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방용 전 헌정회장

젊음과 용기를 나라발전에 쏟아 붓고 은퇴한 노인들이 구국의 열정을 불태우는 시절이다. 올해 아흔넷의 송방용 전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의 일과는 바로 나라 걱정이다. 국회의원으로 국정에 열정을 다 쏟고 은퇴한 사람들이 헌정회 회원이고 회원들이 선거에 의해 뽑힌 대표가 바로 송 전 회장이다. 도무지 아흔이 넘은 고령으로 믿어지지 않는다. 건강한 피부색이나 힘이 실린 목청 등 어느 모로 보나 송 전 회장은 아직도 정정한 현역 국회의원이나 다름없다. 시내 을지로 1가 헌정회에서 만난 송 전 회장은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늙은이의 뜨거운 피가 끓고 있다”고 우렁차게 말한다.
아흔이 넘은 늙은이의 피가 끓고 있는데 “젊은 피는 뭘 하고 있느냐”는 야단으로 들린다. 송 전 회장은 한창 적 공직에 있을 때 아르헨티나를 두 차례 방문한 소감을 끄집어낸다.
친북좌파의 망동을 개탄한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칠레와 함께 남미의 ABC국가로 복 받은 나라였다. 넒은 국토에 출부한 자원으로 금방 선진부국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퓰리즘이라 불린 대중 영합주의 때문에 국운이 급격히 쇠퇴했다.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타고난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송 전 회장은 경제에 있어 ‘대중 영합주의는 독약’이라고 규정한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바로 유사한 대중 영합주의에 물들어 경제가 침체하고 기업인들이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하니 독약에 중독된 꼴이 아닌가.
송 전 회장은 북한 인권 참상을 고발한 요덕 스토리를 관람한 소감을 들려주면서 친북, 좌파성 행동파를 보고 기가 막힌다고 말한다. 한총련 데모꾼들이 북한 인권 국제대회장까지 찾아가 반미, 친북을 외치고 다니는 판국이 정상이냐고 반문한다.
송 전 회장은 대북 화해 협력도 좋지만 아무런 조건 없고 대가도 없이 무조건 지원만 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한탄한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동포라는 이름으로 달러와 쌀과 비료를 지원해준 결과가 무엇이란 말인가.
김정일 정권과 독제체제를 지켜주기 위해 햇볕정책이 필요하고 대북 퍼주기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송 전 회장은 단연코 이런 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민족적 화를 불러들일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같은 판단 때문에 북한 문제를 생각하고 친북좌파의 망동을 보면서 나라가 큰일이라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심정을 밝힌다.
송 전 회장은 불과 58여 년 전 6·25를 벌써 잊었느냐고 한탄한다. 김일성이 적화통일 야욕으로 남침해 수 백 만 명을 죽이고 국토를 황폐화
시킨 죄악을 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송 전 회장은 6·25의 참상을 몸으로 겪으면서 “이 땅에 다시는 공산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6·25세대는 그들의 만행을 누구나 체험하고 몸서리 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우 58여년이 지난 지금 세상이 바뀌었는가, 아니면 세상인심이 바뀌었는가.
58년 전 6·25를 잊었는가
어찌해 친북 좌파들이 큰소리치며 반미를 외치고 김정일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의 체제와 독재를 두둔하게 됐다는 말인가.
송 전 회장은 “전직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헌정회가 구국과 애국을 부르짖는 것이 결코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우러나오게 됐노라”고 한다.
대다수가 6·25의 끔직한 체험 때문에 나라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우국충정을 불태우며 자신도 모르게 늙은 피가 끓고 있다는 말이다.
송 전 회장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명동에 있는 양복점으로 맞춤 양복을 찾으러 갔다가 “휴가 장병들은 즉시 귀대하라”는 마이크 소리를 들었다. 그날이 바로 6월25일 일요일이었다.
태평로에 있는 국회의사당으로 갔더니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 난리가 났다고들 야단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용감한 국군이 침략군을 격퇴시키고 있다고 선전했다.
국회는 서둘러 대북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수도 서울 사수를 결의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한강을 건너 피난가고 한강인도교는 폭파됐다. 6월28일, 인민군들이 서울을 유린하고 있을 때 송 의원은 마포에 있는 처가에서 몰래 한강변으로 나가 조그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국회는 서울 사수 결의, 정부는 도망
때마침 따발총을 메고 있던 인민군이 인접 용강국민학교로 점심을 먹으러 갔기 때문에 감시가 없었다. 한강을 건너 걸어서 수원에 도착했다가 석탄화물열차에 올라탔다. 대전까지 내려가는 사이에 얼굴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고 말았다. 수소문해 국회가 있을 곳을 찾아갔더니 문을 지키고 있던 경찰이 입장을 거부했다. 얼굴이 시커먼 양반을 국회의원이라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면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급히 피난 오느라고 잃어버렸다. 실랑이 하는 중에 조봉암 의원을 만나 신분보증을 받고 다시 신분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정부는 다시 몰래 떠나고 말았다. 국민은 물론이고 국회마저 속이고 혼자 피난 간 것이다. 송 의원 일행은 정부가 어디로 피난 갔을까 궁금하게 여기면서 전주로 갔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어렵게 전주에 도착했지만 이 대통령이나 대한민국 정부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전북 도청에서는 민심이 뒤숭숭하니 시국안정을 위해 도민을 상대로 거리 유세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도청에서 준비한 스리쿼터를 타고 최병규 의원, 최윤호 의원 등과 함께 거리 유세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공산군들에게 이리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와 세 국회의원은 남쪽으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윤호 의원은 “지금가면 언제 올지 모르니 근친이나 뵙고 떠나겠다”면서 고향으로 가고 최병규 의원은 “외가에 다녀오겠다”면서 떠났다.
피난시절의 부산 정치파동
두 의원들과의 이별이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공산군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송 의원은 진주를 거쳐 대구와 부산으로 피난해야만 했다. 피난 수도 부산에서 국회는 정치파동을 겪었다. 전쟁 중에 이 대통령의 연임 문제가 정치 이슈화돼 국회의원이 구속되고 등원하던 국회 버스를 헌병대가 끌어가는 사태가 빚어지고 발췌개헌안이 변칙 통과되는 우려곡절을 겪었다.
이때 송 의원은 “이 박사로서는 안 되겠다. 장면 박사를 모시고 내각제로 가자”는 서명파에 참여했다.
3대 의원 시절에는 이 대통령에게 3선을 허용하는 개헌안이 변칙 통과된 ‘사사오입 개헌 파동’을 겪었다. 전날 최순주 국회부의장이 개헌안 부결을 선언한 후 다음날 이재학 의장이 “사사오입으로 통과됐다”고 뒤집은 사건이었다. 이날 이 의장이 개헌안 통과를 선언할 때 의사봉이 부러지고 말았으니 불길한 징후였다.
송 의원은 전쟁 중에 나라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대통령이 주원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국민이 불행을 겪는 세태를 한없이 통탄했다. 다만 6·25남침을 계기로 다시는 이 땅에 공산군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아직도 북녘에는 대를 이은 김일성 김정일 독재가 살아 있고 친북좌파들이 큰소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의 독립, 애국심 존경
대한민국 헌정회를 대표하는 국가원로로서 송 회장은 6·25 침략격퇴로부터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대한민국 근대사를 자랑스럽게 평가한다.
고뇌와 실패가 있었고 불운과 서글픈 세월을 겪기도 했지만 이제는 당당히 세계무대에 대한민국의 위상이 확립돼 있기 때문이다.
송 전 회장은 이 대통령과는 정치노선이 달랐기에 매우 비관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의 가난한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시행하며 국토를 방위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4·19혁명으로 이 대통령이 하야한 다음 대만의 장개석 총통이 이 박사를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 왔을 때 이에 대한 답장 내용을 듣고 그의 애국심에 감탄했었다고 한다.
이 박사는 장개석 총통이 “각하의 하야를 위로하며…” 라는 대목에 대해 “불의에 항거하는 100만 학도가 있으니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송 전 회장은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듣고 이 박사의 독립운동 정신과 애국심을 다시 생각하게 됐노라고 일러준다.
장면 박사에 대해서는 내각제로 모시고자 했었던 사이지만 5·16후 혜화동 수녀원으로 피신한 사실을 보고는 국가 지도자로서 처신을 잘못했다고 평가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은 ‘8년간 모신 사이’이기 때문에 평가하기 곤란하고 YS와 DJ는 잘 아는 사이지만 정치적 평가는 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닫는다. 특히 DJ와는 정치노선이 분명히 달랐다고 지적해 준다.
송 전 회장의 건강은 타고 났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신앙과도 같은 건강운동으로 매우 젊게 살고 있다.
아흔이 넘는 고령인데도 돋보기 없이 신문을 읽는다. 조선, 동아일보는 필독서처럼 읽고 석산 문화일보도 사설과 칼럼 등을 꼼꼼히 읽는다.
담배는 젊을 때부터 피운 적이 없고 술은 적당량을 마신다. 개고기는 부모님 뜻을 좇아 입에 대지고 않고 간식도 금기로 여긴다. 오직 비타민제 한 가지만 복용한다. 여든에 이르기까지는 민관식 전 의원과 함께 테니스를 즐겼지만 요즘엔 요가로 건강을 다진다. 테니스를 그만 두면서 요가 수련을 받았다.
국가원로의 건강은 나라의 자산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기상해 요가로 땀이 솟을 쯤 이면 샤워하고 풀무원 생식으로 조반을 마치고 신문을 읽는다. 독서량도 매우 많다. 저녁 취침 전이나 오전이나 시간이 나면 새로운 책을 잡는다.
자가용이 없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하지만 자택에서 먼 지점에서 내려 걸어서 귀가한다.
여든 넘어 맹장을 수술한 후 걷기 운동을 권유 받았기 때문이다.
소화가 안 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지만 약만 복용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맹장이 터져 급히 수술을 해야만 했다.
이 때 매일 2000보 이상 걷기를 시작해 지금도 많이 걷는 편이다.
송 전 회장이 “늙은 피가 끓고 있다”고 하는 말고 건강이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 피가 끓게 설득하고 독려해야 한다”는 송 전 회장의 말이 너무나 우렁차 절로 존경과 신뢰가 따른다.
국가원로의 건강이 곧 나라의 자산이라고 여겨진다. 6·25와 같은 국난을 겪은 원로들의 말씀을 듣고 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배병휴 언론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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