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가 불우이웃돕기 경매에 내놓아 고가에 판매된 어머니 故 육영수 여사의 그릇이 한국도자기가 국내 최초로 만든 본차이나 제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화제’다. 유품 제조업체인 한국도자기는 13일 ‘육영수 여사가 사용하던 청와대 식기 뒷이야기’라는 자료를 내고 유품에 얽힌 사연을 공개했다. 청와대에서 사용하던 식기는 2년여 전부터 전시회 등을 통해 세간에 공개된 바 있지만, 그 식기와 관련된 스토리가 자세히 알려지진 않았다. 특히, 정권이 바뀌면서 각 영부인의 스타일과 취향에 따라 청와대에서 사용하는 그릇도 변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고 육여사가 사용하던 찻잔과 접시 유품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되면서, 역대 대통령의 밥그릇과 영부인들의 취향과 스타일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육여사, 한국도자기의 ‘숨은 주역’
한국도자기에 따르면, 육여사와 한국도자기의 ‘남다른’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33년여 전인 1973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도자기 측은 “당시 청와대 식탁위의 식기는 모두 일제였다”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육여사가 한국도자기 김동수 전무(68·현 회장)를 청와대로 초청, ‘국산 본차이나 제품으로 청와대 식기를 바꿔달라’며 생산을 의뢰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김회장은 “육여사가 해외공관에서 보내온 독일산 본차이나 제품을 보여주며 ‘우리도 이런 제품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이참에 우리 식기를 만들자’면서 제품생산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회장도 고가에 판매되고 있는 본차이나 제품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육여사와 본차이나를 꼭 개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청와대를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속된 말로‘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부딪혔다고. 김회장은 지체할 틈 없이 바로 영국으로 건너가, 당시 본사와 전사지(인쇄 화지) 공급계약을 맺고 있는 로열 덜튼 그룹에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그는 “본차이나 고장인 영국의 로열 덜튼 그룹에 철이 바뀔 때마다 ‘한국의 발전을 위해 기여해 달라’는 호소문 같은 간곡한 내용을 보내기도 수차례였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렇게 2년 동안 영국과 유럽을 오가며 기술 제휴에 힘쓴 김회장은 드디어 젖소 뼈를 태운 가루를 50%이상 함유시킨 본차이나 개발에 성공을 한다. 본차이나(Bone China)는 소뼈(Bone)와 도자기(China)의 합성어다.
김회장은 “처음 생산한 제품 3천여 중에서 불량제품들을 빼고 나니 디너세트와 커피세트 각 3벌씩 밖에 남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것을 받은 육여사는 기뻐하며 한국산 본차이나 개발의 성공을 축하했다”고 말했다. 그는 “뿐만 아니라 육여사는 ‘우리의 본차이나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며 전세계 해외 공관에 한국도자기 사용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직접 디자인해 식기 사용하기도
한국도자기에 따르면,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여사가 애용한 식기는 좀 특이하다. 풀잎 문양이 그려진 술병, 군대 식판을 연상시키는 사각형 식기와 곡선이 특이한 완두콩 모양 찬그릇. 여기에는 무관출신의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청초한 분위기가 섞여있다. 특히, 소탈한 육여사의 취향을 반영, 무늬가 절제된 단순하고 소박한 스타일이 주를 이뤘다. 또 육여사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해 제품을 의뢰하고, 사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도자기 관계자는 “육여사는 자신의 모교인 배화여고의 학교 배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도자기에 응용하기도 했다”며 “실제로 이번에 박근혜 전대표가 자선바자회 상품으로 내놓은 육여사의 식기도 배화여고의 교화인 난초 문양에서 응용, 은방울 문양을 디자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그릇은 1970년대 육여사와 당시 여고생이었던 박 전대표가 직접 고른 제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식기의 특징은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육여사의 스타일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육여사는 단아한 옷차림과 적극적인 사회봉사 활동이 매우 차분하고 자상한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비쳐졌으며, 정치적 감각도 뛰어났다. 또, 국민 곁에 다가가는 활동을 하며, 나름대로 파악한 민심의 실상을 박 대통령에게 알리고 충고하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들 식기 ‘각양각색’
전두환 전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는 다소 튀는 스타일이었다. 역대 대통령 부인 가운데 가장 화려한 옷차림을 즐겼고, 식기 역시 화려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이러한 취향에 맞게 이여사는 선명한 분홍빛 철쭉 무늬의 식기를 사용했다. 5공 시절 내내 대통령 식탁엔 철쭉꽃이 만발했다는 후문도 있다.
노태우 전대통령시절에는 김옥숙 여사가 디자이너를 청와대로 불러 직접 디자인을 골랐다고 한다. 김여사는 영부인중 그릇에 가장 많은 관심을 쏟은 사람으로 꼽힌다. 매사에 이순자씨와의 이미지 차별화에 고심했던 김여사는 파란 무늬의 소박한 식기를 들였다. 하지만 이 제품은 오래 가질 못했다고 한다. 김여사가 약 1년만에 다른 디자인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때 탄생한 것이 귀족풍 디자인 식기. 진한 초록 가장자리에 눈부신 금빛 테두리와 문양이 그려졌다. 이는 상류층과만 가깝고 서민들과는 동떨어진 행태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여사의 또다른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처음으로 전임자와 같은 디자인의 그릇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김 전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무렵엔 파란색 바탕에 거북이·사슴·소나무 등 십장생(十長生)을 금색으로 그려 넣은 식기류를 사용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여사는 내조하는 스타일로, 잘 나타나지 않고 조용히 대통령을 보좌했던 스타일이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도 김영삼 전대통령 때 채택된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이여사는 십장생을 그려넣은 디자인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화려하다고 생각해 특별히 다른 디자인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대통령 식기의 경우 청와대에서 몇 가지 샘플을 검토했지만 역시 십장생이 그려져 있는 김영삼 전대통령 시절 디자인을 선택했다고 한국도자기 관계자는 전했다.
한편, 한국도자기는 대한민국 청와대뿐만 아니라 로마교황청, 태국왕실, 인도네시아 대통령 궁 등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찬란했던 우리 선조들의 도예문화를 재현하고 있다.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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