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북특사 못 된 내막 현정은 회장 북한 방문 속사정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 북한을 전격 방문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민감한 시기에 사전예고 없이 이뤄진 것이어서 세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외신들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클린턴 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메시지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전달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북한에 억류된 자국 여기자 석방관련 대화 외에 다른 논의는 일절 없었다고 밝혔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재임시절 대북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대북 정책 노선을 확정하지 못한 오바마 정부가 마련한 카드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자 억류 등으로 꼬인 북한과의 관계를 풀 특사로 클린턴 전 대통령을 북한에 보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아울러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과 관련 핵심의문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왜 클린턴인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북한에 어떤 선물을 줬나’하는 의문이다. 이 두 가지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클린턴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곧바로 북한을 방문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에 억류된 현대 아산 직원 유모씨의 석방을 위해 방북한 것처럼 보인다. 일각에선 현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특사 자격으로 북한에 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북미간의 정세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북한의 행보가 어떻게 달라질지를 놓고 외교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은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것은 없다”며 대북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미국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독일 등 유럽 국가는 “북한에 끌려가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한 제스처”라고 분석하고 있다.
특사파견 부인 미국의 속내
미국은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북정책 방향을 확정하지 못해 북한의 움직임에 신중한 모습을 보여 왔다. 제 3국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의 이런 모습은 북한에 끌려가는 인상을 줬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미국은 이번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길 꺼리는 느낌을 주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한국측에 방북결과를 전했으나 속 시원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당초 외교가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그동안 막혔던 남한·북한·미국 3자간 대화가 새 국면을 맞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지난 11일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물은 기대 이하였다.
정부 당국자들은 이날 “미국측이 전해온 바에 따르면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남북한과 미국간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별로 바뀔 건 없었다”며 미국이 확고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거듭 확인했다.
미국 정부가 이번 주 초 한국 등 북핵문제 관련국들에 통보한 내용은 크게 북핵 문제와 북·미관계 정상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 등이 핵심 현안이다. 그리고 김 위원장의 발언 내용과 심층분석 자료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입장은 변한 게 없다. 북핵 문제와 북·미 관계정상화 문제에 대해 미국이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직접 제안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 클린턴 전 대통령과 동행한 로저 밴드 박사는 김 위원장의 건강 상태를 관찰한 결과 건강에 큰 이상이 없어 보인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북한의 이 같은 입장 고수에 미국은 대북 제재 전선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대북정책 기조를 바꿀 만한 변수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의 전부다.
한 정부 당국자는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미 회담과 북한의 비핵화 등 현안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하기 위한 특사로 방북한 게 아니라 단순히 평화사절단 성격으로 방북한 것 같다”며 “따라서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대북제재를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 소식통을 비롯해 외교가 안팎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은 오바마 특사파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외교가에선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내용을 모두 공개했을 리 만무하다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독일의 한 언론도 “클린턴 전 대통령이 단지 미국 기자 2명의 석방을 위해서 방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확실하다”면서 “그를 현 미국 정부의 특사로 볼 수 있다”고 지난 5일 전한 바 있다.
이런 점 등을 감안할 때 대북외교라인이 아직 정비되지 않은 오바마 정부가 여러 가지 대북현안을 풀기 위해 클린턴 전 대통령을 특사로 북한에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원한 남측 특사 누구?
클린턴 전 대통령이 억류됐던 여기자 두 명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고 4일 뒤인 지난 10일 국내에서는 두 여성 지도자의 행보가 주목을 끌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현 회장이 바로 그들이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유럽순방 특사로 임명됐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현 회장은 육로를 통해 북한 땅을 밟았다.
현 회장의 방북은 현재 미국에 억류된 현대 아산 직원 유씨의 석방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억류자를 석방시키기 위한, 사실상 이명박 대통령의 특사가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현대그룹에 따르면 현 회장의 이번 방북에 대한 논의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하기 하루 전인 지난 4일 금강산에서 열린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전 회장의 6주기 추모행사에서 처음 나왔다. 현 회장이 이날 금강산을 방문한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에게 당면 현안문제 협의를 위해 자신의 평양 방문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 부위원장은 대남 민간교류 사업을 총괄하는 최고위급 인사로 1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오찬에서 현 회장의 방북문제를 논의했다. 리 부위원장은 현 회장의 방북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했으며 북측이 후속 조치로 현 회장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일각에서는 북측의 요구에 따라 현 회장이 사전에 북측에 추모행사 일정을 북에 알리고 북한은 리 부위원장을 파견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선 현 회장이 故 정 전 회장의 추모행사를 금강산에서 하고 싶다는 의사를 북한 측에 전했고 북측이 추모행사 일정에 맞춰 리 부위원장을 파견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어느쪽이든 북측이 왜 현 회장과의 접촉을 원했느냐가 의문으로 남는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남측의 요청에 순순히 응한 적이 없다는 전례를 들어 북측이 현 회장과의 만남을 먼저 원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특사파견 역시 북측이 미국 정부에 먼저 요구한 사항일 것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일부에선 북측이 현 회장의 방북을 허용한 것을 두고 모종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클린턴 전 대통령을 통해 북한의 경제제재를 일부 풀어주기로 약속함에 따라 북측이 현대와 접촉, 남한 정부에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당초 북측이 남측에 요구한 특사는 현 회장이 아니라 박 전 대표라는 소리도 들린다. 실제로 박 전 대표는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꾸준히 대북특사로 거론돼 왔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 정치인 중 가장 신뢰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박 전 대표라고 한다. 박 전 대표가 과거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박 전 대표를 매우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대북문제의 해법을 제시할 특사가 아니라 유럽순방 특사로 임명됐다.
박근혜 유럽특사 파견 내막
청와대는 지난 10일 박 전 대표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을 순방하며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표는 오는 24일부터 내달 5일까지 이명박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헝가리와 덴마크, EU(유럽연합)를 방문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월 박 전 대표와의 청와대 비공개 회동 때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EU를 방문해줄 것을 제안했고, 박 전 대표는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특사 임명 시기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절묘하다.
정치권에선 북한의 박 전 대표 방북 요청을 받은 정부가 고심 끝에 현 회장을 특사로 파견하는 쪽으로 결정했다고 보는 시각이 파다하다. 향후 가깝게는 개각과 오는 10월 재·보선, 내년 6월 지방선거는 물론 길게는 차기 대선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에 따라 정부가 박 전 대표를 유럽특사로 돌린 것 아니냐는 것이다. 뜬금없는 유럽특사 파견을 놓고 박 전 대표 달래기 또는 시선 돌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그래서다.
한편 현 회장이 북한 체류 일정을 세 번이나 연장하면서까지 북한에서 어떤 성과를 거둘지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동시에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 특사로 외국을 방문한 이후 정세에도 정치권의 촉각이 쏠리고 있다.
일단 유씨의 석방문제를 해결한 현 회장은 사실상 중단된 대북 사업 제계를 적극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이 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선 아직 확인된 바 없으나 정부의 대북정책과 입장을 알리는 수준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이에 현 회장을 통해 정부의 대북 협력 사업도 다시 모색될 것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이와 더불어 박 전 대표는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EU를 다녀온 뒤 이 대통령과 회동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이 회동에서 향후 당권 및 지방선거 대책 등이 폭넓게 논의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박 전 대표가 대통령특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 당선직후인 지난해 1월에 ‘당선인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3박4일간 방문한 바 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귀국 후 이 대통령과 만나 성과를 전한 바 있다.
[윤지환 기자] jjh@dailysun.co.kr
윤지환 기자 jjh@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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