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桓)’, 새로운 미래를 여는 핵심코드
전 지구적인 미래비전의 핵심은 발전적 공존과 상생적 통합이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인류로 하여금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세계 각국 정상들은 국제무대에서 위기극복을 위해 협력과 공생을 다짐하고 있지만, 내심 조용하고 은밀하게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격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진리이지만, 난세에 끝까지 협력과 단결을 이루어 내는 일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인류는 위기 앞에서, 그리고 자국의 이해 앞에서, 얼마나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단결과 화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어느 한 사회학자가 현대사회의 빈곤은 물질의 빈곤이 아닌 관계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빈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정신의 빈곤에서 비롯된 관계의 빈곤이 물질적 빈곤의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인류는 역사를 통해 많은 지식과 기술을 축적해 왔기 때문에 절대빈곤으로부터 인류 전체를 부양할 만한 충분한 식량과 자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기 이기주의, 사회 이기주의, 국가 이기주의, 민족 이기주의에 의해 그것이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결핍의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기주의적 토대 위에서 결핍의 문제를 보완하려다 보니 국가간 또 다른 대결과 충돌을 낳는다. 이러한 역사적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돌아볼 때, 충분한 관심과 보살핌이 있는 관계의 상황에서 빈곤은 존재하지 않으며, 빈곤의 해소는 국가정책이나 시장경제의 영역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관계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의 부활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상호 신뢰와 존중이다. 서로 간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며, 그를 바탕으로 서로가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할 수 있는 신뢰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 신뢰에 대한 책임의 의무를 다하는 표리일치의 정신과 지행합일의 실천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어느 한쪽이 한쪽을 선도적으로 이끌기도 하고, 또 협력하기도 하면서 정반(正反)의 관계를 통해 합(合)의 지점을 도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들은 현실적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국가든 배타적인 관점의 저항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너무나 큰 상처를 입어 왔다. 내세우는 명분과는 달리,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종속하는 관계는 20세기를 넘어 21세기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 국가와 민족에 고착화된 불신의 장벽을 뚫고 진심을 전달한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상생의 국제관계 트리플-윈(triple-win)
우리나라가 이러한 종래의 상극적 관계방식을 개선하고 상호 호혜적인 상생의 국제관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하나의 정신문화를 특화시켜 공감코드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 정신문화란 자신도 좋고, 상대방도 좋고, 나아가 세상도 좋은, 트리플-윈(triple-win)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미 ‘한(桓) 남방아시아연합’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적 이득의 관점만을 가지고 맺어진 국가 간의 관계는 금전적 이득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없다. 일방적인 이해관계는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만들어 가지 못한다. 더구나 상대국을 힘으로 복속시키고, 상대의 문화를 종속하는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지구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한(桓) 미래비전인 한(桓)사상
물론 각 국가간의 현실적인 경쟁은 계속되고 힘의 논리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일방적 패권국가가 사라진 21세기, 더욱 진화한 인류의 이성과 합리는 서로 간의 공감과 소통을 통해 그러한 기존의 상극관계를 종식시킬 다자간 테이블을 마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상호 경쟁과 힘의 논리 또한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이해, 신뢰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범인류적 합의가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일시적으로 상대국을 힘으로 억누를 수 있다 해도, 앞으로 그러한 행위는 국제사회에서의 고립과 지탄으로 반드시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한국이 지배와 종속, 수탈이라는 기존의 상극적 모델을 뛰어넘어 트리플-윈(triple-win)의 새로운 국제관계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결국 이전의 다른 나라들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정신문화의 모델을 기반으로 타국과의 교류를 시도해야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래비전으로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문화의 모델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한(桓) 미래비전인 한(桓)사상”이다.
한(桓)사상은 문화의 기원
세계에는 각양각색의 사상과 문화들이 존재하지만 인류의식의 기저에는 어떤 보편적인 원형 문화가 존재한다. “한(桓)사상”도 그러한 원형 문화의 한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늘’, ‘크다’, ‘밝다’, ‘하나다’, ‘근본이다’ 라는 의미를 가진 한(桓)사상은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은 근원이 하늘인 하나, 즉 ‘우리는 하나다’, 라는 통합의 정신적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 ‘한(桓)사상’은 제법 많은 민족의 언어에 실재적인 흔적으로도 남아 있다. 우리 한민족의 하늘, 하나, 한아버지[할아버지], 한어머니[할머니], 한가위, 환하다와 같은 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몽고어의 ‘h·kan’, 터키어의 ‘h·n’이나 헝가리어의 ‘hahan’ 등도 모두 광대한, 웅장한, 임금, 으뜸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도 ‘한’을 연상시키는 발음들이 ‘크다’ 또는 ‘으뜸’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들이 있다고 연구된 바 있다.
이처럼 “한(桓)사상”은 한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실체뿐만 아니라, 현재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는 이러한 한(桓)사상이 정신적 기저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하나’라는 슬로건에 대한 보편적인 친숙함이다. 이 명제는 그 표현의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민족도 이를 쉽게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인류보편의 가치도 결국 ‘우리는 하나’라는 무의식적 기저에서 나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우리는 하나’라는 이 정신적 기저는 인류사에 있어 전체주의나 극단적 민족주의에 이용된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분으로 시도된 일본의 식민지 건설이나, 20세기 후반 팍스아메리카나로 대변되었던 미국의 세계경찰국가 역할이 그 예다. 이런 힘의 논리에 따라 지배된 불행한 역사는 ‘다양한 하나’라는 말이 전체의 획일화로 이해되거나 민족과 국가와 같은 지엽적 단위만의 동질성을 극단적으로 지향하게 되면서 빚어진, 불균형적 세계관계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라는 말 안에는 같음과 다름이 공존한다. ‘우리’라는 말은 ‘나’와 ‘너’라는 다른 두 존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너’가 없다면, ‘나’의 정체성도 약해진다. 따라서 ‘나’와 다른 상대의 정체성을 인정해 줄 때 나의 정체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이렇게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서로가 하나의 시원(始原)에서 비롯된 인류이다’ 라는 것을 반증한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나’와 ‘너’란 말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는 ‘우리는 다르지만 같은 하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문화만을 내세우고자 하는 패권주의적 사고는 같음과 다름을 통합적 관점이 아닌 이분법적 관점으로 접근하기에 일어나는 편향적 사고이다. “한(桓)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양함 속에 내재된 공통의 가치를 통합적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한민족에게는 ‘우리는 하나’라는 사상이 전 국가적 행동양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다른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하지 않았던 고구려나 발해의 유목민족적 통합방식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침략을 정치적 타개책으로 삼지 않았던 후대 왕조들의 암묵적 치세규범이 그러하다. 이는 한민족에게는 일방적 복속이 우선이 아니었으며, 상생과 통합의 가치가 우선이었음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상대의 문화를 인정한다는 것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 차이를 존중하고 그에 따른 실천적 행동을 수반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우리는 하나’라는 정신적 기반이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토대로 유추해 볼 때, 하나의 정신적 기반이 국가적 행동양식으로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것은 한민족에게 뿌리 깊은 정신문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한(桓) 미래비전인 한(桓)사상”이다.
물론 한(桓)사상의 원류가 되는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주류 사학계나 재야 사학계에서 아직 확정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다. 한때 사학계를 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상고사의 한국이 실존하였는지, 단지 전설일 뿐인지 현재로서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실증을 중시하는 주류 사학자의 진중함과 가능성을 중시하는 재야 사학자의 진취적 기상은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서 ‘한(桓)사상’의 실체 및 유무에 대한 확정적 결론은 일단 유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桓)사상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 이어져 오던 정신적 문화이며 전통이었다는 점은 주류 사학도 재야 사학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앞서 본 것처럼, 언어적 개념으로 우리의 정신에 남은 한(桓)의 뜻과 국가적 행동 양식으로 보여 준 실천적 자세는 엄연히 ‘우리는 하나’라는 한(桓)사상의 실존을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류보편의 가치에 부합되는 뛰어난 정신문화가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녹아 있다면, 당연히 이를 연구하고 가치 있게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에서 나왔다는 통합의 철학을 갖고 있기에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존중하는 한(桓)사상은 인류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범용코드이자 핵심코드가 될 수 있다. 그 실체의 원류에 대한 연구와 논쟁은 앞으로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학문적인 영역에서만 머물 필요는 없다. 그것이 더 나은 미래를 열 수 있는 긍정적 가치를 가졌다면, 실용의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연구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극단화된 물질문명으로 인해 많은 정신문화들이 잠식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한(桓)사상의 흔적은 현대에도 면면히 우리민족에게 이어져 오고 있다.
얼마 전 고립무원의 멕시코에게 보여 준 한국정부의 태도는 이러한 한(桓)사상의 재현 가능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다. 신종플루라는 국가적 재난으로 소위 형제국가들에게도 외면을 받던 멕시코 정부가 지구 반대편의 나라 한국에게서 받은 도움은 단지 구호물품뿐만이 아니다. 인종과 지역, 국경을 넘어 ‘우리는 하나’라는 한민족의 따뜻한 마음과 정신을 받은 것이다.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과 보호에만 급급해 할 때, 과감하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한국정부와 민간의 이러한 자세는 단순히 일시적인 국제관계의 철학만으로 내려진 결정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철학의 기저에는 한민족의 정신적 문화인 한(桓)사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편적인 하나의 사건으로서, 하나의 가능성을 엿본 것일 뿐이다. 이를 조금 더 현실적이고 실체적이며 지속 가능한 사실로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말 그대로 우리 민족의 정신에 녹아 있는 한(桓)사상의 체계적 정립이 필요하다.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 이전과 다른 모델이 절실함을 감안해 본다면, 타민족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서로 간의 공존과 상생적 통합의 길을 모색하는 한민족의 정신을, 세계인이 공감하는 ‘21세기 한(桓)사상’으로 재탄생시켜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인다.
높은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브랜드의 저평가로 인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현상의 본질은, 궁극적으로는 외부의 평가 문제에 있지 않다. 기술은 모방이나 이식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브랜드가치는 모방과 이식이 불가능하다. 기술력을 뛰어넘는 무형적 가치를 우리 내부에서 찾지 못한다면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치를 부지불식간에 외면하면서 외부에서 이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서구 기술문명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서양문명은 기술적 가치 이상의 것에 눈을 뜨고, 근래에는 그것을 동양의 정신에서 찾고자 하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흐름은 우리에게 큰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기술력이 뒤처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관심하게 외면했던 일상의 가치가 오히려 세계적 경쟁력을 낳는 브랜드가치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류’가 왜 세계적 추세로 흘러갈 수 있는가?
기술력으로 대변되는 하드웨어적 시스템이 일정 수준에 오른 것도 중요한 이유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경쟁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던 ‘한국적 정서와 사고방식’이 국적을 불문하고 세계에 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 대한 구호의 예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결국 ‘메이드 인 코리아’에 담겨야 할 기술력 이상의 무형적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이기에 그러하다. 이렇게 저평가 인식의 극복은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먼저 우리 스스로의 본래 가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복원하느냐에 달려 있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 국가 간의 교류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필요로 하는 실질적인 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실용적인 사고관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실용은 의식주에 국한된 생존을 위한 물질적 구현을 의미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물질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실용은 무한한 정신적 실체와 그를 통한 상호 신뢰관계까지도 담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또 그러할 때 물질의 차원을 넘어 정신과 문화의 전 방위적 교류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경제협력을 뛰어 넘어 항구적인 공존과 상생적 통합을 이루고자 한다면, 반드시 한(桓)사상과 같은 정신문화가 필요하다. 뛰어난 정신문화는 단순히 온정적 차원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협력관계에서 다방면으로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단지 힘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만으로 연결된 기존 국가관계들과는 달리 서로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가짐으로써 인류보편의 동질감을 회복하게 되는 ‘나눔과 공감 차원의 교류’로 승화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실리만을 추구하는 경제관계를 넘어 자연스럽게 상호 신뢰를 통한 발전적 공존과 상생적 통합의 협력모델을 만들 수 있다.
한국, 동북아 넘어 세계중심 국가로
한국이 국제 사회에 공헌하는 선도국으로 거듭나고 동북아의 허브를 넘어 세계의 중심국으로 부상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와 통합의 가치를 기반으로 한 정신문화를 토대로 상대국과의 교류를 시작해 볼 필요가 있다. 무분별한 의존으로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한 극단적인 친미, 친중, 친러, 친일과 같은 사대주의도, 자존의 감정이 왜곡되어 극단적인 폐쇄의 경향을 가지게 되는 국수주의도 우리의 진정한 미래 모델이 될 수 없다. 수많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인류역사를 돌아보아도 자신의 정체성이 명확해야 외부와의 소통과 교류가 가능해져 진정한 번영과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바로 정신의 힘에서 나오고, 정신의 뿌리는 역사에 있으며, 그 역사의 뿌리를 제대로 간직한 나라야말로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끊임없는 외부와의 긍정적 소통이 가능한 그러한 새로운 모델은 결국 같음과 다름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한(桓)사상의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 녹아 있는 한(桓)사상을 하나의 현대적 가치로 활용함과 동시에 인류의 새로운 미래비전인 “한(桓) 미래비전”이라는 관점으로 승화시켜 진지하게 연구하고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테크놀로지만으로 이룰 수 없는 ‘우리는 하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의 구현이 곧 물질을 물질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항구적 상생관계를 구현할 수 있는 초석의 역할을 할 것이며, 그것의 핵심 열쇠는 바로 “한(桓)”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라는 조화와 통합의 가치를 구현할 한국의 미래 청사진으로서 “한(桓)”을 제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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