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명 [뉴시스]](/news/photo/202103/445227_362255_5534.jpg)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ASEM회의 유치
APEC 한·일 정상회담
- 시설들이 만만치 않겠다.
▲ 회의장·숙박시설·경호·교통 등에 대한 실행계획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범정부적으로 총리실에서 이 문제를 계획했다. 방콕에서는 1996년 ASEM을 개최할 때 방콕은 3일간 공휴일을 선언했다. 방콕은 아주 교통상황이 나쁘지 않나. 그 많은 인원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공휴일을 선언해야 했다. 예산 면에 있어서도 일본 같은 경우도 오사카에서 1995년 APEC회의를 할 때 회의 운영 자체에 약 1억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적지 않은 예산이 든다. 그래서 우리로서도 많은 부담이 있었지만 아까 말씀드린 장점을 생각해서 한다고 결정했다. ASEM을 정규화하느냐 하는 자체 논의가 있었는데, 런던 회의가 된 후, 그때 당시 분위기가 아시아 시장이 상승세고 유럽은 유럽대로 새로운 경제 파트너를 찾는 과정이라 아세안+3과의 유대가 메리트 있었다. 그래서 서로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정례화 됐다.
그래서 이때 조사를 해봤는데 서울에 있는 호텔을 다 모아도 국빈급 숙박이 가능한 방은 29개였다. 여기저기 분산해서 서대문 밖에 나와 있는 홍제문 그랜드 하야트까지 다 포함을 해서 11개 호텔 가운데에서 29개 스위트가 있었다. 회의장은 코엑스에 국제회의실이 있는데 490석밖에 안 됐다. 아무래도 새로운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후에 총리실에 준비위원회를 설치해서 이런 시설 문제에 대응한다. 그리고 그때 일본·인도네시아·싱가포르 외상들은 아시아 유럽 관계의 긴요성, 발전을 위해서 3차 ASEM 조기 개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중국에 타진해봤더니 당시 첸치천 외상이 우리 측 제안에 “반대하는 안 하나 계속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중국이 양간 동한 거다.
- 중국도 개최에 대한 생각이 조금 있었나.
▲ 선뜻 우리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자기들이 개최하겠다는 속셈이 있던 거다. 그래서 1차 ASEM회의에서 우리 대통령께서 방콕에서 리펑 총리에게 직접 교섭을 해서 양보하라고 했더니, 결국은 한국을 지지하겠다고 이야기는 했다. 사실 그에 앞서서 2월27일 서면으로 중국이 한국의 개최를 지지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대신 중국의 인권 문제 결의안에 대해서 중국 입장을 지지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 조건부였나.
▲ 그래서 3월에 있었던 방콕 ASEM에서 우리 대통령께서 3차 ASEM을 서울에서 하겠다는 제의를 했고 그에 대한 컨센서스가 있었다. 그래서 의장 성명 속에 “The meeting also welcomes the offer for the Republic of Korea of hosting the third ASEM in fout years time”라는, “4년 만에(in four years time)”라는 표현이 나왔다. 그래서 후속 조치로 아까 이야기한 대로 총리실에 로지스틱 담당 부서를 만들었고, 부위원장에 경제부총리와 외무부장관, 위원장은 이수성 당시 총리, 준비 위원들은 재계 지도자들을 물색했다. 최종현 당시 SK 회장, 전경련 회장을 하고 있던 구평회 무역협회장, 김삼하 대한상공회의회장, 박상희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 송자 연세대학교 총장, 김경원 사회과학원장 이렇게 준비위원으로 위촉을 해서 준비기획단이 구성됐다.
그다음에 입지 선정을 위해서 각 후보지 6개 자치단체에서 신청이 들어왔다. 대전·부산·경주·무역협회·제주도·경기도 가운데 무역협회에서 신청한 기획안이 채택됐다. 그렇게 지금 무역협회에 있는 ASEM 타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개최 시기는 2000년 하반기 불가불 개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새롭게 만들어야 할 테니 건설 공정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1996년 3월, 1998년 4월, 이렇게 진행을 봐가면서 1997년 10월경에 룩셈부르크 ASEMSOM에서 통보한다는 입장이었는데, 공정이 좀 늦어졌다. 그래서 결국 1999년 독일에서 있었던 EU 외무부장관회의에서 발표를 했다. 2000년 늦은 후반기, 10월 이후로 생각되는데 날짜를 통보해서 결국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때 ASEM 제3차 정상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했다. 그 후에 APEC 정상회담도 노무현 정부 때 부산에서 하게 됐다. 그렇게 대규모의 국제회의들이 쭉 이루어진다.
- APEC 회의 당시에도 한·일 관계가 상당히 어려웠다. 역사 공동위원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장관으로서 전반적으로 한·일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나.
▲ 한·일 관계는 우리 외교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의 하나다. 미국과의 관계가 한국의 사활이 달린 직접적인 문제이지만, 동시에 일본과의 관계도 사실 동맹에 버금가는 우호관계에 있다. 그런데 일본과의 마찰로 인해서 그 우호관계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와 인식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게 한·일 관계가 지니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다. 한국과 일본은 다같이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미국과 일본의 안보조약에 따라, 일본은 주한미군에 대한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의 미군기지는 주한 UN군, 즉 주한민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하게 되고, 한국전쟁 내내 그러한 역할을 해온 거다.
따라서 일본에 있는 여러 기지는 UN군의 기지 역할을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인식해야 하고 그러한 관점에서도 한·일 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데 이런 측면이 자주 잊혀서 한·일 관계에 어려움이 있다. 특히 역사인식 문제에서 대두되는데, 광의로 보면 역사인식 문제에는 영토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좁은 의미에서 역사인식 문제는 주로 일본 측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이 문제가 되고, 단적인 예는 교과서에 정확히 기술되어 있지 않아서 갈등을 빚는 일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은 당시 오사카에서 APEC 정상회담이 있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이 참석을 못하고 앨 고어 부통령이 참석을 했다. 한국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이 가셨다.
김영삼 대통령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와의 정상회담이 우리에게는 의미있는 회담이었다. 그 정상회담은 사실 11월18일 토요일 오후 3시 오사카 시장 공관에서 열렸습니다만,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11월11일자 우리나라 동아일보에 에토 다카마 일본 총무처장관의 망언이 보도됐다. 그 망언의 내용은 “한일합병이 무효라고 한다면 국제조약은 성립되지 않지 않느냐? 따라서 구한말에 한·일 간에 체결된 협정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입장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이야기였다. 이 사건으로 한국 국민들이 대단히 격양했다. 우리 정부로서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만약 일본 정부가 적절하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일 외상회담과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온라인뉴스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