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220조 예산안 막후

한나라당은 지난 13일 단독으로 220조 가까운 내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뒷말이 무성하다. 특히 민주당에서는 ‘이한구 예산안’이라고 부를 정도로 야당 의견이 무시된 예산안이라며 이 위원장을 윤리위에 제소한 상황이다. 이 위원장은 예산안 통과 하루 전인 12일 8시간동안 사라졌다. 예결위 위원장이 예산안 통과를 앞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순간 현장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관련 정치권에서는 이 위원장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 위원장이 시내 모처에서 청와대와 정부 인사를 만나 국회에서 합의한 예산안을 다시 재조정했다고 울분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 기본 임무인 행정부 견제 기능이 상실됐고 청와대 ‘거수기’로 전락했다고 한탄했다.
국회가 청와대와 정부의 ‘거수기’로 변질될 조짐은 이명박 대통령이 ‘탈 여의도 정치’ 선언으로 여의도 정치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면서부터다. 이는 지난 보건복지가족부 상임위에서 논의한 ‘응급치료법’ 통과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여야 합의로 보건복지상임위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고 법사위에서 이견없이 통과됐지만 막판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이 정부 기금을 15% 원안에 대해 10%로 삭감 요청을 해 보건복지위 한나라당 간사인 안홍준 의원이 급히 수정안을 본회에 회부 통과시킨 것이다. 이에 민주당 백원우 보건복지위 간사는 “국회가 강만수 국회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보건복지, 강만수 ‘한마디’에 긴급 수정안 제출
여야 의원들이 보건복지와 법사위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법안마저 강 장관의 엄포에 바뀌었다는 점에 대해 한나라당 보건복지위 의원들마저 ‘부적절한 행위’라고 질타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내년 예산안 통과 과정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지적이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민주당은 예산안 통과 하루 전 이한구 예결위위원장이 8시간동안 연락두절된 것과 관련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예산안을 놓고 여야 원내대표가 협상을 벌이던 12일 낮 12시 이 위원장은 사라져 오후 8시 무렵에야 최종 예산안을 들고 예결위위원장실에 나타난 것이다.
이 안에는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의 각 500억원 삭감안 제시로 풀려가던 이른바 ‘형님 예산’(포항지역 관련 SOC 사업)과 ‘대운하 예산’(하천정비사업) 협상이 이 위원장의 잠적으로 깨졌다는 점이다. 또한 여야 예산안 조정소위의 작업도 뒤집힌 게 많다. 각 부처 예산 삭감액 4241억원이 무효화되고 8305억원이 증액됐다.
당장 민주당은 16일 “예산결산위원들의 심의권을 고의적으로 박탈했다”며 국회 윤리위원회에 이 위원장을 제소했다.
한편 민주당측에서는 “이한구 정책위원장을 믿었는데....”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당초 이 위원장은 민주당 간사인 우제창 의원에게 사전에 ‘12일 예산안 처리하자’ ‘야당 요구 수용해 합의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이 위원장은 우 간사에게 ‘여야 합의를 존중해 처리할테니 민주당은 액션을 취해 달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이에 민주당은 12일 법안소위 ‘보이콧’에 들어갔고 SOC 사업비를 삭감하는 대신 복지 및 일자리 비용을 늘려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이 정작 중요한 순간에 8시간이나 사라지고 청와대 및 정부와 조율한 수정된 예산 최종안을 들고 나타나 민주당은 이 위원장으로부터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게 됐다.
이한구 전략, ‘민주당’ 보기 좋게 뒤통수
민주당이 “한나라당이 배신했다”며“여야 원내대표 회담을 무산시키고,‘밀실·국민 배신·청와대 충성’ 예산의 주역인 이 위원장은 반드시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한편 220조 예산안 심의 과정에 여야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예산안 나눠먹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부안에서 1000억원뿐이 삭감되지 않아 기존 정부에 비해 다소 여유가 있어 각 당에 할당된 예산이 적잖게 배정됐다. 한나라당의 경우 9000억, 민주당 4500억 자유선진당.기타 1500억원을 배정했다. 이 예산은 지역구 의원들의 지역 현안 사업을 챙겨주기 위한 배려성 예산인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사철 예결위 간사가 한나라당 전국 지역구 의원들을 대상으로 ‘의원별 30억원내에서 중점 사업안을 제출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각 의원별 예산안 증액 현황을 보면 수도권 및 영남 의원들이 주로 이 예산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한나라당 한 핵심 인사는 “특정 지역 의원을 대상으로 예결위 간사가 30억원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전국에 있는 의원들에게 통보됐을 것이고 지역 현안으로 올리지 않은 금액은 당협 사무소 운영비나 기타 비용 등 편법으로 유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 인사의 말이 사실일 경우 국민의 세금으로 편성된 국가 예산이 지역민을 위한 현안이 아닌 사적으로 사용된다는 의혹 제기로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또한 그는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다”며 “실제로 정부 예산안을 다룬 여야 예결위 50명 위원들의 경우에는 지역 현안 사업을 명목으로 30억원에 15억원이 더 책정돼 45억원 상당의 예산을 배정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해줬다.
예결위 위원들은 무소속이나 일반 상임위 의원들에 비해 특혜를 받은 셈이다. 실제로 예산안 막판 끼워넣기와 증액현황을 보면 예결위위원들이 다수 포진돼 있어 이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국회, 청와대.강만수 장관 시녀로 전락
명단을 보면 한나라당 손범규, 권경석, 조해진, 강길부 민주당 오제세, 최규성, 김재윤, 무소속 이윤석, 자유선진당 류근찬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야 몇 몇 지역구 의원들 중에서 예결위측의 ‘제안’을 통보받지 못하거나 연락이 안된 방도 나왔다. 특히 수십억원의 ‘눈먼돈’을 배정 받지 못한 일부 국회의원은 보좌진에게 역정을 냈다는 후문이다.
한편 국회가 법안뿐만아니라 예산안까지 강만수 장관과 이명박 대통령의 입김에 좌지우지되면서 ‘리만 브라더스가 떴다’, ‘민주주의가 실종됐다’, ‘한나라당이 공룡 시녀로 변했다’, ‘이한구 소신파에서 굽신파로 변질됐다’는 냉소적인 반응이 정치권에서 쏟아졌다. 민주당 한 인사는 “국회가 대정부 견제 기능이 상실된 사건이다”며 “국회의원들 의견은 무시되면서 청와대와 강만수 장관의 시녀로 국회가 전락했다”고 불쾌감을 숨기질 않았다.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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