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한명숙 국무총리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은 노무현 대통령은 알 듯 모를 듯한 쓴 웃음을 지으며 국무회의를 하기에 앞서 말문을 열었다.
노 대통령은 “임기를 못 마치는 첫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취재진이 퇴장하기 전이라 노 대통령의 발언은 그야말로 ‘정가의 태풍’으로 변했다.
이번 발언을 두고 항간에서는 혹시 대통령이 이판사판식으로 ‘하야’성명이라도 발표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섞인 말이 돌았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우려를 나타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동안 노 대통령이 기회만 되면 대통령 자리를 두고 하야의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파장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발언은 예전의 발언보다 강도가 훨씬 강했기 때문에 진짜 대통령직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까지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자신의 정책과 방향이 맞지 않을 때면 공식적인 석상에서 대통령직을 걸고 수를 써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다가는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돈다”고 말해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공중파 토론회에 나와서는 “권력을 내놓으라면 모두 내놓을 수도 있다. 고려해 보겠다”며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노 태통령의 발언을 두고 우려내지 걱정은 할지언 정, 실제 대통령직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 또한 정가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이런 식의 통치권자의 발언이 결국은 자신의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고, 결과적으로는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다지려는 정치적인 행동이라는 것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같이 대통령 자리를 건 정치행위는 과거에도 없지는 않았다.
이승만 세번째 발표후 하야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한국전쟁과 4·19 학생의거 과정을 통해 모두 두 번의 하야 의사를 피력했으며, 세 번째 하야 발표가 진짜 하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간 대통령을 비난하는 여론이 드세지자 이 대통령은 대구에서 대통령직을 내놓을 의사를 피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군부와 자유당 내 인사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4·19 학생의거 당시에도 뉴스와 언론보도 등을 통해 학생들의 죽음을 접한 뒤 대통령직 하야를 염두에 뒀었지만, 당시 실세인 곽영주 경호실장과 이기붕 부통령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않아서 실제 하야로 이어졌다.
박정희, 후계 운운에 격노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집권 기간 동안 사석을 통해 대통령직을 그만두겠다며 측근들의 마음을 떠보는 일을 자주 했다.
67년 여름 어느 날, 박 대통령은 측근들을 대동하고 청구동 JP 자택을 방문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날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에 이런 저런 음식들을 만들며 잔치분위기를 냈다고 한다.
이날 술에 거나하게 취한 박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너무 힘들어서 대통령 그만하고 쉬고 싶다”는 말을 했다. 물론 진심이 아닌 측근들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한 계략이었다.
이에 대해 한 인사가 “각하, JP도 있고,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고 답하자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며, JP 집안에 보관 중이던 권총을 꺼내들고 난리를 쳤다.
대답을 한 측근은 박 대통령이 진짜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으로 알고 후계자로 JP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말에 박 대통령이 격노한 것이다.
이 외에도 박 대통령은 나랏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대통령 그만하고 쉬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청구동에서의 난리를 기억하는 측근들이 그 말을 곧이 들을 리 없었다. 그런 말을 박 대통령이 할 때면 오히려 “각하 밖에 없습니다. 힘을 내십쇼 각하”하면서 오히려 아부를 떨기가 일쑤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의 이런 말이 있을 때면 JP에게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붓기도 했으며, 한때는 JP를 암살하기 위한 작전까지 짰을 정도라고 하니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말은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에 의해 각각 다른 모습의 수단으로 포장돼 활용됐다.
만약 이 시기 박 대통령의 ‘그만두고 싶다’라는 말이 진심이었다면, 그리고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은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권력자가 종국에 가서는 자기 말만을 따라주는 간신배만 찾는다는 말과 같이 박 대통령의 집권 말기 또한 곧은 말 대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자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경계성 발언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7년 동안 개인적으로 또는 대외적으로 대통령직을 포함해서 권력을 놓겠다고 공언한 바는 없다.
그러나 5공화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후계자로 낙점된 노태우씨를 경계하기 위해서 노씨에게는 개인적으로 하야 분위기를 자아내는 발언을 곧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대통령은 87년 6·29 선언이 있기 전 혼란한 국정상황이 계속되자 노씨를 불러 “대통령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이 이 상황을 정리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며 노씨를 자극했다고 한다. 전 대통령의 이런 ‘하야’성 발언은 군 출신에게 차기 정권을 맡길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돼 노씨는 전 대통령이 자기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지 않으려는 뜻으로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최측근인 박철언씨와 자주 고민을 했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 기간 내내 이런 식으로 전 대통령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은 노씨였기에 그의 집권 기간은 알맹이 없는 정권이었다는 비아냥을 듣는지도 모른다.
전 대통령은 노씨를 겨냥한 경계성 하야 발언을 “우리 모두 그만두자. 이제는 민간인에게 정권을 넘겨야 한다”라는 의미로 전달을 했기 때문에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동안 노씨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전 대통령으로부터 후계자 지명을 받아야 했던 노씨로서는 전 대통령의 위협적인 발언이 나올 때마다 잘 보이기 위해 고민을 한 것이다.
YS·DJ 하야발언 안해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나가 알듯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건 사람이기 때문에 집권 기간 동안 대국민 사과문 정도는 발표했지만 대통령직을 내놓겠다는 하야성 발언은 결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김 집권 기간 동안은 장관과 총리가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아 장관직과 총리직을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전총리였다. 그는 한때 YS의 총애를 받았지만 대통령과의 이견으로 총리직을 버림으로써 ‘대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국민이 뽑아준 것으로, 선택을 받은 대통령이 함부로 그 자리를 내놓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노 대통령의 발언은 국민들이 던진 한 표 한 표의 의미를 무색케 하는 것이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왕과 대통령을 비유하는 것은 좀 지나친 면이 있지만 과거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없지는 않았다. 비록 군주제 하에서의 일이지만 조선의 태종대왕과 선조대왕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태종은 모두 세 차례의 선위파동을, 선조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모두 15차례의 선위파동을 일으켰다. 물론 결과적으로 본인의 뜻대로 왕의 자리를 세자에게 주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임금에게도 이런 선위 파동이 정치적으로 필요하긴 했던 것 같다.
노무현, 반의적 제스처
지금 노 대통령의 ‘하야’성 발언이 과거 조선 시대의 선위파동과 같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집권력을 배가시키고, 작금의 정치상황에서 그 중심에 서겠다는 의지를 반의적으로 담고 있다면 조선 시대 임금의 정치적 제스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언론인 김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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