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0·25 재·보선 참패가 촉발시킨 여당발 정계개편 움직임에 대해 윤태영 대변인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내비쳤다.
윤 대변인은 춘추관에서 가진 브리핑을 통해 “노 대통령은 88년 이래로 정치활동을 해오면서 지역주의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정치권 재편 논의가 지역 분할구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은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에 대해 각 언론사 기자들은 그 의미를 해석하느라 바빴다. ‘지역주의 타파’를 기치로 창당한 열린우리당을 끝까지 지켜나갈 것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지역구도 완화에 기여하는 방향이라면, ‘헤쳐 모여식’ 정치권 재편도 수용할 수 있다는 취지로도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 대통령이 언론을 향해 던지는 화두는 정확한 답변을 주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때로는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향해서는 정확한 ‘정정 보도’를 요구하기도 한다.
재야 인권변호사로 시작해 국회의원, 그리고 국회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 노 대통령은 그 후 부산시장 출마와 국회의원에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모두 ‘낙선’하는 아픔을 겪었다.
DJ 정부시절에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낸 노 대통령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라는 조직적인 단체가 결성되면서 대권주자로 힘을 키워나갔다.
대권주자가 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하면서 노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자신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언론’에 이끌려가기 보다는 ‘언론’을 이끌어 온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한 예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시절, 노 대통령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 자신의 지지층과 반지지층을 확실히 구분지어 놓았다.
비판언론에 정정 요구
당시 노 대통령의 화법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했고요~’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킬 만큼 노 대통령의 화법은 독특하다.
노 대통령은 기자들과의 간담회나 대국민 토론회를 가질 때 기자들의 질문에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화법을 구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지 않으면서 본인의 주장을 펴는 새로운 답변 논리였다.
물론 그런 화법 때문에 언론에서 온갖 추측성 기사를 내고, 노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정쟁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아졌다. 이 역시 노 대통령의 언론 플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언론을 이끄는 힘은 대단하다. 최근 불거진 전시작전권 환수문제를 놓고 벌어진 노 대통령과 한나라당과의 논쟁은 이를 잘 나타내준다.
노 대통령은 ‘자주국방’론을 내세워 전작권 환수의 핵심을 ‘자주’로만 국한했다. 결국 한나라당도 노 대통령의 자주발언에 불끈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전략과는 무관하게 전작권의 쟁점을 자주로 확정짓고 말았다.
결국 전작권 환수 문제는 자주로 귀결되어 ‘자주냐 반자주냐’의 싸움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이 대통령의 주장을 반대하는 모양이 되자 한나라당은 자주에 반대하는 당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노대통령의 작전 아닌 작전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적과의 싸움에서는 결코 적이 만든 ‘논리의 바다’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을 자신이 주장하는 ‘논리의 바다’로 유인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정치인인 듯하다. 노 대통령의 언론 플레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불리한 여론엔 과감히 대응
김대중 대통령은 여론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늘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는 어쩌면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호남이 DJ를 지지해 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DJ가 당시 여권의 대통령이자 군부독재의 상징이었던 ‘노태우’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설’이 나돌았다. 여론이 “민주화투쟁을 한 DJ가 설마 받았을 리가 있냐, 받았다면 정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에 DJ는 “노태우로부터 20억을 받았다”며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97년 대선 운동 기간 중에도 이러한 장면은 연출됐다. 국민들은 대통령후보 토론장에서 깜짝 놀랄 장면 하나를 목격하게 된다. 타 후보가 김대중 후보에게 건강문제를 제기하자 DJ는 귀에 꼽고 있던 보청기를 뽑았다. 이는 스스로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을 시인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어느 후보도 김대중 후보의 고령에 따른 건강 악화문제를 들고 나오지 못했다.
이처럼 DJ는 자신의 불리한 여론을 대중과 언론 앞에서 과감히 드러냄으로써 돌파했다.
기자 불평에 기사감 제공
김영삼 대통령은 언론에 가장 민감한 정치인이었다. 언론을 통해 민심을 살피고, 그에 따른 정책을 펴나가는 대통령이었다.
이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잘 드러난다. 전두환 정권시절, YS가 전두환 정권에 맞서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다. 자신의 단식투쟁을 알리기 위해 YS 측근들은 이리저리 백방으로 뛰었다.
부인 손명순 여사가 일일이 전화로 AP, UPI 등 외신기자들에게 단식 성명내용을 불러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다.
하지만 언론통제로 국내 신문에는 단 한 줄도 보도가 안됐다. 단식 이틀이 지나 일부 언론에서 YS의 단식을 ‘정세흐름’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한 게 다였다.
이 때 단식을 하고 있던 YS가 언론에 대해 얼마나 민감했는지는 당시 김덕룡 비서실장이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YS는 “도대체 정세흐름이 뭐꼬, 목숨을 건 단식이 정세흐름이냐”고 비꼬았다.
이와 별개로 YS의 언론관을 잘 지적하는 일화는 ‘세계화’ 선포 사건이다.
세계화 선포사건은 지금도 기자들로부터 회자되는 일화 중 하나다. 당시 세계화라는 구상은 APEC 정상회담을 위해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시작됐다. “이번 정상회담에 기삿거리가 없다”고 기자들이 불평을 늘어놓자 YS가 큰 선물을 주기 위해 ‘세계화’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화’는 즉흥적인 ‘깜짝쇼’의 하나였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언론 플레이를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언론으로부터 잘 포장된 인물이라는 표현이 맞다.
언론이 앞 다퉈서 ‘땡전뉴스’를 만들어대며 9시 뉴스의 서두를 호들갑스럽게 장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에 전 대통령은 언론으로부터 철저하게 경호받으면서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의 후계자로 언론 관계에 있어서 평이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때로는 언론을 통해 ‘오버’하기도 해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4,000억원 비자금 사건으로 인해 구속되기에 이르자, 노 대통령은 검찰 앞마당에서 “모든 것을 내가 안고 가겠다”는 발언을 해 언론들이 일제히 ‘정신 이상자 같은 모습’이라며 질타했다. 이처럼 노 대통령의 언론 플레이는 ‘약발’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임에 분명했다.
그럴듯한 포장 하기도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 동안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언론인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박 대통령은 언론검열 등을 통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을 내보냈다.
박 대통령은 군 출신답게 언제나 언론에 비쳐지는 모습이 강직, 우직스러운 모습이었다.
최근에 공개되는 개인적인 사생활 사진 속에서 친근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당시 언론과 기타 매체 속에서 박 대통령은 차가운 카리스마를 소유한 절대 권력자의 모습뿐이었다.
특히 박 대통령을 포장한 언론은 ‘대한뉴스’다. 대한뉴스는 얼마 전까지 극장가에서 언제나 만나 볼 수 있었다. 대한뉴스를 기억하지 못할 국민은 거의 없다.
대한뉴스는 박대통령의 모든 공적과 치적을 주 내용으로 다뤘다.
당시 학생들의 유일무일한 오락은 극장 입장이었다. 물론 그 출입도 제한적이었다. 항상 극장을 가려면 단체입장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 시작되는 대한뉴스 속에서 박 대통령을 학생들은 접할 수 있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학생들은 대한뉴스 속의 ‘대통령’을 언제나 존경하는 이미지로 각인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신의 업적이나 치적을 홍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대한뉴스를 만들었다고 보는 게 통례다.
대한뉴스는 1953년부터 1994년까지 방송을 탄 장수 국정뉴스매체다. 박정희 시대의 최대 업적인 경부고속도로 개통 뉴스는 장기간에 걸쳐 박 대통령의 치적으로 극장가를 맹타했다.
이처럼 박 대통령은 언론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언론관은 ‘없다’가 정답인 듯하다. 이 대통령은 구한말 몰락하는 조선왕조를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이 된 뒤, 본인 스스로가 임금이 된 듯 ‘자칭 타칭’ 절대 군주로서 대통령직을 수행해 나갔다.
백범 김구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뒤 최측근 곽영주 경호실장(당시 경무대경찰서장)의 지시 하에 이승만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조간신문이 따로 만들어 질 정도였다.
이 대통령은 언론이 뭔지 모를 정도로 어두웠다는 게 중론이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측근들의 전횡에 힘입어 민주적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절대군주로서 행동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민심 동향을 간파하지 못해 4·19혁명으로 말미암아 하야하고 말았다.
<김문신·언론인>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