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과 미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7일(현지시간) 핀란드에서 밝힌 언론관이 정가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더구나 당시 노 대통령의 ‘적대적 언론관’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의 ‘우호적 언론관’이 비교되는 바람에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언론관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가뜩이나 노 대통령은 제도언론에 대한 극도의 불신으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도 항상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다. 과거 정치인 출신 대통령들이 기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언론플레이’를 국정운영에도 적절히 활용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통령과 기자들의 관계를 추적해 본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정적 언론관을 피력하며 ‘사고’를 친 곳은 한·핀란드 정상회담을 마친 뒤에 이어진 공동기자회견 석상에서다. 외국기자들도 모여 있는 이 자리서 노 대통령은 한국의 언론이 국가의 많은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반면, 같은 장소에서 할로넨 대통령은 언론의 활발한 힘 덕분에 정부에 부패가 없다며 언론의 긍정적인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당연히 핀란드 방문을 수행했던 한국 기자들 사이에 두 사람의 대비되는 언론관이 화제가 됐다.
부패청산의 힘은 언론
공동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가 할로넨 대통령에게 질문했다. “핀란드 정부가 부패 없는 정부로 세계 1위로 평가받고 있는 숨은 비결이 무엇인가.” 할로넨 대통령이 대답했다. “부패가 없는 것은 언론의 활발한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가 늘 편안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것으로, 저희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이어서 핀란드 기자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물었다. “북한의 또 다른 도발 행위가 있을 위험성이 있는가.” 노 대통령이 답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실제 무력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발사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 무력적 위협으로 보는 언론이 더 많은 것이 문제를 더 어렵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국기자들은 두 대통령의 극단적인 언론관을 들은 뒤 회견장을 빠져 나오면서 한결같이 ‘찜찜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서 정상회담을 가진 뒤에 이어지는 공동기자회견은 대개 의례적인 자리다. 특히 한국과 핀란드 사이처럼 별다른 현안이 없는 국가간의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은 더욱 그렇다. 보통은 양국에서 두 명씩의 기자가 각각 상대방 대통령에게 질문을 한다. 질문 내용도 서로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 의전적인 자리에서 두 나라 대통령의 극단적 언론관이 표출됐으니 한국 기자들은 핀란드 기자들 보기에도 민망했을 것 같다.
노무현, 얼굴 붉히기 ‘일쑤’
사실 노 대통령의 언론, 그 중에서도 기자들에 대한 불신은 대단하다. 일선 정치인 시절부터 기자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으려고 했다. 어쩌다 한번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가 마련돼도 이런 저런 대화 도중 서로 얼굴을 붉히기 일쑤다. 대부분의 정치인이 술자리에서 기자들과 논쟁을 피하고, 간혹 자신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기자들이 있어도 절대 맞대응하지 않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2002년 대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필자를 포함한 몇몇 언론인들과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경선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는 서울 인사동의 허름한 한식집에서 반주를 겸한 저녁식사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노 후보에 비해 일부 기자들은 취기가 돌았다. 조금 술이 취한 어느 기자가 노 후보의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추진했던 과제 가운데 하나를 물고늘어지며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 분위기면 보통 정치인들은 웃어넘기거나 서둘러 자리를 파한다. 하지만 노 후보는 참지 않았다. 그 기자의 논리를 일일이 반박하다가 서로 언성을 높였다. 노 후보와 그 기자가 서로 지지 않고 맞서는 바람에 나중에는 물리적 충돌 일보직전까지 갔다. 배석한 참모들과 다른 기자들이 말려서 가까스로 사태가 수습됐지만, 노 대통령의 기자와 언론에 대한 불신의 깊이를 읽을 수 있는 한 단면이다.
노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불신은 조선일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조선일보 기자가 당시 ‘청문회 스타’로 각광을 받아 전도가 창창하던 ‘노무현 민주당 대변인’에 대해 요트와 재산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양측간의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은 이 특집시리즈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김영삼, YS장학생으로 키워
노 대통령이 취임 후 청와대 기자실을 개방해 김대중 대통령 시절까지 80여명이었던 출입기자 수를 300여명으로 늘리고, 기자들의 비서실 개별 취재를 봉쇄한 것도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기득권 박탈 차원이란 분석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기자들과 가장 사이가 좋았던 인물은 역시 김영삼 전대통령이다.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각 언론사의 일부 정치부 기자들과 일종의 ‘동맹관계’를 맺었다. 주로 영남 출신인 이들은 소위 ‘YS 장학생’으로 불렸다. YS가 수시로 모아놓고 술을 사주는 것은 물론, 두둑한 봉투까지 쥐어줬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기사로 돕는 것은 기본이고, 출입처에 나가서도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YS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했다. YS의 40년 정치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1990년대 초반 박철언 전의원과의 정치적 목숨을 건 일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언론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YS장학생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YS 장학생들은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거의 모두 ‘보상’을 받았다. 정계나 공공기관 진출을 원하면 모두 들어줬고, 언론사 잔류를 희망하면 승진과 함께 주요 보직을 받도록 도와줬다. 당시 청와대 이원종 정무수석은 언론사의 인사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힘이 있었다.
김대중, ‘소수정예 기자’ 양성
YS의 숙명의 라이벌 김대중 전대통령은 호남 출신을 중심으로 소수정예의 우호적인 언론인 집단을 관리했다. 소위 ‘동교동계 기자’들은 YS장학생들과 달리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모임도 소문이 나는 외부 보다는 주로 DJ의 동교동 자택 같은 곳에 인사를 가는 형식으로 가졌다.
그러나 그 수는 YS장학생에 비해 훨씬 적었다. 호남 출신 언론인들이 영남 출신 언론인 보다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지만 당시 분위기에서 ‘동교동계 기자’로 간주되는 것이 결코 개인에게 이롭지 않았던 까닭이다.
DJ가 김종필 전국무총리 등과 손잡고 ‘DJP 연합’을 구성해 가까스로 정권창출에 성공했을 때 청와대는 한가지 고민에 빠졌다. 전임인 YS가 경남고 졸업생을 주축으로 한 영남출신 기자들을 청와대 기자실에 포진시켜 정권홍보에 나선 것을 ‘벤치마킹’하려 했는데, 인물난에 부닥쳐버린 것이다. 그 만큼 당시 각 언론사에는 청와대에 출입할 만큼의 경륜을 갖춘 호남 출신 기자가 드물었다고 한다. 이는 YS집권 5년 동안 호남 출신이 각 언론사에서 홀대받은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결국 어느 소규모 언론사에서는 동교동과 가까운 호남 출신을 찾다가 겨우 입사 5년차 기자를 발견하고 그를 청와대 출입기자로 발령내기도 했다.(대개는 10년차 이상의 차장급 기자가 청와대를 출입한다)
기자관리 ‘당근과 채찍’
이전의 군인 출신 대통령들은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기자들을 관리했다. 이는 무엇보다 언론의 속성을 잘 모르고 기자들도 정권홍보의 도구 쯤으로 인식한데 따른 것이다.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에 내무부 장관, 민정당 대표 등을 지내면서 잠시 언론과 접해본 노태우 대통령 외에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 외의 기자들을 만나 본 적이 거의 없다.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박해 받았던 언론인들이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음으로 양으로 혜택을 본 언론인들도 적지않은 것도 당근과 채찍 정책의 결과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그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촌지는 땅이었다. 그것도 곧 개발될 지역의 노른자위 땅을 무상으로 줬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들려온다.
유제성·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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