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인생역정 ‘재조명’

‘바보 노무현’에서‘노짱’ 으로…고향, 봉하에서 지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뇌물죄로 구속기소될 것으로 알려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3일 새벽 봉하마을 뒷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치권과 검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결국 측근 비리와 가족들의 비리사건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로 이어지고 말았다. [일요서울]은 빈농에서 자라난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에 당선되고 결국 자살까지 한 그의 인생을 되돌아 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난한 빈농에서 자랐다.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어머니 이순례씨와 아버지 노판석씨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학업성적은 우수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학교를 자주 결석했다고 한다. 1966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 진학을 뒤로 하고 군입대를 하게 된다.
제대 후 그는 본격적인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하지만 사법시험에 계속 떨어지면서 방황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때 그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 권양숙 여사다. 이미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권 여사와 1973년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결혼을 해서 안정적인 된 노 전 대통령은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된다.
3년간의 판사 일을 그만두고 노 전 대통령은 변호사로 개업해 높은 수임료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1981년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는 일이 벌어진다.
인권변호사로 변신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변호를 맡으면서 노 전 대통령은 “고문 당했던 학생들이 나조차 믿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고 나 또한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아 6월 민주항쟁, 대우조선사건에서 노동자 이석규씨가 최루탄에 사망하자 사인규명 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르게 되기도 한다.
옥고를 치르고 변호사 업무 정지처분까지 받게 된 노 전 대통령은 한동안 낭인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정계에 입문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1988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5공 실세였던 허삼수의 대항마로 부산 동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유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고민 끝에 이를 받아 들였고 당선돼 13대 국회의원으로서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 놓는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은 국민들에게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88년 5공 청문회에서 노 전 대통령은 힘 있는 정, 재계 인사들이 증인으로 나온 자리에서 예리한 질문으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국민들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의 갈림길에서 당시 김영삼 총재의 합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소신을 지키며 합류하지 않는다. 이로써 노 전 대통령은 철저한 비주류 정치인으로 한동안 고난의 길을 겪게 된다.
꼬마 민주당에 남아 있던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야권 통합에 합의하고 92년 총선에서 허삼수 후보와 재대결을 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하던 노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부산시장에 도전했지만 낙선한다.
이런 와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종로 재보선에서 당선 돼 약 6년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를 버리고 부산 북강서을로 출마한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부산에 출마한다”며 의지를 보였지만 벽을 넘기엔 부족했다. 이런 고집스러움은 노 전 대통령에게 최고의 자산이 된 노사모를 낳게 했다. 당시 인터넷이 처음 보급되면서 노 전 대통령의 부산 출마에 대해 네티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이들이 바로 노사모의 출발점이 된다.
노풍으로 후보 선출
노 전 대통령은 총선에서 낙선 한 후 2001년 3월까지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이때의 행정경험은 차후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는 좋은 경험이 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1년. 노 전 대통령이 소속된 새천년민주당은 내홍이 한창이었다. 당내 소장파들은 낡은 동교동계를 물갈이 해야 한다며 ‘정풍운동’을 벌였다. 이런 과정속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국민경선제롤 뽑자는 제의가 있었고 이는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는 계기가 됐다. 당시엔 이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일찌감치 대통령 후보로 점쳐져 있었고 지지율 또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철저한 바람몰이가 필요했고 그래서 국민경선제를 도입한다.
국민경선제를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며 당원 50%, 일반국민 50%를 대상으로 직접 투표로 결정됐다. 당시 후보로 나선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를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었다. 당시 새천년 민주당에서는 이인제 후보의 대세론이 유력했다. 제주도에서 시작한 경선은 미미했다. 하지만 세 번째 경선지역인 광주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부산출신인 노 전 대통령이 이인제, 한화갑 후보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광주 경선 직후 소감에서 “광주의 승리는 민주당의 승리,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지게 하겠다”며 벅찬 감동을 보였다. 이후 노풍은 거셌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하며 2002년 4월 서울 경선을 마지막으로 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 당선
하지만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녀들의 비리사건과 당내 반대 세력들은 노 전 대통령 흔들기를 시작한 것이다. 참신한 이미지의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곤두박칠 쳤다. 마침 2002년 월드컵의 성공개최로 정몽준 의원의 바람이 불면서 대안론으로 정 의원이 거론됐다. ‘후보 교체론’까지 나오면서 경쟁력 없는 노 전 대통령 대신 정 의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당내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당내 소장파들은 탈당을 해 한나라당과 정 의원이 만든 국민통합21로 입당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원칙 없는 단일화는 의미가 없다며 계속 반대를 했다. 그러나 상황은 노 전 대통령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오자 노 전 대통령은 “원칙없는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국민들이 원한다면 단일화를 고려해 볼 것”이라며 국민경선 방식의 단일화를 제안했다.
국민통합 21과 후보단일화협의회는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을 반대하며 ‘대의원 경선’을 통한 단일화를 제시했다. 이는 대의원 경선 방식이 정 의원에게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양측의 팽팽한 대립은 계속됐다. 서로에게 유리한 방식의 단일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던 중 새로운 제안이 제시됐다. 바로 여론조사 방식이다. 더는 단일화를 늦출수 없다고 판단한 양측은 결국 이를 수용했다. 노 전 대통령과 정 의원은 직접 만나 단일화에 합의했고 이는 또 다시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는 계기가 됐다.
2002년 11월 24일 결국 여론조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단일화 후보로 선출됐다. 후보가 단일화 되면서 또 다시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상승했다. 하지만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 18일 저녁 돌연 정 의원이 후보단일화를 철회하면서 분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철회 선언을 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정 의원을 직접 찾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심을 자극했고 20, 30대 젊은 층들의 적극적인 투표로 이어졌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불과 1년 전 한자리수 지지율에 그쳤던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파란만장한 인생 자살로 끝내
노 전 대통령의 인생역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취임 초기 안희정 등 측근들의 불법선거자금 사건이 불거지면서 위기를 맞는다. 여기에 특유의 승부사 기질과 무에서 유를 창조한 덕분에 주위에 보이지 않는 불만세력들이 많았다.
결국 국정, 경제 파탄, 측근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재신임을 얻는 기회가 됐다.
국민들은 전국에서 촛불집회로 국회의원들을 비난했고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약 60여일간의 대통령 직무 정지기간 동안 촛불집회자들은 더욱 늘었다.
대한민국 초유의 탄핵안을 심사한 헌법재판소는 2004년 5월 14일 탄핵안을 기각했다. 야당 공조로 이뤄진 탄핵안에 분노한 국민들은 총선을 통해 심판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 제1당을 만들어 줌으로써 탄핵안에 대해 심판한 것이다. 재임기간 내내 말 많았던 참여정부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도덕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청와대에서 집사로 불렸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역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도 비리연루 의혹에 휘말려 검찰에 소환됐다.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씨(59·구속)로부터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6300만원을 받아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도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 대통령 가족이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했다.
국민들의 실망감은 컸다. 도덕성과 청렴성을 바탕으로 한 참여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했다. 지난 23일 오전 6시 50분. 경남 김해 봉하마을 자택 뒷산으로 등산을 간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언덕에서 떨어져 뇌출혈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의 끝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가고 말았다.
[인상준 기자] sky0705in@dailysun.co.kr
인상준 기자 sky0705in@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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