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36] 없어진 공간과 새로운 상징이 교차하는 곳 : 성동구 2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36] 없어진 공간과 새로운 상징이 교차하는 곳 : 성동구 2편
  • 박종평 객원기자
  • 입력 2021-06-04 17:29
  • 승인 2021.06.05 20:11
  • 호수 1414
  • 5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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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성동구 탐방 1편에서는 뚝섬역에서 출발해 ‘성덕정 터’가 있었다는 천주교 성수동교회를 시작해 수도박물관, 전곶교 등을 거쳐 ‘마조단 터’까지 살폈다. 2편에서는 ‘마조단 터’에서 출발해 소설가 ‘김동인 선생 집 터’까지 간다.

 살펴볼 곳으로는 ‘전관원 터’와 ‘아기씨당집’, 왕십리역 근처의 여러 조형물, 마지막으로 ‘김동인 집터’이다. 시간은 걸어서 2시간이면 충분하다. ‘마조단 터’가 있는 한양대 안에도 박물관이 있고, 한양대 역사를 살펴볼 수 있으나 다른 지역의 탐방 때 제외했듯 대학 탐방은 제외했다. 대학 탐방은 대학마다 몇 권의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워낙 많은 인물과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사근동 공영주차장이 된 남이장군 사당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근동 공영주차장이 된 남이장군 사당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지금은 사라진 ‘사근동 남이 장군 사당’

 작년 초에 서울 근교에 있는 ‘충무공(忠武公)’들과 관련된 유적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충무공들’이라 함은 시호(諡號)를 ‘충무(忠武)’로 받은 분들을 말한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이외에도 다른 충무공들이 있다.

 그때 찾아갔던 곳 중의 하나가 한양대 뒤 사근동에 있는 ‘남이(南怡) 장군 사당’이었다. 남이 장군 역시 시호가 충무공이기 때문이다. 당시 자료를 찾아본 결과 서울에는 충무공 남이 장군 사당이 용산과 이곳 사근동에 있었다. 그때 참고했던 자료는 『성동구지』(성동구청, 2005년)였다.

 “사근동 190번지의 11호, 즉 한양대학교 뒷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 당의 위쪽 언덕에는 ‘충무공남이장군지비(忠武公南怡將軍之碑)’라고 쓴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976년에 이 마을 쌍용회 회원 일동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사당을 세우게 된 데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차산에서 이곳까지 출몰하여 인명을 해치는 백호(白虎)를 잡기 위해 남이 장군이 이 사당 부근에서 기거하며 지키다가 호랑이가 나타나자 맨주먹으로 포살(捕殺)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그를 기려 이곳에 사당을 세운 것이 유래라고 한다. 세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79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 내부에는 전면에 남이 장군 화상이 있고 좌측과 우측에는 남이 장군 제자의 화상이 각각 1점씩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다. 현재의 화상은 1984년경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 이 마을은 남이 장군을 당에 모신 덕택에 6‧25전쟁 때에도 피해가 없었으며 당시에 전사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성동구지』)

 또한 “가로 1.5m, 세로 1m, 높이 0.7~1.8m 정도의 상석”으로 된 남이 장군 비석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 초에 갔을 때는 『성동구지』의 기록과 달리 사당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주소에는 성동구 도시관리공단이 관리하는 ‘사근동 공영주차장’이 있었다. 주위에 사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몇 분만이 사당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주민 한 분은 그 땅이 구청 소유가 아니라 민간인 소유 땅이라서 그렇게 되었다고도 했다.

 용산의 ‘남이 장군 사당’은 용문시장이 주관해 오랫동안 사당을 유지하고, 사당을 활용해 시장의 부흥과 지역 활성화를 시도하고 있다. 반면 성동구 사당은 『성동구지』 기록으로 보면 200여 년 이상 된 것이고, 마을 주민들에게도 도움을 준 사당임에도 사라졌다. 혹시나 해서 주차장에 비석이 있나 살펴보았으나 비석도 없었다. 비석이라도 남겨두었으면 어땠을까.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 탐방 때는 이제는 기록에만 남은 ‘사근동 남이 장군 사당’을 찾아가지 않았다. 필자처럼 불과 얼마 전의 기록을 믿고 갔다가 헛걸음 하지 않도록 이 탐방기로라도 한양대 뒤 성동구 사근동에 남이 장군 사당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는 사실을 성동구 2편에 남긴다.

 ‘남이 장군’ 역시 민속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또 시호도 ‘충무’이다. 용산의 남이 장군 사당에 대해서는 탐방기 ⑱편 「용산, 우리 땅이나 우리 땅이 아녔던 곳, 2편」에 언급했으니 참고하면 된다.

 지역과 관계없는 인물, 소설 속의 인물도 끌어들여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시대에 기존의 역사적 시설이나 콘텐츠를 잊게 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성동구와 사근동 지역의 역사성과 전통을 살리는 의미에서 새로이 적극적으로 복원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전관원 터 표석 (행당중학교 정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전관원 터 표석 (행당중학교 정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표석만 남은 전관원, 재개발로 이사간 아기씨당

 한양대에 있는 ‘마조단 터’에서 내려와 2호선 한양대역 2번 출구 안으로 들어가 4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앞에 행당중학교 정문이 있다. ‘전관원(箭串院)’이 있었던 곳이다. 그 정문 왼쪽 방음벽 아래를 보면 ‘전관원 터’ 표석이 있다. 10분 정도 걸린다.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따르면, 한성부(漢城府)에는 4개의 ‘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조선 시대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이다. 지금까지도 이름이 살아있는 ‘이태원(利泰院)’이 대표적이다. 중국 사신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다고 하는 ‘홍제원(洪濟院)’은 현재의 서대문구 ‘홍제동(弘濟洞)’의 유래이다. ‘홍제원(弘濟院)’으로 실록에 언급되기도 한다. 동대문 밖에는 ‘보제원(普濟院)’이 있었다. 또 지금 이곳의 ‘전관원’은 뚝섬 일대를 일컫는 ‘살곶이(箭串, 전곶 또는 전관), ‘살곶이다리(箭串橋, 전곶교 또는 전관교)’와 관련된 이름이다.

 이태원에 대해서는 용산 남이 장군 사당과 같이 ⑱편 「용산, 우리 땅이나 우리 땅이 아녔던 곳, 2편」에서 소개했었다.

 전관원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많지 않다. 홍제원·보제원·이태원이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으나 전관원은 그 뒤에 만들어져 그런 듯하다.

 실록을 기준으로 보면, 홍제원은 『정종실록』 정종 1년(1399년) 1월 2일, 보제원은 『세종실록』 세종 3년(1421년) 10월 11일에 처음 언급된다. 이태원은 『세종실록』 세종 8년(1426년) 5월 15일에서 ‘이태원(利太院)’으로 처음 언급된다. 한자가 다른 ‘利泰院(이태원)’도 나오기도 한다.

아기씨당 터 (재개발 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기씨당 터 (재개발 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전관원 터’에서 ‘행당동 아기씨당집’으로 간다. 20분 정도 걸린다. 『성동구지』(1142쪽)의 ‘행당동 아기씨당굿’ 설명에 따르면, 북쪽에 있던 어떤 나라가 망한 뒤 다섯 공주가 남쪽 지역으로 피난 내려와 왕십리에 정착해 풀뿌리로 연명했다. 어느 해 배가 너무 고파 찔레꽃을 따 먹다가 꽃을 입에 물고 죽었다. 그 뒤 마을 사람 꿈에 나타나 자신들의 한을 풀어달라고 했으나 사람들이 무시하자 재앙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왕십리 기차 정거장 자리에 사당을 짓고 제사와 굿을 하면서 재앙이 없어졌고 소원이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전설을 바탕으로 한 ‘행당동 아기씨당굿’은 2005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공주들이 먹다가 죽었다는 찔레꽃은 순백이나 분홍색 꽃이다.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고 아담한 꽃이다. 순백의 꽃잎은 은은함을 좋아하는 우리 정서와도 잘 맞다. 찔레 순은 옛날에는 간식으로 많이 먹었고, 작고 앙증맞은 빨간 열매는 여성들의 생리통 등에 효험이 있으며, 뿌리 역시 여성들의 질병에 좋은 약재였다. 주변에 흔히 있어서 그런지 관련 대중가요도 많다.

 「찔네꽃」(백난아 노래,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찔레꽃 아가씨」(김지성 노래, 김유신 작사, 박춘석 작곡)‧「찔레꽃 첫사랑」(최주호 노래·작사·작곡)‧「찔레꽃 피던 날」(최병구 노래, 손독운 작사, 서영은 작곡)‧「찔레꽃 피면」(양희은 노래, 하덕규 작사·작곡)‧「찔레꽃 사랑」(최숙자 노래, 김호궁 작사, 김부해 작곡), 그리고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장사익의 「찔레꽃」(장사익 작사·작곡) 등이 있다. 1957년에는 신경균 감독이 만든 「찔레꽃」이란 영화도 있었다. 장사익의 「찔레꽃」을 들으면 아기씨당의 공주들이 떠오른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
​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장사익, 「찔레꽃」) 

 현재 성동구의 꽃은 개나리이나, 개나리와 별도로 행당동을 중심으로 아기씨당-공주-찔레꽃을 연결해 도시 이미지 메이킹을 해도 좋을 듯하다.

 ‘아기씨당’에 대해서는 『성동구지』와 『성동구의 지명유래』(최래옥·강현모, 성동문화원, 2003) 등을 보면, 민속과 동명 유래 부분의 설명에서 차이가 있다. 문헌 기록보다 구전 기록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성동구청 홈페이지에 따르면, ‘아기씨당’은 성동구 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 ‘아기씨당’이 탐방 갔을 때는 없었다. 그 지역 일대가 재개발로 기존의 모든 건물이 철거되는 상황이었다. 인근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재개발 이후 ‘아기씨당’을 새로 건축해 주기로 약속받고 임시 이전된 상태라고 한다. 재개발 이후 어떤 모습이 될지는 몰라도 과거의 그 모습은 아닐 듯하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다. 거개가 다 똑 같다. 옛날 기와 집 형태이다. 생각을 바꿔 초현대식으로 짓는다면 이 역시 또 하나의 명물이 될 듯하다.

 성동구에서는 ‘남이 장군 사당’이 없어졌듯 뭔가가 자꾸 사라진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분명히 있으나, 그를 대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김소월 흉상과 왕십리 시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소월 흉상과 왕십리 시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사라진 ‘아기씨당’을 뒤로 하고 왕십리역으로 간다. 10분 정도면 된다. 왕십리역에는 김소월 흉상과 시비 등이 있다. 왕십리역은 지하철 2호선과 5호선, 수인분당선을 모두 탈 수 있는 환승역이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복잡하기도 하다. 출구도 14개나 된다.

 몇 개의 출구에는 왕십리만의 특별한 조형물들이 있다. 4‧5번 출구 횡단보도 건너 맞은 편 작은 공원 안에는 시인 김소월의 흉상과 시비, 벽파 이창배 선생 동상이 있다.

 5번 출구 앞 왕십리 광장에서는 ‘왕십리 사랑의 시계탑’과 ‘성동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2번 출구 앞에는 왕십리 문화공원이 있고, 그곳에 ‘고산자 김정호 동상’이 있다. 김정호 선생 동상 때문인지 이 일대를 ‘왕십리 여행자의 거리’라고 부른다.

 왕십리역 주변의 조형물들은 앞에서 보았던 사라진 공간과 대비된다. 멀쩡히 있었던 것은 사라지고, 관련이 얼마나 있는지 모를 의아한 조형물들이 대체되고 있는 왕십리역이다. 다음은 김소월의 「왕십리(往十里)」이다. 김소월의 정서가 물씬 난다. 비는 계속 오고 갈 길은 멀다. 울고 싶지않는데 벌새가 울어 울음을 자극한다. 비와 눈물이 섞여 내린다. 소월이 어디를 가는 것일까. 소월은 무엇 때문에 울음에 가득 찼을까.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닷새 왓스면 좃치.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로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햇지.
  가도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새야
  울나거든
  왕십리(往十里)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운다.

  천안(天安)에 삼(三)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저저서 느러젓다데.
  비가와도 한닷새 왓스면 좃치.
  구름도 산(山)마루에 걸녀서 운다.”(김소월, 『신천지』, 1923년 8월)

 「시 읽기 교육에서 해석소통의 양상과 실천 방향 연구」(유진현, 『국어교육』, No.163, 2018년)에 따르면, 「왕십리」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해석 논란이 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다른 몇 편의 논문을 살펴봐도 같다.

 즉 일부 학자는 김소월의 시 「왕십리」가 ‘가도 가도 십 리를 더 가야만 하는 고된 길’이란 뜻을 가진 보통명사처럼 보았고, 다른 일부 학자는 조선 시대 풍수설과 관련해 언제나 등장하는 무학대사를 주인공으로 서울 궁궐 비정과 관련한 ‘지명(地名) 왕십리’라는 고유명사로 보고 있다.

 김소월이 어떤 의도를 갖고 ‘왕십리’를 썼는지는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김소월의 삶을 조사해 보면, 왕십리에 살았던 적이 있는지, 왕십리에 오간 적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심지어 김소월은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시를 썼음에도 그가 어디에 살았는지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소월의 「왕십리」가 논란이 되는 듯하다. 그에게 「왕십리」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듯 같은 듯한 왕‘심’리와 왕‘십’리

 학자들의 논의와 관계없이 사람들은 김소월의 「왕십리」를 이미 ‘지명 왕십리’로 본다. 거기에는 무학대사의 풍수 전설 영향도 있는 듯하다. 무학대사의 왕십리 이야기는 『한경지략』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다만 지금의 ‘왕십리’가 아니라 ‘왕심리’로 되어 있다.

 “왕심리(枉尋里)는 흥인문(동대문) 밖 10리에 있다. 세상에서 부르길 ‘무학이 와서 서울 땅(京都地)을 살펴보았는데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기에 그 땅을 이름을 ’왕심리‘라고 했다’고 전한다.”

 『한경지략』에는 간단히 나오나, 시중에 떠도는 전설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무학대사가 서울 궁궐터를 정하려 돌아다니다 이곳에 와서 보고는 궁궐터에 좋다고 여겼는데, 밭을 갈던 어느 노인이 무학대사 들으라는 듯 밭 갈던 소를 무학이라고 부르면서 십 리만 더 가면 진짜 제대로 된 궁궐터가 있다고 나무랐다는 이야기다. 그 말을 듣고 무학대사가 10리를 더 가서 한양 도성을 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 리를 더 간다’는 뜻의 ‘왕십리(往十里)’가 되었다는 것이다.

 진짜 무학대사 때문에 ‘왕십리’가 되었을까? 조선 후기에 저술된 『한경지략』에서도 무학대사를 언급하나 한자를 유심히 보면, ‘왕십리(往十里)’가 아니라 ‘왕심리(枉尋里)’이다. 오히려 ‘땅을 잘못 찾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기준점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왕십리(往十里)’가 아니다.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옛 문헌과 실록 등에서는 어떨까. ‘왕십리’의 지명을 살펴보면, ‘왕심리’가 ‘왕십리’보다 먼저 있었다. 고려 때 목은 이색은 “남경(南京) 동촌(東村) 왕심(旺心)”이라고 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초기에는 ‘왕심’이라고 했다. 물론 ‘왕심’의 한자는 ‘往尋·徃心·旺心·枉尋’처럼 차이가 있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왕십리(往十里)’는 실록에서는 『선조실록』(선조 34년 1601년, 1월 4일)에서 처음 등장한다. 선조 시대 이후의 문헌들에서는 ‘왕십리’가 주로 나온다. 즉 그 이전에는 ‘왕심’이 일반적인 명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왕심’이라는 지역이 ‘왕심리’가 되면서 발음 그대로 ‘왕십리’로 변한 듯하다. 무학대사의 궁궐지 선정과 관련된 전설은 고려 때 존재한 ‘왕심’이라는 명칭에서 볼 때 사실이라기 보다 전설인 듯하다. 또 이 지역이 이른바 조선 시대 도성(都城) 밖 10리(里) 이내 지역을 서울에 편입시켜 한성부에서 관리하는 지역, 즉 성저십리(城底十里) 경계지점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왕십리는 동대문에서 성 밖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왕십리역에 김소월 흉상과 「왕십리」 시비(詩碑)를 세운들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김소월의 시가 한 번 더 사람들의 가슴에 퍼져 감동을 준다면 더 좋은 일이다. 김소월의 ‘왕십리’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왕십리’일까.

벽파 이창배 선생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벽파 이창배 선생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월 동상 옆에는 벽파(碧波) 이창배(李昌培, 1916~1983)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창배 선생은 성동구 출신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였다. 국악과 관련한 『한국가창대계(韓國歌唱大系)』·『가요집성(歌謠集成)』·『증보가요집성(增補歌謠集成)』을 저술했다.

 「선소리 산타령」은 서울‧경기‧황해도 지방에서 불리는 잡가 중에서 서서 소리를 하는 소리 중 대표 노래이다. 국악은 백지나 다름없다. 자료를 살펴도 이해하기는커녕 읽기조차 어렵다. 한국말인데도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창배 선생 동상 옆 안내판의 글도 역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필자만 그런 것이 아닐 듯하다. 지금이야 ‘이날치밴드’ 같은 예술가들이 있어 그나마 한 구절은 이해할 수 있을지라도 국악은 여전히 우리 일상에서 멀리 있다.

 동상 옆에 직접 이창배 선생의 소리나 관련된 소리를 실제로 들어볼 수 있도록 했으면 더 좋을 듯하다. 김소월 흉상 옆에는 김소월 시를 들을 수 있게 하고, 이창배 선생 동상 옆에는 이창배 선생의 국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 시민들이 조금 더 가까이 김소월과 이창배 선생을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을 듯하다.

왕십리 사랑의 시계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왕십리 사랑의 시계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녀상(왕십리역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녀상(왕십리역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녀상, 뜬금없는 고산자 김정호 동상, 김동인 옛 집

 5번 출구 앞 왕십리 광장에서는 ‘왕십리 사랑의 시계탑’과 ‘성동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2번 출구 앞에는 왕십리 문화공원이 있고, 이 일대를 ‘왕십리 여행자의 거리’라고 부른다. 그곳에 ‘고산자 김정호 동상’이 있다.

 ‘사랑의 시계탑’은 나름 사연이 있다. 성동구 주민이 기증한 시계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녀상’을 꼭 이곳에도 설치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소녀상’을 보게 된다. 물론 ‘소녀상’ 마다 자세나 지향하는 의미 등에서 차이는 있다. 고귀한 의미가 실린 ‘소녀상’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남발되는 느낌이다.

 아픈 과거를 잊자는 것이 아니다. 판박이처럼 여기저기 세워지는 소녀상이 오히려 그 의미를 퇴색시키는 듯하다. ‘소녀상’에서 상업주의와 포퓰리즘 냄새가 풍긴다고 한다면 비판하겠지만, ‘소녀상’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어딜 가나 보이는 소녀상 그 하나가 꼭 왕십리역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차라리 성동구 출신, 성동구 거주 독립투사나 의인(義人) 동상을 세워놓았으면 어떨까. 그런 과정에서 오히려 잊혀진 우리 독립투사나 의인을 재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앉은뱅이 혁명가 겸 유학자 독립운동가 심산 김성숙(金星淑, 1898~1969) 선생은 해방 후 성동구 구의동에서 말련을 병마와 싸우며 지냈다고 한다. 또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 1888~1957) 장군도 제헌의회 선거에서 성동구를 지역구로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고,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성동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런 분들도 있는데 성동구는 잊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고산자 김정호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2번 출구 앞에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제작자 겸 지리학자였던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생몰연도는 모두 추정임) 선생의 동상이 있다. 왕십리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 뜬금없는 일이기는 하나 여기저기 있는 소녀상 보다는 의미 있는 일인 듯하다. 또 무학대사의 전설, 현재 왕십리의 교통환경으로 본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 경우는 없는 맥락과 콘텐츠를 만든 사례이다. 그런들 어떻겠는가. 김정호 선생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면 왕십리 김정호 동상은 오히려 소중하다. 다만 김정호 선생에 대한 소개 정보가 부실하다. 이왕이면 조금 더 선생 업적을 자세히 알리는 안내판과 홍보물도 비치해 놓으면 어떨까.

 선생은 지도인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를 제작했고, 지리지인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저술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다 “합해도 A4 용지 한 장 안팎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양”이라고 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도 불분명하다. 출생지는 황해도 토산이라는 주장이 있고, 서울 거주지는 서울 남대문 밖 만리재와 약현, 서대문 밖 공덕리 등의 주장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양반이 아니라 “평민의 장인 출신”으로 추정한다. 그런 까닭에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김정호 부녀 옥사설’ 등 같은 신화도 많이 생겨났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모두 잘못된 것이거나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선생과 딸이 만든 우리나라 지도로 인해 우리나라 지형 등의 비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한 흥선대원군이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감옥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것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신병주 건국대교수는 「김정호의 열정과 『대동여지도』의 탄생」(신병주, 『선비문화』, Vol.30, 남명학연구원, 2016년)에서 “옥사설의 진원지가 일제 조작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김정호와 같은 위대한 지도학자를 탄압한 조선 정부의 무능과 함께 김정호가 쇄국정책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옥사설이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김동인 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설가 김동인 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소설가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의 옛 집이다. 30여 분 걸린다.

 ‘김동인 문학비’와 흉상은 ‘어린이 대공원’에 있다. 집터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서울문학기행』(장태동, 미래M&B, 2001년)에 따르면, 해방 후 미군에게 집을 빼앗긴 뒤 이곳으로 이사와서 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층 기와집이었으나 뒤에 3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21년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효시인 『배따라기』를 발표했고, 이후 『감자』‧『발가락이 닮았다』 등을 발표했다. 장편소설 『을지문덕』을 연재하기도 했다. 친일 활동에 적극적이었음에도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10년)에 따르면, 1942년 ‘천황불경죄’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초기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했으나 뒤에는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 활동이 자세히 나온다.

 문학계에서 저명한 상인 ‘동인문학상’은 그의 문학을 기리는 상이다. 1955년 『사상계』가 처음 제정‧시상했다가 현재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집터에 그가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무언가를 세운다면 지금처럼 극단의 시대에는 많은 논란이 일어날 듯하다. 또 그렇기에 논란을 자초하는 그런 표석을 바라지 않을 사람들도 많을 듯하다.

 문학을 하는 것, 글을 쓰는 것, 글쓴이의 삶이 일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매번 느끼지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線)은 있는 듯하다. 그 선이 어디인지가 문제이나 분명한 것은 선이 있다는 사실이다. 수위를 정하는 선 역시 그 자신의 몫이고 책임도 그의 몫이다.

 글을 쓰면서 누군가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보여주고 하루하루에 에너지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글을 쓰는 것은 어찌 보면 글쓴이에게 스스로 가장 큰 지옥,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만드는 일인 듯하다.

 김동인과 최남선 등을 보면 글쓰기가 무섭다. 아니 삶이 무섭다. ‘삶 때문’이라는 핑계로 끊임없이 유혹당하고, 좌절하고, 스스로 거짓의 가면을 쓰고 변절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을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또 ‘삶’을, ‘세상’을, ‘다른 이’를 탓하지 않더라도 쥐꼬리만한 지식과 경험으로 삶과 세상에 대해 아는 척 쓴 글은 쓰고 난 뒤 돌아보면 책임지기가 너무 어렵다. 수많은 지옥이 있겠지만 글지옥이 가장 무서운 듯하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스스로 쓴 글인 듯하다.
 

* 마조단 터 : 성동구 사근동 17.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 앞 오른쪽 화단
* 전관원 터 : 성동구 행당동 66-3. 행당중학교 정문 왼쪽
* 남이장군 사당 : 성동구 사근동 190-2. 현재는 없어졌고 주차장이 되어 있음
* 아기씨당집 : 성동구 행당동 128-901. 현재는 재개발로 없어짐. 재개발 완료시 새로 지을 예정
* 왕십리역 4·5번 출구 횡단보도 건너편 : 김소월 흉상, 소월 시비, 이창배 동상
* 왕십리역 2번 출구 : 왕십리문화공원, 김정호 동상
* 왕십리역 5번 출구 : 왕십리광장, 소녀상 등
* 김동인 옛집 : 성동구 홍익동 353.

박종평 객원기자 mythda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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