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된 투사회보 제작 과정 [사진=김혜진 기자]](/news/photo/202105/451620_368909_2249.jpg)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들불야학 교사와 청년 운동가 등은 직접 항쟁 참상을 알리고 시민 참여를 독려하고자 민중신문 ‘투사회보’를 제작했다. 18일 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당시 투사회보 필경(筆耕) 작업을 맡았던 故 박용준 열사의 글꼴이 앞으로 시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광주YWCA와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사)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는 지난달 11일 “5·18 당시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한 박 열사의 희생정신과 투사회보의 역사성을 기리기 위해 ‘박용준 투사회보체 글꼴’을 제작한다”고 밝혔다. 시민 모금을 통해 제작되는 디지털 글꼴(컴퓨터용)은 투사회보 첫 발행일이었던 오는 21일 무료 배포될 예정이다.
18일 41주년 5·18기념식인 ‘우리들의 오월’에서는 투사회보를 제작해 광주의 참상과 시민들의 항쟁 참여 확산을 널리 알린 박용준 열사의 삶이 조명됐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불야학 교사들이 항쟁 참상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고자 만든 민중신문 ‘투사회보’. 투사회보는 박용준 열사가 직접 등사지에 쓴 것으로 최근 디지털 글꼴 제작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사진=지역공공정책플랫폼 광주로 제공]](/news/photo/202105/451620_368908_2127.png)
손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했던 박 열사는 1980년 5월21일 투사회보가 제작될 때 윤상원 열사가 쓴 초안을 등사지에 옮겨 적거나 시민들이 알아야 할 홍보사항, 행동강령 등의 내용을 담아 16절지 양면으로 7000∼8000부 발행했다. 그는 1980년 5월27일 광주 YWCA에서 계엄군 총격에 숨지기 전까지 투사회보를 9차례 발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1980년 당시 박 열사는 25세로 광주 YWCA 신용협동조합 직원이었다. 고아였지만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시민아파트 환경 개선 운동, 어린이 주말학교 등 시민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들불야학에선 불우한 시민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며 광주 도심 곳곳에 진출한 계엄군이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무자비한 진압을 일삼는 동안 금남로 일대 YWCA회관을 오가던 그는 격분했다. 이에 들불야학당 출신 인사들과 함께 언론을 대신해 투사회보를 제작했다.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된 당시 투사회보 제작 과정 [사진=김혜진 기자]](/news/photo/202105/451620_368910_2347.jpg)
김혜진 기자 trust@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