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부자 농사꾼 유수봉 할아버지

천성의 농심이 나눔의 신앙으로 발전해 매년 농사일로 번 것을 몽땅 나눠주고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시골부자 농사꾼 이야기가 엄청난 감동이다. 감자농사 짓고 야채 가게 운영하는 경기도 하남시 농군 노인의 이야기다. 가톨릭 신앙심 깊은 야채장사이자 감자 농군 유수봉 회장은 아직도 힘이 장사인데다가 불같은 성미로 무소유 나눔 운동으로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한다.
회장이란 호칭도 그냥 주위에서 부르는 존칭일 뿐이다. 언제나 일꾼 차림에 핸드폰 하나 들고 감자밭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노동하는 이 시대의 특이한 상머슴이라 할 수 있다. 유 회장은 연간 20여억 원의 소득을 기부하고 나눠주는 무소유 신앙으로 스스로를 부자라고 자부한다.
모교 장학사업 1억5000만원 지원
노인무료 급식에다 장학사업 지원하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또 나눠준다. 절대로 집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이다.
농군이 농토를 갖지 않고 임대로 농사짓고 부자가 은행통장 갖지 않고 무일푼으로 사회사업하며 집 한 칸 소유하지 않고 농사용 비닐하우스 움막에서 아내와 함께 생활하니 일종의 기행 같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철저한 농심의 신앙인 셈이다.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나눔운동을 위해 연중무휴로 중노동하며 빈손으로 행복감에 젖을까.
유 회장은 일 년 내내 농사짓고 야채가게에서 돈 벌어 나눠주고 무소유로 홀가분하니 “만사가 잘되고 걱정 없으니 자족감에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해 진다”고 주장한다.
남편의 극성을 만류하다 지친 아내도 지금은 나눔의 믿음을 함께 실천하면서도 “저러다가 병원 갈일 생겨 큰돈 필요하면 어쩔 셈이냐”고 걱정한다. 그렇지만 유 회장은 타고난 우렁찬 목소리로 “농사일이 건강을 지켜줘 병원 갈 일 없으니 걱정 마오”라는 한마디로 대꾸하고 만다.
유 회장은 하루 소주 5병을 마시는 애주가다. 술꾼이 아니라 즐겨 마시는 소주가 농주이자 간식이다. 닥치는 대로 먹는 식성인지라 식보를 누리는 셈이다.
그는 잔뜩 벌어서 나눠주고 무소유로 홀가분하니 주저할 것이 없고 거리낌 없어 좋다고 했다. 서울에서 빌딩 갖고 아파트 여러 채 가진 부호들보다 자신이 더 부자인 것 같다고 주장한다. 듣고 보면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유 회장이 인생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소화하기가 벅차다는 소감이다.
유 회장은 경기 안성 사람으로 대다수가 가난뱅이일 때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귀골이었다. 착한 성품의 선친에게서 구김살 없이 자라 소유에 대한 욕심이나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가톨릭 계통의 학교법인 광암학원 안법고등학교를 다닌 것이 일생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감자밭 한바퀴 250리길
안법고 8회 졸업생으로 빈첸시오 세례명으로 독실한 신앙생활에 젖어 모교 장학회 사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손수 재배한 고랭지 배추 2000만원 상당을 광암장학회에 기부하고 지난해에는 억척스럽게 심고 캐낸 감자 1만상자, 1억5000만원 상당을 기부해 모교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보다 앞서 하남시를 비롯해 광주, 용인, 안성 등 4개시에서 시행하는 노인 무료급식이나 불우이웃돕기 운동 등은 KBS를
비롯한 공중파 방송에 의해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은 유 회장은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안법고 총동문회장인 삼척대 이재복 교수와 함께 감자 10상자를 등에 지고 경제풍월 사무실로 방문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딩인지라 유 회장이 직접 등짐으로 가져온 것이다.
‘장학생을 위한 유기농 웰빙감자’를 기부하고 남은 것이 있어 추석선물로 가져왔노라고 했다. 초면의 유 회장은 오래전에 “내
등짐으로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겠다”고 마음먹은 후 “아무 곳이나 직접 등짐으로 가져다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감사하기 짝이 없는 선물인지만 그냥 받기가 참으로 난처한 지경이었다.
유 회장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 6사단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나와 “내 건강한 몸 등짐으로 가난한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각오했었다고 한다.
“호미와 쟁기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선진국처럼 영농방식으로 부국을 일궈보자.”
이런 각오로 논밭 팔아 투자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되겠다 싶어 그는 천성의 낙천적 성품으로 등짐을 지기 시작했고 노동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다가 야채가게, 감자농사로 크게 성공했다.
밥맛은 꿀맛, 간식은 진미
유 회장의 감자농사는 충남 홍성, 예산, 서산일대의 농토 3만평을 빌려 자작으로 짓는다. 평당 1000원이란 적지 않은 임대료를 물면서도 끝까지 농토를 소유하지 않는 방식을 고집한다. 감자를 심고 캐낸 후에는 다시 무와 배추를 심는다. 겨울에도 비닐하우스 재배로 쉬는 날이 없다. 주 5일제라 하니 유 회장은 365일 만근에다 매일 8시간 근로시간이 넘는 만성 초과근로 중노동자이다.
감자나 배추밭 갈고 심고 가꿨다가 수확하기까지 거의 스스로 도맡아 일한다. 감자밭 한 바퀴를 돌자면 사을에 걸려 250리 길이다. 다시 무, 배추밭 돌면 250리 길이니 도합 500리의 농사길이다.
도대체 무슨 신앙으로 고령을 잊은 듯 500리 농사 길을 행복이라고 큰소리친다는 말인가. 유 회장 얼굴은 햇볕에 거슬리다 못해 새까맣게 탄 검정 구릿빛이다. 일부러 모자 안 쓰고 온종일 온몸으로 태양에너지 받고 신발 벗어 던질 맨발로 흙속의 땅 에너지 흡수하니 천연의 건강이라고 확신한다.
농군에게 일하다 먹는 밥은 꿀맛이요, 간식은 진미다. 유 회장은 땀에 흠뻑 젖어 밥 먹는 꿀맛이 절로 피가 되고 살이 돼 힘이 솟는다고 자랑한다. 막일하다가 오른쪽 새끼손가락 두개가 절단돼 손과 악수할 때 실제로 철철 넘치는 기가 느껴진다.
유 회장은 감자를 캔 후 트럭에 실을 때 100㎏이나 120㎏까지 거뜬히 들어 올려 젊은 일꾼들의 기를 죽인다고 한다.
하남 장터의 ‘도와주는 농장’
유 회장 부부가 운영하는 하남 시장터는 ‘도와주는 농장’ 야채가게는 ‘돈 받기가 바쁘다’고 한다. 하루 300만원을 넘고 500만원 매상도 수월하다니 어지간히 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새벽 4시부터 준비해 믿을 만한 야채를 싼 값으로 박리다매하니 불티가 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농사지어 장학사업 지원하고 야채가게에서 벌어 노인네 무료급식 한다는 이야기가 퍼졌으니 절로 장사가 될 수 있었다.
유 회장은 이렇게 번 돈으로 연간 적어도 1000가마의 무료급식과 나눔을 실천하니 이보다 수만 배의 즐거움이 자신에게로 돌아오더라고 했다. 그러니 서울의 어느 부자보다도 부러움 없는 자족감을 누린다는 이야기다.
유 회장은 하남시를 비롯해 4개시에서 6년 전부터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있다. 소문이 퍼지자 자원봉사자가 찾아와 운영에 어려움이 없다. 자원봉사자 가운데는 부잣집 마님들도 종종 참여한다. 좋은 일 하는데 얼굴내기가 안성맞춤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료급식 행렬 속에 넉넉한 집 노인들도 끼어 있는 경우가 있다. 유 회장은 이를 알고도 탓하지 않는다. 무료급식을 축내는 것보다 나눔의 정신을 인식 시켜 주는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유 회장은 기존 4개시 외에 전국 도청 소재지 10곳에 무료급식소 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한곳에 1억원씩 도합 10억원이 소요된다. 우선 대전시를 시작으로 추가로 무료급식소를 열게 되면 전국의 불우 노인에게 “내 등짐으로 밥 먹여준다” 소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유 회장에게는 나눔과 봉사의 철저한 원칙이 있다. 내가 가진 것부터 나눠주고 내 몸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불우이웃돕기나 사회봉사를 명분으로 자기 것은 그냥 집에 두고 남에게 손을 벌이는 나눔과 봉사는 별로 마땅치 않게 여긴다.
봉사와 나눔은 ‘내 것부터’
유 회장이 농군이면서 농토를 소유하지 않고 부자이면서 통장하나 갖지 않고 야채가게에서 벌고 감자농사로 수확해 나눔 운동하고 무료 급식하는 것이 바로 ‘내 것부터 나눔’의 원칙인 것이다.
유 회장의 ‘도와주는 농장’소문이 퍼져 서울 사람이 500억원 넘는 땅을 내놓겠다는 제의가 있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하남시 의회가 소문을 듣고 예산을 확보해 지원하겠다고 제의했을 때도 사양했다.
나랏돈으로 무료급식하기보다 내가 번 것으로 봉사하겠다는 신념이었다. 전국의 수많은 시민단체와 사회봉사단체들이 정부 지원금과 대기업 기부금 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확고한 신념이다. 유 회장의 무소유 사회봉사 정신에는 뿌리가 깊은 신앙심이 바탕이다. 그는 자신이 어렵게 자란 것도 아니고 쪼들려 고생한 인생도 아닌데 나눔과 봉사하다가 마음이 바꿔 소유에 집착하지 않을까 두려워 아예 집에는 돈을 갖고 가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이 시작될 무렵, 대동공업이 경운기를 조립 생산하고 있을 때 그는 많은 농토를 팔아 농업 기계화와 영농개발에 투자했지만 실패했다.
농촌진흥청을 열심히 방문하고 자문도 받았지만 농촌에서 단신으로 잘살기 운동을 벌인 것은 역부족임을 실감했다.
그 뒤 판교의 땅값이 3000~5000원일 때 토지를 매입해 식품공장을 운영해 봤지만 재미가 없었다. 공장을 매각해 거액을 손
에 쥐었지만 이것저것 손대다가 거의 날려 버리고 말았다.
이 때 유 회장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원점으로 돌아가 새 출발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천성의 농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눔 실천 부자”
뒤늦게 본심으로 회귀한 유 회장은 하루 품팔이로 쌀 닷 되를 받으면 두되는 먹고 석 되는 나눔을 실천하는 원칙을 삼았다.
몸으로 벌어 나누는 것은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면서 야채가게와 감자농사로 발전해 오늘의 ‘나눔과 봉사’의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유 회장은 24시간 꺼지지 않는 촛불기도로 농사 잘돼 수확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이웃 나눔의 결심이 변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한 때 많이 이룩하고 소유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옛날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을까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극복의 수단으로 아내와 함께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며 무소유를 다짐하기 위해 신앙의 힘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유 회장 부부가 거처하는 하남 비닐하우스 자택은 농사용 하우스이다. 하우스 내부에는 세간이 있고 부엌도 딸려 있지만 화장실은 500m나 떨어져 있다. 예부터 “처가와 화장실은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는 생활지혜를 믿기에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초기에는 아내가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한숨짓고 걱정하고 투정도 부렸지만 결국 동화되고 말았다.
동사무소에 쌀 100가마니를 쌓아두고 여기저기 나눠주면서 집에는 달랑 한부대만 등짐으로 지고 왔을 때 아내가 푸념했다.
이때 유 회장은 한 부대 이상 집으로 들여오면 마음 변한다고 딱 부러지게 선을 그으니 더 이상 불평할 도리가 없었다.
배병휴 언론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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