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반전 카드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관측들이 나돌고 있지만 아직은 말 그대로 가상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노 대통령이나 청와대 핵심 참모들조차도 뚜렷한 방향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5·31 선거 참패의 후폭풍이 워낙 거세기 때문에 조금 더 관망해야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다만 노 대통령의 기본 인식은 정면돌파 쪽으로 굳어져 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그런 예측이 가능하게 한 것은 선거 당일과 다음날의 청와대 분위기다. 5·31 지방선거 당일 오후 6시 각 방송사가 ‘여당 참패’라는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청와대는 선거와 가급적 거리를 두려는 평소 모습을 그대로 보였다. 정치권의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 것이다.이에 따라 청와대 정태호 대변인은 출구 조사 결과 발표 후 출입기자들의 논평 요청에도 “최종 선거결과를 봐야 한다”며 “내일쯤 입장을 밝힐 수도 있을 것”이란 말만 했다.
‘민심의 흐름’발언, 해석 분분
노무현 대통령도 선거 당일 관저에 머물며 TV를 통해 수시로 개표 상황을 지켜봤지만 선거 결과와 관련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고 한다.하지만 선거 다음날인 6월1일 밤샘 개표 결과 여당의 참패가 그냥 참패가 아니라 표 차이가 사상 최고로 나는 등 여당으로선 처음 당한 ‘대학살’ 수준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청와대는 충격에 빠져들었다.아침부터 어수선하던 청와대에 정동영 의장이 즉각 사퇴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졌고, 정 대변인은 오전 10시에 선거 참패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 대변인이 전한 노 대통령의 입장은 다소 애매했다.노 대통령은 “민심의 흐름으로 받아들인다”면서도 “정부는 그동안 추진해온 정책과제들을 충실히 최선을 다해 이행해 나가겠다”고 밝혔다.또 열린우리당에 대해선 “위기에 처했을 때 당의 참모습이 나오는 법이고 국민들은 그 모습을 오래 기억할 것”이라며 “멀리 보고 준비하며 인내할 줄 아는 지혜와 자세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먼저, 선거 결과 확인된 ‘민심의 흐름’이 여권에 대한 이반이었는데도 “그동안 추진해 온 정책과제들을 충실히 최선을 다해 이행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않는다. 참여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중간평가가 이뤄졌다고도 볼 수 있는 선거 결과에 대한 상황인식이 너무 안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여권에서도 나올 정도였다.
‘뼈를깎는 반성없다’ 불만 토로
또 열린우리당에 대한 언급도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나 당과 청와대 동반책임론도 없이 원론적인 말만 했다. 이 역시 여권 안팎으로부터 불만을 사고 있다.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두고 레임덕을 최소화하면서 정권재창출에도 적극 관여할 수 있는 모종의 반전 카드를 준비 중임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란 해석도 내놓는다.즉, ‘선거 결과를 민심의 흐름으로 받아들이되, 정책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말을 달리 해석하면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알았으므로 민심이 참여정부의 정책기조에 호응할 수 있도록 민심을 돌려보겠다’는 의미도 된다는 것이다.여기서부터 노 대통령의 임기말에 대비한 마지막 대반전 카드를 읽으려는 다양한 예측이 나온다.우선 생각할 수 있는 카드는 열린우리당 탈당이다. 여당에선 청와대와의 동반책임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청와대는 동의하지 않는다. 후보자 선정이나 정책 개발 등 선거 초기부터 청와대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는 생각이다.따라서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당적을 떠나면 자연스럽게 동반책임론에서 분리될 수 있다. 이 카드는 또 열린우리당 일각의 입장에서도 민주당과의 재통합에 부정적인 노 대통령을 떠나 보내고 걸림돌이 제거된 상태에서 통합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퇴임후 안전판’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탈당을 전제로 ‘우·민(열린우리당+민주당)통합’에 이은 ‘우민(又民·고건 전 총리 아호)통합’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 경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가 크게 축소된 정동영 전의장의 위치를 고건 전총리가 차지하게 됨은 물론이다.이렇게 되면 탈당한 노 대통령은 당장은 정치적 힘이 약화될지 몰라도 여당의 차별화 전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데다, 통합당 내에 포진한 측근인사들로부터도 특별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보다 단기적으로는 ‘6월말 개각’ 카드가 거론된다. 청와대는 “분위기 쇄신용 개각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최근 청와대 김병준 정책실장이 전격 퇴진한 것과 맞물려 조기 개각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김 전실장은 ‘청와대에 너무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를 대고 나갔지만 그가 조만간 단행될 개각 때 경제부총리나 교육부총리로 기용되기 위해 재충전 차원에서 쉬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개각을 단행할 경우 노 대통령은 정치인 출신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청와대 출신 핵심 측근들과 관료들을 전진 배치하는 친정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외풍’에 대비할 전망이다. 특히 지금처럼 여당이 약화된 상황에서 임기말 국정운영의 동력은 공직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노 대통령의 인식이 확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들어 공무원들의 근무 자세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발언을 자주 하고 있다.
친노 직계들 뭉치고 나올듯
이와 함께 ‘연정(聯政)’의 재론 가능성을 포함한 청와대발(發) 정계개편 추진도 노 대통령이 구사할 수 있는 카드로 여전히 유용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에 대해선 지금처럼 힘이 빠진 상태에서 청와대발 정계개편이 가능하겠느냐는 견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하지만 일각에선 ‘소규모 정계개편’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는 의견도 있다. 어차피 현직 대통령인 만큼 ‘연정’의 추진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친노 직계들과 군소정당을 아우르는 형태의 소규모 정계개편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차기 대선후보들이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기과제에 해당한다.따라서 현시점에서 노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반전 카드는 ‘탈당에 의한 열린우리당과의 차별화-개각에 의한 친정체제 구축-소규모 정계개편 추진’ 이란 큰 틀에서 모색될 가능성이 높다.물론, 카드 선택 과정에서는 레임덕 방지와 정권재창출 기여라는 최대의 가치가 고려될 것이다.
레임덕 현상 가속화 예상
한편, 역대 대통령들에게는 레임덕 현상이 다양한 형태로 찾아왔다. 대부분은 지금처럼 여당의 차별화에서 시작된다. 전두환 대통령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모두 임기 막바지에 이런저런 일로 여당을 떠난데서 그런 사정을 알 수 있다.그렇게되면 자연스럽게 공무원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이 이어진다. 책임을 져야할 일은 안하려 하고, 중요한 정책 입안과 추진은 다음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어떻게든 미루려고 한다.청와대 내에서도 레임덕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다. 가령, 문민정부 이후부터의 경우지만 정권 초기에는 경호실이 비서실에 비해 청와대 내부에서 파워가 약하다. 그러나 임기말로 갈수록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한다. 경호실 직원들이야 정권에 상관없이 계속 청와대에 근무하므로 ‘텃세’가 있지만 비서실 직원들은 대개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또 어느 정권 말기 때는 대통령이 마지막 해외순방을 갔다가 귀국하는 공항에서 수행원들에 대한 세관검사가 부쩍 강화됐는데, 이를 두고 당시 동행했던 기자들은 “이것도 레임덕 현상 아니냐”고 쑤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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