국의 기간산업 M&A 에 본격 나설 경우 견제할 수단이 없다.
3조 달러나 되는 돈이 채권, 주식, 부동산, 상품 등에 고루 투자되지 않고 한 쪽으로 몰릴 경우 국제 경제 시스템은 큰 충격을 받는다.
주식에 집중 투자하면 주가가 치솟아 금융시장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부동산 쪽으로 돈이 몰릴 경우 상업용 건물 값이 거품에 휩싸일 수 있다. 석유, 곡물, 원자재 등에 돈이 몰리면 원자재 값이 올라 산업을 마비시킬 수 있다.
전문가들은 국부펀드가 금융시장에서 민간자본을 크게 위축시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민간자본이 아무리 크더라고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국부펀드를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국부펀드는 또 자산가격의 왜곡을 불러올 수도 있다.
원유 값이 떨어지면 산유국들이 국부펀드를 이용해 원유를 비싼 값에 사들이면 원유가는 오를 수밖에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런 우려를 나타냈다.
일부에서는 국부펀드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국부펀드가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견해다. 예를 들어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주식이나 채권을 감정적으로 몽땅 팔아버릴 경우 당사국은 혼란을 겪게 된다.
#우리나라는 한국투자공사(KIC)가 전담
우리나라도 국부펀드 대상 국가에서 빠지지 않는다. 세계에서 11번째 가는 2백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기관인 한국투자공사(KIC)가 국부펀드 운영회사다. KIC는 2005년 7월 출범한 외화자산 투자전담기관. 부동산, 주식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싱가포르투자청을 모델로 삼고 있다.
KIC의 업무는 2006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됐다. 이강원 초대사장이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된 의혹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KIC는 한국은행에서 170억 달러, 재정경제부에서 30억 달러를 지원받아 국제채권과 주식에 투자, 돈을 굴리고 있다. KIC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90억 달러의 자금을 투자했다. 이 돈은 골드만삭스, 바클레이즈 등 외국계 투자기관에 맡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KIC는 투자액의 90% 이상을 채권 등에 투자한다.
주식투자 비중은 지난 4월을 기준으로 7%대에 머무는 실정이다. 싱가포르투자청의 62%, 노르웨이 중앙은행의 57%보다 주식투자 비중이 아주 적은 편이다.
KIC는 투자대상을 채권과 주식에서 사모펀드, 부동산 등으로 확대해 줄 것을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 등에 요청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KIC업무 영역은 더 넓어져야 하지만 KIC도 국부펀드 운용 노하우를 빨리 터득해야 한다.
KIC가 수익을 내는 것은 국가가 수익을 내는 것이고, KIC가 손해를 보면 국가가 손해 보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국부펀드가 세계 경제의 한 축으로 떠오른 이상 우리도 KIC를 지금보다 더 크게,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민간 부문에서 투자할 수 없는 부분을 국부펀드가 커버하는 것은 국가의 부를 키우는 좋은 방법이라 할 있다.
여러 문제점에도 국부펀드는 이제 세계 경제를 쥐는 ‘큰 손’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이다.
##국부 펀드 무엇이 문제인가?
국부펀드는 규모가 큰 만큼 투명해야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투명성이 떨어져도 이만저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점이 바로 투명성 하락이다. 노르웨이의 국부펀드를 빼고 나면 대부분의 국부펀드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심지어 헤지펀드보다 더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돈이 한 곳으로 몰리더라도 시스템만 안전하면 문제가 덜하지만 국부펀드는 운용 시스템 자체가 안정적이지 못한 게 특징이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일정한 규칙에 맞춰 축구경기를 하고 있는데 고등학생 몇 명이 들어와 제멋대로 공을 내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국부펀드를 이용해 인수합병(M&A)에 나설 경우 당해낼 수가 없다.
중국이 최근 미국의 사모펀드 그룹인 블랙스톤에 3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하면서 비상한 관심을 끈 일이 있다. 정부가 직접 나서 펀드에 투자하고 M&A까지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의 국영회사 두바이월드포트는 지난해 뉴욕 등 미국 6개 항만의 운영권 인수를 시도했는데 미국은 외국인 투자 검토위원회를 열어 이를 중단시킨 일이 있다.
UAE가 8750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국부 펀드를 활용, 외국 기업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려는 계획에 제동을 건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뉴욕 항만의 운영권이 UAE로 넘어갈 경우 자존심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지만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미국,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국부펀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영국의 바클레이즈 은행은 네덜란드의 최대 은행인 ABN암로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 국영개발은행 (CDB)와 테마섹이 지원금을 대주기로하자 국부펀드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개도국 정부가 국부펀드를 통해 자신의 에너지,통신, 금융 등 주요 기간산업을 인수해 통제력을 높여가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M&A시장에서 가장 큰 손으로 등장한 국부펀드를 규제해야 한다는 소리가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 거세지고 있다’고 보도했다.미국과 EU가 규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개도국들이 막강한 국부펀드를 앞세워 자국의 기간산업을 무차별 인수하려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에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도록 요구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공동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앙겔라 메르겔 독일 총리가 사적인 투자이익보다 정치적 동기에 따라 움직이는 국부펀드는 ‘긴급히 다뤄야할 새 현상’으로 지적하고 국부펀드 규제를 EU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특히 메르겔 총리가 최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국부펀드 문제를 논의하고, EU가 나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IMF가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국부펀드의 회계정보와 투자목적 등을 공개해야 한다는 강경 입장이다.
클레이 로워리 미국 재무 차관보는 국부펀드가 매년 자산실태를 공개하고 사기업의 소규모 지분만 인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부에서는 국부 펀드가 이런 규정을 어길 경우 아예 지분인수를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정우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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