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통해 본 이명박 “발가락만 닮은 게 아니네…”
노무현 통해 본 이명박 “발가락만 닮은 게 아니네…”
  • 홍준철 기자
  • 입력 2009-02-24 09:23
  • 승인 2009.02.24 09:23
  • 호수 774
  • 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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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2월25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집권 2년차를 맞이해 청와대 및 조각을 개편하고 2기 국정운영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 앞에 놓인 국내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국제 금융위기 확산, 불확실한 대미 외교, 악화되는 남북관계, 불안한 국내 경기 등 풀어야 할 현안이 산적해 있다. 취임 1주년을 맞는 이 대통령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인사가 있다. 바로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돼 국민들의 90% 이상 지지로 대통령에 취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정치권에서는 두 인사의 성장과정, 정치 스타일, 승부사적 기질, 비주류 인생 등을 비교하면서 ‘노명박’(노무현+이명박)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삶과 정치 스타일이 비슷한 이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공과를 통해 대한민국을 성공으로 이끌길 바라는 마음으로 본지는 취임 1주년을 맞이해 두 대통령의 공통점을 비교분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성공할 수 있을까. 두 질문 모두 답변하기는 시기상조다. 그러나 진보 진영이 10년간 잡아온 권력을 노 전 대통령 집권시절 보수 정권에게 넘겨줬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보진영 인사들마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면서도 이 점에 대해서는 실패를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같은 평가를 받고 있는 대통령이 있다. 그것도 바로 취임 1주년을 맞는 이명박 대통령이 주인공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미워하면서 닮아가는’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며 같은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 근거 역시나 무척이나 구체적이고 세세하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두 대통령…출세 배경

첫 번째는 두 인사의 살아온 불우한 환경을 들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공식 홈페이지에 ‘까마귀가 먹을 게 없어 울고 돌아가는 봉하마을’로 자신의 고향을 표현하며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더하다. 이 대통령의 공식홈페이지에는 ‘어려운 가정환경탓에 김밥과 풀빵, 뻥튀기, 과일, 생선, 옷감을 팔며 고학으로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고 적고 있다. 이 대통령은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도 떨어지질 않았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두 인사의 불우한 어린시절은 오히려 약이됐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사시 17회에 합격해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부산민주화세력을 이끌었고 13대 통일민주당으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입문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3년에는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 15대 종로 재보궐선거 당선에 이어 2000년 대선출마선언, DJ 정부하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12월 대통령에 극적으로 당선됐다.

이 대통령 역시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정치적 이력은 화려하지 않았다. 가난한 청년시절을 보낸 그는 고대 경영학과를 졸업해 현대건설에 입사, 현대건설 사장, 회장을 거쳐 1992년 14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5대 신한국당으로 종로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선거법위반으로 의원직 사태, 잠시 도피성 유학생활을 보내다 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 2007년 대통령에 됐다.

두 번째로 갖는 두 인사의 공통점은 ‘자수성가형’으로 독선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한 인사는 “자수성가형 정치인 갖는 공통점은 DJ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독선과 고집의 정치다”면서 “노무현과 이명박 전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라고 지적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 역시 “두 인사 모두 고생을 많이 해 자수성가해 ‘코리안 드림’을 이뤘지만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선 독약이 되었고 독약이 될 공산이 높다”고 전망했다.

세 번째로 지목되는 공통점은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점이 꼽혔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 2년을 앞둔 2000년에 출마 선언을 했지만 실제로는 2001년 12월 공식출마선언을 하게 된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 사시 17회 동기 모임인 ‘8인회’가 민주당 경선을 앞두고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투표를 했는데 4:4가 나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면서 “대통령 출마 선언을 했지만 그때까지 친구들조차 의견이 갈릴 정도로 대통령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고 전했다.


3김 정치 염증 盧 출현, 노에 대한 반감 李 당선

이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한 이후 그는 김경준씨와 BBK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하고 동업을 했다. 이 대통령이 만약 대통령의 꿈이 있었다면 과연 검찰이 사기꾼으로 내몬 김씨와 동업할 생각이 있었을까. 정치권의 다수 관계자들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이 대통령의 대망론은 빨라도 2002년 6월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후부터 준비가 이뤄졌을 공산이 높다는 지적이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3김 정치’라는 구정치에 대한 염증이 이 전 대통령은 ‘노무현은 무조건 싫다’는 반노 정서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일조했다.

네 번째로 두 인사 모두 비주류 출신이라는 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운동권의 비주류였다. 부산에서 활동을 왕성하게 했지만 김근태, 이부영 전 의원 등 주류 운동권에 비하면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인사는 아니었다.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1990년 야3당합당에 반대 민주당에 잔류했고 1991년 신민당과 함께 통합민주당 창당에 주역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결국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통합추진위를 뛰쳐나와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부총재가 됐다.

DJ가 있는 국민회의는 박상천, 한화갑, 김옥두, 박지원 등 주류인 동교동계가 꽉잡고 있었다. 또한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등 3형제까지 가세해 노 전 대통령은 철저하게 ‘단독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주류 인생은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구민주계 인사를 제거하기위해 2004년 총선을 앞두고 47명을 데리고 뛰쳐나가 열린우리당을 창당, 구 민주계 인사들과 단절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비주류 의식은 여의도 정치 무시로 나타났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법사상 유례없는 고행을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노 전 대통령은 원로 정치인들보다 ‘코드’가 맞는 386정치인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며 ‘아마추어 정치’, ‘386 측근 정치’로 비판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전형적인 비주류 정치인이다. 민정당과 신한국당을 거쳐 한나라당으로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직을 역임했지만 당내에서는 ‘외톨이’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이회창 총재라는 거목이 존재해 이 대통령이 세력을 키울 기회조차 없었으며 2002년 노무현 후보에게 패해 정계를 은퇴 선언한 이 총재 빈자리는 박근혜 전 대표가 차지했다.

평소 ‘탈여의도 정치’를 넘어 여의도 정치를 무시하는 경향은 비주류 속성에서 기인됐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아울러 이명박 신당설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즉,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대통령이 레임덕 방지와 원만한 국정운영을 위해 독자 신당을 만들수 있다는게 요지다. 박 전 대표가 함께 있는 이상 이 대통령은 주류가 될 수 없다는 초조함은 이미 지난 2008년 총선 공천에서 ‘대폭 물갈이’로 나타났다.


탈여의도 정치, ‘노 탄핵’ MB는 ‘창당’?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를 국정의 동반자로 삼을 생각이 없는 것 역시 비주류라는 피해의식 때문이다”면서 “만약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노 전 대통령처럼 취임 2년 후 총선이 열렸으면 신당 창당을 분명히 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다섯 번째로 두 인사의 공통점은 노 전 대통령의 ‘지역구도 타파’, 이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집착이다.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라는 게 주변의 평가다. 이는 단순히 국가발전 차원에서 관철시켜야 할 과제라기보다 정권의 명운을 걸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부산, 울산, 경남도지사 3석에서 1석을 못건지면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깜짝 발언을 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투표율은 좋았지만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이후 민주당내 ‘후보 사퇴론’, ‘백지 신당론’이 나온 배경이 됐다. 또한 대통령 선거전 DJ와 YS 연대를 전제로 한 ‘신민주대연합론’을 주창했지만 무산됐다.

이미 국회의원 시절 종로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행을 택한 것이나 민주당 후보로 부산시장에 도전해 낙선하는 등 지역구도 타파를 직접 실천했던 그였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구민주계 한 인사는 임기초 대북 특검 역시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방편이라는 지적이다. 호남 기반의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지만 영남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대북특검을 통해 ‘호남 때리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7월 ‘대통령의 권력까지 내놓겠다’며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다. 이 역시 박 전 대표의 거절로 무산됐지만 노 전 대통령의 ‘지역구도 타파’에 대한 집착의 강도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장 청계천 복원효과를 톡톡히 누린 이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나 국민들 대다수가 반대하면서 대운하 추진에 차질을 빚었다. 급기야 청와대는 ‘대운하는 하지 않는다’고 물러섰다. 그러나 해당 정부부처와 청와대는 ‘한반도 대운하’ 명칭 대신 ‘4대강 살리기’로 바꾸고 추진중이다. 그동안 물류, 관광을 강조한 반면 이제는 ‘4대강 복원 사업’이라고 주장하며 환경단체와 맞서고 있다.

이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본 한 인사는 한반도 대운하 추진 관련 “이 대통령은 일을 해본 사람이 일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면서 “청계천 복원공사나 버스중앙차로가 그랬듯이 서울시민들의 처음에는 반대를 했지만 막상 만들어놓으면 국민들이 좋아할 것을 확신한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지역구도 타파, 대운하 ‘신앙이 되다’

이밖에도 노 전 대통령과 이 대통령의 공통점은 많다. ‘승부사적 기질’이나 ‘포퓰리즘 정치’, ‘말실수’, ‘측근 정치’ 등이 거론된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2004년 총선 직전 민주당과 분당한 이후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 후보가 된다”는 점은 대중정치의 정점이자 포퓰리즘 정치다. 이로인해 민주당까지 가세해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이 대통령 역시 대중정치, 포퓰리즘 정치에 능하다. 대표적인 것이 1주일에 한번씩 대국민을 상대로 한 ‘라디오 연설’이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이 386 운동권에 갇혀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고소영 S라인’에 갇혀 있다. 고대출신-소망교회-영남출신과 함께 서울시장 시절 함께 일을 해온 인사들을 일컫는 줄임말이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 근무한 민주당의 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이 국민의 높은 인기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한 것도 안 한것도 없는 ‘같기도 대통령’이 됐다”면서 “이 대통령의 집권 1년차는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앞으로 남은 4년이 다르기 위해선 노 전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홍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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