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지난 9일, 청와대 분위기는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특히 이날 오후 3시로 예정된 한·일정상회담에 앞서 핵실험 발표가 전해지면서 청와대는 물론 기자들도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이날 열린 한·일정상회담은 언론으로부터 뒷전으로 밀려났고, 보도를 위해 준비 중이던 방송 중계 장비와 인원들은‘북 핵실험’쪽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전 일정에 없던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해 사태파악과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이후 북한이 중앙통신을 통해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공식 발표하자 안보관계장관회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회의 성격을 전환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외교·안보·군사 등 국내·외 정책사항을 심의하는 대통령 자문기구로, 대통령이 의장이며 외교·통일·국방장관과 국정원장 등 외교안보 부처 장관급들이 참여한다.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회의체 수준을 격상시킨 것이다.
이날 북핵 파문 영향은 특히 대미관계, 즉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문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노 대통령은 북핵실험의 영향 때문인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문제에 대한 재고 필요성을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전작권 문제를 재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핵 도발에 대한 현정부의 대응 수준이 아직은 미흡하다는 자체 평가와 국내의 여론에 편승한 발언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은 현재 주한미군이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환수는 자주국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는 미군으로부터의 군사독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은 이러한 시도(전작권 환수)에 제동을 걸기에 충분했다.
양측 속셈은 ‘따로따로’
청와대측은 그동안 전작권과 관련해 ‘자주’라는 표현을 써가며 환수에 대한 정당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날 재고 언급으로 인해 정부가 북핵 문제에 대해 스스로 대응수준이 미흡하다는 것을 인정한 꼴이 돼 버렸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미군 측의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다. 청와대측과 미군측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전작권 환수문제를 자주의 문제로 규정하며 노골적으로 미군으로부터의 군사독립을 노렸으나 미군은 이들의 생각과는 다른 각도와 차원에서 전작권을 바라보고 있다.
주한미군은 전작권 이양을 통해 주한미군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려고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전작권 환수에 따른 한국의 자주국방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무기를 판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결국 우리는 자주가 목적이지만, 미군은 우리의 자주를 명목으로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전작권 환수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핵 실험으로 노대통령이 한발 물러서는 최근의 움직임에 대해 미군이 어떤 반응으로 대응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전작권 환수를 자주의 문제로 보는 우리 대통령의 생각과,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미군의 입장이 이번 북 핵 실험과정에서 어떻게 정리될지 주목된다.
‘햇볕정책’에도 깊은 관여
김대중 정권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군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DJ는 전두환 정권시절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망명 생활을 해야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박정희 정권시절 당시에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일본에서 납치돼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이때 미국 CIA의 극적인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로 인해 미국과 DJ는 ‘일심동체’라고 표현할 만큼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DJ의 ‘햇볕정책’이나 각종 대북정책이 미군의 공조아래 이뤄졌다고 보는 견해가 높다.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보였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과의 조율 차 중국으로 날아갔던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은 사석에서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북정상회담 성사는 주한미군과의 든든한 공조가 배경이 된 것이고 …”.
이처럼 남북정상회담에서부터 각종 대북정책에 있어 DJ 정권은 미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클린턴에 강력 항의도
반면 김영삼 정부는 미국과 불편하지만, 오히려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미군과 잦은 마찰을 겪기도 했다.
특히 지난 1994년 북핵문제가 대두되면서 YS와 미군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북한은 IAEA를 탈퇴하면서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로 변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YS는 강력제재를 미국 측에 요구했다.
북핵문제는 당시 YS의 러시아 순방길에 터졌다.
러시아 순방을 따라갔던 필자는 간담회를 마치고 나오는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북한의 핵개발은 한 개는 물론이고 반개도 용납해서는 안된다. 어떠한 조치를 취해서라도 막아야 한다.”
YS는 ‘한반도 문제는 무슨 일이든 한국정부와 상의하겠다’는 클린턴의 말을 물고 늘어지며 북핵문제에 주도권을 잡으려했다. 물론 북한의 제재수위를 미국과 논의하면서 한국 정부 측의 주장을 펴나가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미국측은 이 같은 YS 정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하다.
미국은 ‘북한 선제공격’에서부터 카터 전대통령의 방북 등 YS와 논의하지 않고 일을 진행했다.
카터 방북으로 신경전 최고조
미국의 북한폭격이 YS의 강력항의로 무산됐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다.
카터의 방북으로 인해 YS와 미국의 신경전은 최고조에 올랐다.
YS가 카터의 방북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며 미국측에 강력항의하자, 클린턴은 “카터의 방북은 미국정부와 관계없는 개인의 일”이라며 꽁무니를 뺐다.
카터의 방북을 통해 미국과 북한과의 대화가 이뤄지면서 한반도 전쟁 임박설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처럼 한반도 문제에 있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던 YS를 미국측은 오히려 소외시켰다.
YS가 이 같이 소외를 당하게 된 이유는 대화채널을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으로 국한했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이 YS를 북미 대화 과정에서 제외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YS가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대화채널을 미국 본토로 바로 겨냥하지 않고, 한미연합사령관을 선택하는 바람에 결국 재주만 부리고 카터와 클린턴에게 공이 돌아가는 효과만 냈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YS와 미군사이의 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당시 한미연합사령부 내에 한국군과 미군들 사이에서는 YS와 한미연합사령관인 게리럭대장의 지위 논쟁이 한창 일었다.
북핵문제 이후 터진 일련의 과정 속에서 미군측은 YS를 철저히 외면했다. 이런 모양새 때문인지 연합사 미군들이 한국군들에게 YS비하 발언을 심심찮게 했다.
‘자주국방’으로 평행선 달려
박정희 정권도 초기에는 미국과 유기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집권말기 ‘자주국방’을 내세우자 최악으로 치달았다.
박 정권이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미국과 평행선을 달리자, 미국측이 박정희 제거에 나섰다는 얘기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박정희 살해에 미국측의 직간접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박정희 시해가 ‘미국과의 공조 속에 이뤄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김문신·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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