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60년사 폭력으로 얼룩진 여의도 잔혹사
국회 60년사 폭력으로 얼룩진 여의도 잔혹사
  • 인상준 기자
  • 입력 2009-03-11 09:24
  • 승인 2009.03.11 09:24
  • 호수 776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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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경관, 해머, 소화기… 그 다음엔?

2월 임시국회가 마무리 되면서 국회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미디어법을 통과시키려는 한나라당과 이를 막기 위한 민주당 사이에서 폭력이 난무한 것이다. 의원들과 보좌진들이 한데 뒤엉켜 멱살잡이는 예사고 기물파손과 난동, 회의실 점거 등 폭력으로 얼룩진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국회 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지난 해 망치로 회의실 문을 부수고 안에서는 들어오지 못하게 소화기를 뿌리는 등 부끄러운 모습을 전 세계에 여과 없이 보여준 바 있다. 타협과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하는 국회. 국회 60년사에서 어떤 폭력사태가 있었는지 되돌아 봤다.

지난 3일, 임시국회가 끝이 났다. 심각한 민생고와 경제살리기 관련 법안들을 제쳐두고 쟁점법안에만 몰두한 임시국회였다. 결국 파행으로 인해 여야 의원들은 물론 당직자들까지 몸싸움과 폭력으로 마무리 됐다.

특히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 폭행당한 사건과 민주당 서갑원 의원 폭행은 이미 검찰에 고발 조치됐고 고강도 수사를 예고하고 있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도 “국회 폭력 사태가 이미 한계를 넘었다. 이제 엄정한 대처가 불가피한 상황”이라며“이에 따라 국회 폭력 사태를 뿌리 뽑기 위해 엄정한 법질서를 확립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국회 폭력 사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하루 속히 국회내에서 폭력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예전에는 몸싸움 정도에서 끝났던 여야의 대치상황이 이제 폭력사태로까지 번지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누구의 책임인지는 둘째 치더라도 문제는 민주주의의회의 전당인 국회에서 이런 폭력들이 난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자성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폭력역사는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가 국회야 영화 촬영장이야?

1958년 12월 24일 제1공화국. 크리스마스 이브날인 이날은 국회에서 한바탕 영화판이 벌어졌다.

집권당인 자유당은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과 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강력한 언론제한을 골자로 하는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농성중이던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기 위해 자유당은 300명의 무술경관들을 국회에 투입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년 여 앞으로 다가온 정·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야당과 언론의 활동을 규제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자유당이 신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상정하자 언론계와 야당, 법조계는 강력하게 비난하며 들고 일어섰다. 이에 자유당은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반공이란 이름으로 위협을 가했다.

특히 법사위에서는 야당의원들이 점심을 먹으로 간 사이 자유당 단독으로 개정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본회의에 회부했다.

이에 야당의원 80여명은 본회의장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고 자유당 소속 국회부의장은 경호권을 행사해 무술경관들을 ‘1일 경위’로 임명하고 투입하게 된 것이다. 무술경관들은 농성중인 야당의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며 진압했고 야당의원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당시 상황은 국회 의정자료집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의정자료집에 따르면 “경호권을 발동시켜 태평로 일대의 교통을 차단, 무술경관 300명으로 하여금 단상의 야당의원들을 축출하여 구내식당과 휴게실에 5시간동안 감금시켜 놓고 자유당 의원만으로 회의를 속개하여 통과시킴”이라고 기술돼 있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 ‘오물투척사건’

1966년 9월 22일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인해 대정부 질문을 하는 자리에서 당시 김두한 의원이 질문 도중 미리 준비한 오물통을 열고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수 명의 각료들을 향해 오물을 던졌던 사건이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재벌그룹인 삼성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 사카린을 밀수한 것이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폭로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언론계와 정치계,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고 밀수 사건에 관한 대정부 질문에서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 의원이 미리 준비한 오물을 뿌렸다. 당시 김 의원은 “이 오물은 국민들이 주는 사카린이다. 잘 나눠 먹어라”고 소리쳐 국민의 울분을 대신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김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했고 구속기소 됐다.


A의원실은 학생들의 표적?

13대 국회의원이었던 A의원은 5공화국의 원흉으로 손꼽히는 인사였다. 그래서 의원실에는 항상 학생들이 불법 기습시위를 벌이는 최고의 장소였다고.

모 보좌관에 따르면 “A의원실은 학생들의 불법시위 장소로 유명했다. 당시에는 지금의 KBS별관에 작은 의원회관이 있었다. A의원실도 거기에 있었는데 학생들의 불법 시위로 유리창이 깨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국회 경위들과 학생들의 몸싸움도 상당했다. 전두환 정권이후 5공화국 출신들에 대한 불법시위가 A의원을 타깃으로 매일같이 벌어졌다”고 회상했다.


날치기도 실패할 때가 있다?

1993년 12월 2일은 폭력 국회가 날치기를 막은 뜻 깊은(?) 날로 기억된다. 당시 집권 여당인 민자당은 예산안을 날치기하기 위해 미리부터 손을 쓰고 있었다. 당시 이만섭 국회의장은 YS의 날치기 지시를 반대했다고 한다.

정치권의 정통한 소식통은 “당시 YS가 이만섭 국회의장을 불러 기한내에 예산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국회의장은 YS에게 ‘야당 시절 그렇게 날치기를 반대했던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반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국회의장은 사회권을 황낙주 부의장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황 부의장은 민자당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본회의장에 입장했다.

당시만 해도 국회법이 달라 회의장 어디에서나 의장이 상정과 의결만 외치면 가결되는 시절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야당의원들은 일제히 황 부의장에게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이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고 야당 의원들은 황 부의장을 본회의장 밖으로 끌어내기에 이른다. 이것이 날치기 실패 사건이다. 이후 여야의 타협으로 인해 5일 뒤 예산안은 표결 처리됐다.


해머가 최초로 등장한 국회 529호실 사건

국회에서 어느 한쪽이 회의실을 점거하거나 할 때 등장하는 도구가 하나 있다. 바로 해머다. 이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 1998년 12월 국회 529호 안기부 분실 사건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529호 안기부 분실 사건은 안기부 출신인 B의원이 발단이었다. B의원이 529호실에서 안기부 직원이 상주하며 첩보활동을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원래 정보위원회 업무차원에서 직원이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정치사찰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잠겨 있는 529호실에 해머를 동원해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하지만 안에는 통상적인 업무관련 서류만 있을 뿐 어디에도 정치사찰이라고 할 만한 증거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2004년 3월 12일.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가 당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보좌관들은 무기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한 보좌관은 “탄핵 사유에 해당하지도 않았던 것을 다수당의 횡포로 인해 가결돼 많은 충격을 줬다. 열린우리당은 절대적으로 약세였다.

다수당 의원들과 국회의장은 질서유지권을 발동하고 단상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하나 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의원들이 부상을 당했고 이런 모습을 본 국민들도 분노했다”고 말했다. 단상을 차지하려는 여야의원들의 모습은 고스란히 TV를 통해 국민들에게 전해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의원은 “의원들끼리 서로 주먹다짐을 하고 몸싸움을 하는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수당의 횡포를 가만히 앉아서 볼 수는 없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 때문에 단상을 점거하고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결국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의 행태에 촛불로 맞섰고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시켰다.


타협과 토론의 정치 절실

한쪽에서 회의장을 점거하면 다른쪽에서는 이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저지선을 뚫기 위해 쇠파이프, 해머, 전기톱 등이 사용된다.

회의장 안쪽에서는 뚫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책상과 의자 등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만든다. 최근엔 새롭게 소화기까지 등장했다.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책상과 자신들의 몸을 쇠사슬로 묶는가 하면 집단 난투극을 방불케하는 모습들이 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정치에서 멀어지게 한다. 보좌관들도 폭력사태로 인해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고 한다.

한 보좌관은 “한번은 여야가 본회의장 앞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우리 쪽 당직자가 상대당 사람들에게 몰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뒤따라가 상대당 당직자를 밀어 넘어뜨린 적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후배였다. 얼마나 낯이 뜨거운지 그 이후론 그 후배를 보면 모른 체하고 지나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보좌관은 “여야가 대립할 때 당직자들과 함께 뒤엉키는 일이 종종 있다. 개중에는 평소 친한 사이거나 선후배, 동료들도 있다.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몸싸움을 한 다음 상황이 끝나고 다시 마주치는 일이 있을 땐 서로 외면하게 된다. 이럴 때가 가장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또한 “예전에는 대치상황에서도 언론사들이 있을 때는 가벼운 몸싸움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안보이게 상대편을 가해(?)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서로 이념과 당리당략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일에 종사하는 동료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것은 근절돼야 한다.

대화와 타협, 토론의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정치문화나 잘못된 관행을 바꿔야만 국회 폭력 사태를 근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도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사태에 대해 비난하고 나섰다.

바른사회시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국회의원들 스스로가 폭력의 가해자, 피해자가 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국민들은 절망하고 있다.

대체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모르는 국민들과 동떨어진 국회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비난했다. 학계에서도 “국회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선 무너진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며 국회의원들 개개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강조했다.

인상준 기자 sky0705in@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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