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구 관광안내지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news/photo/202105/450919_368151_516.jpg)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북한산 아래 우이동 솔밭근린공원에 있는 시비(詩碑)에 새겨진 시다. 병자호란 때 주전론(主戰論)을 펼쳤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이 1639년 청나라에 압송되어 갈 때 우리나라를 떠나며 지은 시이다. 이 시 속의 ‘삼각산’은 지금의 북한산이다. 금강산·지리산·묘향산·백두산과 함께 우리나라 오악(五嶽)의 하나로 꼽히는 명산이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가 큰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근현대사기념관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news/photo/202105/450919_368153_744.jpg)
홀로 가되 외롭지 않은 독립운동가 묘역 길
북한산은 ‘한산(漢山, 서울)의 북쪽에 있는 산’에서 유래했다. 숙종 때 이곳에 산성을 만들면서 한강 남쪽의 ‘남한산성(南漢山城)’과 대비해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고 이름했고, 그로부터 삼각산 대신 북한산이라는 명칭이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비봉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진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를 비롯해 많은 유적과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이 있다.
산이 아름답고, 많은 계곡이 있어 등산객과 휴식하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탐방 중 일부 산길은 각각의 코스를 따라 산에 오르는 사람들로 마치 유명 스타의 공연장을 들어가기 위해 빽빽이 줄 선 것처럼 붐볐고, 만원지하철을 기다리는 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번 탐방은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나 계곡, 혹은 사철, 산성, 명승사적이 아니다. 북한산 기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묘소 돌아보기이다. 이 코스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정상에 올라야 뭔가를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분들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없을 듯하다.
등산객 줄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의 묘역으로 가는 길은 그들의 뜨겁고 처절했던 삶과 정반대로 가장 여유롭고, 풍요로운 북한산의 정수를 보고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어느 묘역에 가든 일부러 찾아와 참배하는 분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화창한 봄날이든 단풍든 가을 산이든, 혹은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산이든 붐비지 않되 외롭지도 않는 산길을 걷고 싶다면, 북한산 자락 독립운동가 묘역을 찾아가면 된다.
산책으로 몸을 단단하게, 사람에 지친 마음, 상처 난 마음, 가슴 저 밑바닥에 응어리진 마음을 뱉어내며, 자연에 몸을 맡기고, 역사를 숨 쉬며, 그들의 삶을 통해 나와 우리의 부끄럽지 새로운 하루를 만들 기회이다.
![최남선 옛 집 '소원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news/photo/202105/450919_368154_835.jpg)
친일 상처를 잊기 위해 매각된 최남선 옛집 터
출발지는 지하철 우이신설선 ‘북한산 우이역’이다. 주말에는 북한산으로 향하는 등산객들로 붐빈다. 독립운동가 묘역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찾아갈 곳이 있다. 이번 1편 답사기는 젊어서는 독립운동을, 만년에는 변절해 친일에 앞장섰던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1941부터 1952년까지 살았던 만년 시기의 옛집 터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일관된 삶과 최남선을 비교하며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그의 옛 집터가 독립운동가 묘역과는 그리 멀지도 않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이 나가는 2번 출구가 아니라 1번 출구 우이공원유원지 방향으로 나간다. 나가자마자 ‘북한산 둘레길(왕실묘역길,방학동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우이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이 길 역시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로 붐빈다.
횡단보도 맞은 편에 수유2파출소 우이치안센터, 금천옥설렁탕이 보인다. 그 옆 ‘두온리치빌아파트’가 최남선이 살았던 집터이다.
!['최남선 옛 집터' 옆에 있는 '소원' 바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news/photo/202105/450919_368155_92.jpg)
아파트 오른쪽 끝에 ‘소원(素園) 터’ 표석과 ‘소원 바위’가 각기 있다. ‘소원 터’ 표석에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여 우리 근대 국문학을 개척한 육당(六堂) 최남선 선생이 문학활동을 하였던 터”라고 새겨져 있다. 그 옆 소나무 사이에는 ‘素園’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 하나가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소원은 1928년 건립된 고택의 명칭으로 육당 최남선 선생이 집필활동에 전념했던 곳이다” 등이라고 나온다. ‘소원’ 바위는 고택에 있던 바위라고 한다.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유적분포지도 – 서울특별시(강북편)』(서울시, 2006년)에 인용된 『강북구의 역사와 문화유적』(서울학연구소, 1997년)에 따르면, ‘소원’은 1939년에 건립되었고, “1941~1952년에 거주하면서 강연과 신문논설로 대동아전쟁 참전을 독려했던 장소”라고 한다. 또한 “2003년에 원형이 훼손되어 보존 가치 없어 문화재 지정 제외되었고, 후손들이 ‘건물이 남아있으면 친일이라는 아버지 상처가 덧나는 것 같다’며 집터를 매각했다”고 한다. 매각된 그 자리에 아파트가 세워졌다.
최남선은 당시 최고의 장서가였다. 『서울문학기행』(장태동, 미래M&B, 2001년)에 따르면, 그가 이곳 ‘소원’으로 이사할 때 트럭 7대에 17만 권의 책을 실어 왔다고 한다. 장태동은 최남선이 1941년 또는 1944년부터 6·25 직전까지 살았으며, 전쟁 중에 불탔다고 한다. 수많은 책, 유일본(有一本)도 많이 소장했던 그의 집이 불타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 기록 일부도 바뀌었을 듯하다. 외세의 침략만이 아니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우리 역사는 불탔다.
이곳에 살 때의 최남선은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쓰고 감옥에 갇혔던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그 뒤로 10여 년이 지나며 변절하기 시작했으나, 이곳에서 그는 우리 민족을 침략전쟁에 내몰았던 최고의 친일파로 살았다.
193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일제강점기 최악의 암흑시대는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을 역사의 죄인으로 변질시켰다. 그래도 최남선만큼은 선을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민족 문화에 큰 획을 그었던 최남선, 「독립선언서」를 썼던 최남선이었기에 더욱더 그렇다. 근대 우리 민족 문화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 선각자가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대며 자신을 속이고, 민족을 배반했다. 그는 우리 민족의 부활을 꿈꾸며 알리려 했던 선구자에서 우리 역사에 치욕스러운 이름을 새긴 지식기술자로 전락했다.
![동아일보 1961년 12월 28일 최남선 유고 관련 기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news/photo/202105/450919_368157_957.jpg)
일본에서 조선의 혼을 지키려 했던 청년 최남선
구한말부터 인재들은 새로운 문물을 배워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본과 서구로 유학 갔다. 특히 조금 더 먼저 근대화된 일본은 서양의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 유학생들은 유학한 일본에서부터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고, 귀국한 뒤에 독립운동가의 삶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조국과 민족을 외면하고 입신출세만을 위한 친일엘리트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 일본 유학생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일본에 보내진 유길준(兪吉濬, 1856~1914), 윤치호(尹致昊, 1865~1945) 등이다. 그 뒤 본격적인 일본 유학은 1895년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주도해 국비유학생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최남선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1904년 11월, 대한제국 황실 파견 유학생 일원으로 간 것이 첫 번째이다. 50명 중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은 최남선과 최린(崔麟, 1878~1958)과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이다.
일본 유학 이후 최린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3년 동안 감옥에 갇힐 정도로 적극적이었으나, 1933년 이후 이미 친일의 길에 선 최남선처럼 친일파로 변절했다. 조소앙 만이 끝까지 초심을 지켜 변함없이 독립운동을 했다. 이 유학에서 최남선은 부친의 병환으로 두 달을 다니지 못하고 돌아왔다.
1906년 4월, 2차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했으나 이름해 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학생들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일본 귀족이 되고자 일왕에게 청원한다는 내용의 모의국회를 열자 이에 항의하다가 자퇴했다. 다른 조선 학생들은 학교의 사죄에 따라 복교했으나, 최남선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 뒤 일본에 머물며 일본의 출판문화를 관찰하고 일본에서 출판된 서구의 서적을 통해 서구 학문을 학습했다.
최남선은 새로운 대한(大韓)을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국민정신 운동을 하기 위해 가장 관심이 있었던 출판·인쇄 문화를 주목했고, 역사와 지리 서적을 모았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일본의 인쇄소에서 활판인쇄 기계를 구입해 1908년 인쇄소 겸 출판사인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했다.
신문관에서 잡지 『소년』을 창간해 새로운 나라의 일꾼이 될 소년들을 계몽했다. 『소년』 창간호에 자신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게재했다. 『이솝 우화』·『걸리버 여행기』 등과 같은 서양 서적을 번역해 싣기도 했다.
동경삼재(東京三才), 최남선·이광수·홍명희의 다른 삶
2차 유학 시기에 그는 이광수(李光秀, 1892~1950)와 홍명희(洪命熹, 1888~?)를 만났다. 이들을 ‘동경삼재(東京三才)’ 즉 동경에 있는 조선의 3대 천재라고 한다. 청년이었던 그들은 동경에서 함께 고민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또 돌아온 뒤로도 10여 년 동안 그들 자신의 방법에 따라 독립운동을 했으나, 홍명희를 제외하고 최남선과 이광수는 자신들의 초심과 신념을 바꾸었다.
변절한 이광수는 1922년 「민족개조론」 등을 발표하면서 친일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일제말에는 ‘가야미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했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후손도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이름으로도 천황 신민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야미 미쓰로’가 조금 더 천황 신민답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광수, 「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년 2월20일)
이광수의 창씨개명 이유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창씨개명을 했고, 그의 가족들 모두 창씨개명을 했으며, 집안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광수같은 지식인의 창씨개명은 평범한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이후 내내 친일을 했던 그는 해방된 뒤인 1949년 2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었다.
최남선은 일본에서 돌아온 뒤 다양한 민족운동을 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에는 기획부터 참여했고, 유학 동기였던 최린의 요청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3·1운동 33인의 민족대표에는 들어가 있지 않으나, 최남선의 공로는 민족대표 33인 그 이상이다. 그 때문에 2년 8개월의 감옥생활도 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1928년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면서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한번 변절하기 시작하자 멈추지 못했다. 게다가 자기합리화를 위한 논리로 그의 무기였던 역사 지식을 활용했다.
그의 변절을 지켜본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기미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자가 도리어 일본에 붙은 역적이 되다니 만 번 죽여도 지은 죄가 남을 것이다.”
1943년 말에는 이광수 등과 함께 일본에 가서 조선인 학생들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학병 참여를 적극 선동했다.
“작은 한 몸을 가지고 천황 폐하의 방패가 되고 세계 재건의 기초가 되고 …… 그 절호한 기회가 대동아 전장에 그 특별지원병으로서의 용맹한 출진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을 나는 통감하는 바이다. ……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바로 하여 부여된 광영의 이 기회에 분발 용약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최남선, 「나가자! 청년 학도여」, 『매일신보』, 1943년 11월 20일. 『최남선 평전』(류시헌, 한겨레출판, 2011년)에서 재인용)
해방된 뒤 최남선도 이광수와 같은 날,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가 탄압당하면서 3월에 풀려났다.
‘동경삼재’ 중 최남선과 이광수의 변절과 달리 소설 『임꺽정』을 쓴 홍명희는 변절하지 않았으나, 6·25 직전에 월북했다.
최남선의 삶에 대해서는 『최남선 평전』을 참고하면 된다. 저자 류시헌은 최남선에 대해 “우리 근대와 민족주의가 담긴 판도라의 상자”로 표현했다. 최남선의 삶에는 중심을 잃은 지식인, 역사의 긴 흐름을 잊고 짧은 생에 갇힌 지식인의 모습이 있다.
독도는 우리 땅! 최남선 독도를 말하다
1948년 6월 8일, 미국 공군 폭격기 9대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 사격을 했다. 독도를 미군이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폭격 등으로 당시 조업 중이던 어선이 침몰하고, 16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미국 공군기에 의해 폭격사건이 일어났다. 미군의 독도 폭격 사건은 지금까지도 사건의 전말이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강력한 우방이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건 직후인 8월 5일, 상해임시정부 요인 출신 독립운동가 조성환(曺成煥, 1875~1948) 선생이 이끄는 우국노인회(憂國老人會, Patriotic Old Men’s Association)에서는 일본에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문서 하나를 보냈다.
![조·일간 국토조정에 관한 요망서 (최남선 친필 원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news/photo/202105/450919_368159_1042.jpg)
![조·일간 국토조정에 관한 요망서, Request for Arrangement of Lands Between Korea and Japan(우국노인회, 최남선 작성 문서 영역본, 출처 : www.oocities.orgmlovmopage30.html) [사진=박종평 객원기자]](/news/photo/202105/450919_368160_1155.jpg)
「조·일간 국토조정에 관한 요망서(Request for Arrangement of Lands Between Korea and Japan)」다.
『독도 1947』(정병준, 돌베개, 2010년)에 따르면, 우국노인회는 1946년 2월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를 방문해 맥아더 장군에게 「한일합병조약문서 반환요구서」를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고, 맥아더는 우국노인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8월 15일 조약문서와 함께 일제가 약탈해 일본 국내성에 보관중이던 한국 국새 8개를 반환했다고 한다.
그런 활동을 했던 우국노인회가 이번에는 독도와 울릉도·대마도·파랑도가 우리나라 땅이기에 우리나라 영토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청원서를 다시 맥아더에게 보낸 것이다.
정병준 교수는 이 청원서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국노인회의 청원서는 1947년부터 본격화된 한국인들의 독도 인식과 대응, 파랑도·대마도 인식의 종합판이었다. 특히 우국노인회의 청원서는 1948년 정부 수립 이전 단계에서 작성된 문서 가운데 독도영유권의 역사적 근거를 가장 정확하게 다룬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 청원서는 1947년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일본 침략에 대응해 한국의 도서(독도·파랑도)를 수호하고 그에 대한 역공으로 대마도를 귀속시켜야 한다는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와 심성을 담고 있었다.”
이 문서의 작성자는 「맥아더 장군에게보낸 최남선씨의 유고」(『동아일보』, 1961년 12월 28일)에 따르면, 당시 최고의 석학이었던 최남선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맥아더에게 독도·대마도·울릉도·파랑도의 영유권을 달라고 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 섬들의 영유권이 논쟁 중이거나 일본령이라는 반증을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정확한 지리 정보와 지명을 제공하면서 실존하지 않는 파랑도를 우리땅으로 주장하면서 “이후 한국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했다는 것이다.
최남선의 판단 착오와 당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남선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제시했다. 해방된 조국에 참회를 하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또 어떤 경로로 우국노인회가 최남선에게 그런 문서 작성을 요청했는지도 알 수 없다.
최남선의 삶을 보면 ‘지식기술자’와 지사(志士)의 차이를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그의 후반생은 글 쓰는 사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 학자들에게 경각심을 준다. 또 글쓰기의 무서움, 말하기의 무서움을 새삼 더 깊이 알게 해 준다. 이 글 역시 부족한 지식에 갇혀 한쪽만 보고 쓴 글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또 ‘매문(賣文)’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매혼(賣魂)’만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2편부터는 최남선과 전혀 다른 ‘지사(志士)의 삶’을 살았던 횡단보도 건너편 북한산 기슭 아래 잠드신 독립운동가를 찾아간다.
* 두온리치벨리 아파트 : 강북구 우이동 5-5 (최남선 옛집 ‘소원’ 터)
박종평 객원기자 mythda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