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충격요법’은 또 하나의 통치행위
대통령의 ‘충격요법’은 또 하나의 통치행위
  •  
  • 입력 2007-01-03 13:06
  • 승인 2007.01.03 13: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통령과 ‘충격요법’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2일 민주평통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노 대통령의 발언으로 정치권은 충격에 빠졌다. 파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야당뿐 아니라 여권에서도 ‘막말발언’, ‘있을 수 없는 얘기’라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권뿐만이 아니다. 일반 시민들과 시민단체 등도 ‘미증유(未曾有)’의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정치적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즉, 자신의 정치적 이해득실을 노리고 ‘충격요법’을 동원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사실 최고통치권자의 충격요법은 정권의 위기나 대통령 자신의 개인적인 위기 시, 또는 과감한 정책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적절하게 사용되는 또 하나의 통치행위로 볼 수 있다.
역대 대통령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이러한 충격요법은 있어왔다.
전직 대통령들은 어떤 충격요법으로 탈출구를 마련했을까.



노 대통령의 이번 충격요법은 어찌 됐든 자신이 원하는 구도로 바꿔 놓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노 대통령은 이번 발언을 통해 자신의 통치행위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해 온 집단 및 개인들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이 같은 대통령의 격한 표현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제2의 탄핵 유도 발언이라며, 그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자들 사이에서도 이 날의 노 대통령의 발언 내용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며, 뭔가 정치적인 노림수를 두고 했다는데 이견이 없다. 노림수란 바로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여당 내의 상황을 친노계와 반노계로 구분하려는 의도라는 것. 지금 현재 열린우리당은 당내 갈등으로 인해 친노파와 신당파로 구분돼 있다. 이 같은 구도를 친노파와 신당파가 아닌, 친노파와 반노파로 전환시켜 지지층 결집에 올인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노 대통령은 반노파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정동영 전의장과 김근태 의장을 비난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표현했다. 또한 자신이 탄핵을 당해 권한이 정지된 상태에서 국정을 무난하게 대행해 준 고건 전총리까지 잘못된 인사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다. 이 날 노 대통령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이제 여당의 구도는 친노파와 반노파로 확실하게 양분됐다. 일단 노 대통령의 의도대로 된 듯 보인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은 정치적 수세를 충격적인 방법을 통해 탈출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충격요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노 대통령이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부정과 긍정이 혼재한다.


김대중, 남북정상회담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16대 총선 직전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을 통해 발표한 남북정상회담은 총선을 앞두고 민심을 여당 쪽으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남북정상회담의 당위성과 명분은 십분 이해가 가는 사안이었지만 총선 직전에 이뤄진 회담추진 발표에 일부 국민들과 야당 쪽에서는 정치적인 의도를 담은 새로운 ‘북풍’이라고 주장하며 국민들에게 속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어찌 됐건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총선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메가톤급 충격요법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야당의 승리로 끝났다. 16대 총선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은 국회의석 과반수 이상을 획득했다. DJ의 남북정상회담 추진이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여권의 주장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야당의 대응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 카드로 정국 주도권을 노렸던 여당은 흥행에 실패했다.


김영삼, 금융실명제 도입
김영삼 대통령의 충격요법은 단연 금융실명제로 대표된다.
YS는 집권 원년인 1993년 8월 저녁식사 시간인 오후 7시45분에 전격적인 기자회견을 통해 금융실명제 도입을 천명했다.
음성적인 자금을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날벼락이었다. 당시 금융실명제 추진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 청와대 내에서 몇몇 사람만이 알 정도로 은밀하게 추진된 비밀프로젝트였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YS는 금융실명제를 국회에서 논의해 법제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국회의 공개적 토론과정에 부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 특히 대규모 자금이탈과 이에 따른 경제적 위기를 명분으로 한 기득권층의 반발로 금융실명제 자체를 도입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YS는 손수 헌법을 샅샅이 뒤졌다. 헌법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YS는 헌법 제76조 ‘대통령의 긴급명령권’ 조항을 찾아내 이에 의거, 금융실명제를 도입키로 마음먹었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기 위해 당시 이경식 부총리, 한국개발연구원 양수길 박사 등이 실무팀에 참여했다. 하지만 보안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007 영화처럼 진행됐다. 장소는 과천의 한 아파트를 빌렸다. 실무진들도 비밀로 해서 차출했다. 선발된 실무진들에게는 ‘40일간의 출장’이라고 속였다. 출장지역도 외국의 수도나 금융중심지가 아닌 생소한 도시로 했다. 대도시를 출장지로 하면 현지 주재관들에게 연락할까봐 일부러 낯선 도시로 정한 것이다. 이들은 실제 공항에 나가 직원들과 가족들이 환송하는 가운데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일본까지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와 비밀 작업 장소인 과천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실무팀에게는 ‘절대 비밀을 지킨다’는 서약서를 받아냈다. 그리고는 업무수칙도 정했다. ‘현관문을 나설 수 없다’, ‘창문가에도 서면 안된다’, ‘전화를 삼가되 집으로 할 경우 국제전화로 위장하라’는 것 등이었다. 집 주인에게도 대학 교수들이 남북통일 용역 연구를 수행한다고 둘러댔다. 때문에 집밖을 나설 수 없었던 실무팀은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는 여름이라 밀폐된 공간에서 땀을 흘리며 실무 작업을 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실무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지금이 독재시대냐, 나 안한다”며 짐을 싸고 나가겠다며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 때 YS가 직접 방문해 “여러분들의 역할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격려를 하며 직접 실무진들을 진정시키기도 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군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녔고, 당시 경제상황이 호황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기억에 남을 만한 대국민 충격요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될 것이다. 하지만 군사정권 시절의 하루하루는 시국 사건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집권 기간 내내 충격요법을 제시하곤 했다.


노태우, 3당합당 추진
노태우 대통령 당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3당 합당 발표였으며, 다른 하나는 범죄와의 전쟁 선포였다. 3당 합당은 지금까지도 그 시절 그 사건과 연루됐거나 그 시대에 활동했던 정객들에 의해 회자되고 있으니, 정가의 영원한 충격적 사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천명한 범죄와의 전쟁은 주된 타깃이 조직폭력배였다. 이 발표 하나만으로도 당시 국민들은 치안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범죄와의 전쟁으로 인한 효과는 상당히 높았다.


박정희, 7·4남북 공동성명 발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은 철권통치로 통하던 억압적 분위기의 사회구조였다. 때문에 대통령의 지시가 바로 법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사회 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립시키는데 주력했다. 박 대통령 집권 당시는 경제개발로 인한 경제부흥이 일어나던 시기라 경제와 관련된 대통령의 충격요법은 없었고 대부분이 정권 안위 차원의 충격요법이 자주 등장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씨를 통해 이뤄진 남북공동성명은 마치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사회분위기를 조성시켰으며, 이로 인해 정권의 안정을 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북공동성명은 이후 발생한 판문점 미루나무 도끼사건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박정희 시대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은 바로 유신과 긴급조치였다. 유신과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으며, 박 정권에 대한 어떠한 불만의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유신발표는 1972년 10월17일에 단행됐다. 그 날은 서울시청에서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청와대로부터 들려온 이 같은 급보를 통해 국정감사는 중단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유신 발표와 함께 중단됐던 국정감사는 이후 16년 만인 1988년 다시 부활하게 된다. 유신정권 시대에는 모든 것이 대통령의 뜻대로 되던 그런 시기였다. 한마디로 정치적, 사회적인 암흑기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철권통치에 대해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보는 이들이 아직까지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서도 유신의 당위성이 인정됐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대통령의 충격요법을 통해 정국이 요동치고, 국민들이 술렁이는 모습을 자주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충격요법이 과연 정치적 수세를 극복하기 위한 인위적인 방법이었는지, 아니면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정당한 분노의 표출이었는지는 과거 정권의 모습을 통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듯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