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일관계 특별담화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줄기를 잡은 것으로 알려진다. 주말인 22일 오전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국무위원 재원배분회의’를 주재하고 청와대 관저로 돌아온 후 담화문 초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이 초안은 청와대 윤태영 연설기획비서관과 강원국 연설비서관의 손을 거쳐, 24일 오전 노 대통령과 이병완 비서실장, 송민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등 외교안보라인 참모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조율됐다.또 이날 오후에는 청와대 외교안보 라인과 외교통상부 핵심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최종 문안 작성 작업을 가졌고, 노 대통령은 참모들의 의견이 반영된 담화문 문안을 이날 밤 관저에서 숙독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문안을 손질했다.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번 특별담화문은 대통령의 인식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 보면 된다”며 “담화문 문안도 참모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거의 직접 써내려 간 것”이라고 전했다.
출입기자단 항시 긴장상태
노 대통령은 정제되지 않은 직설적 화법 때문에 종종 논란을 일으키곤 한다. 각종 공식행사에서도 연설비서관이 써 준 원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기 일쑤다.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 “대통령 짓 못해 먹겠다” 등의 거친 발언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노 대통령의 이런 스타일 때문에 공식행사 취재를 가는 청와대 풀 기자단은 항상 긴장해야 한다. 연설원고를 따로 받아 들고 가지만 언제 그것을 무시하고 다른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설문을 그대로 읽으면서도 표현을 바꾸기도 해 풀 기자단은 원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과거 대통령들은 김대중 대통령 정도를 제외하고 연설문 없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통령짓 못해먹겠다’ 막말 화제
청와대가 지난해 말 연설기획비서관 직제를 새로 만들어 노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잘 알려진 윤태영 비서관을 앉힌 것도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 관리를 더욱 체계적으로 강화하려는 포석이다.윤태영 연설기획비서관은 연세대 출신 386 참모의 핵심으로 청와대 대변인과 대통령 연설담당비서관을 지냈다. 항상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튀는 발언을 많이 하는 노 대통령도 그의 조언은 귀담아 듣는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윤 비서관 스스로가 노 대통령의 입맛에 맞게 연설문을 작성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노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은 거의 무한대다.윤태영 비서관 취임 이전인 지난해에도 노 대통령은 일본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발언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이에 따라 보수언론에서는 ‘나홀로 연설문’이란 이름을 붙여 노 대통령의 독선과 독단을 은근히 비판하곤 했다.
외교부도 기겁한 3·1절 기념사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하고 화해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2004년 7월 제주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재론은 없다”고 했던 말을 뒤집는 일종의 ‘폭탄 선언’에 가까웠다.당시 기념사를 들은 외교통상부는 기겁을 하고 배경 파악에 나섰다. 탐문 결과, 노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의 핵심 측근 몇 명과 상의했을 뿐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나 정동영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장과의 협의도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그해 3월23일 발표된 노 대통령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과 2004년 3·1절 기념사도 상황이 비슷했다. 대통령이 일본,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겨냥한 격한 언어를 쏟아내면 외교통상부가 뒷수습에 나서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도광양회(韜光養晦·드러내지 않고 실력과 힘을 기른다)라는 중국의 외교정책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며 “대통령의 발언에 문제는 없는지, 옳은 길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DJ는 대부분 구술 스타일
김대중 전대통령은 연설 내용을 대부분 구술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3·1절이나 광복절 같은 의례적인 행사 때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연설비서관이 써 준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 DJ는 “정치인이 원고를 읽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연설비서관 중에서 잘 알려진 인물은 고도원씨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그는 1999년 3월에 공보수석실 산하 연설담당비서관을 맡은 뒤 2003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할 때까지 연설문을 도맡아 만들었다.DJ는 각종 현안에 대해 ‘ 첫째, 둘째…’ 하는 식으로 논리적 접근을 한다. 또 지식이 해박해 참모들이 보고하는 연설문 원고를 보고 타박을 주곤 했다. 따라서 DJ의 입맛에 맞게 연설문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고 비서관은 그 자리를 오래 지켰다. 고 비서관은 퇴임 후에는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만들어 현재 회원이 165만 여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성장시켰다.
기절초풍시킨 YS의 실수
김영삼 전대통령의 대표적인 스피치 라이터는 박종웅 전의원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상도동계에서 보기 드문 전략가인 그는 특히 YS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거의 모든 연설문을 도맡아 작성했다. 또 YS가 퇴임한 후에도 ‘상도동 대변인’ 역할을 했다.YS는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의 꿈을 품고 거제도 뒷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연설 연습을 했다고 한다.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던 시절엔 웅변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2학년 때는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 2등으로 입상해 외무부 장관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정치연설’을 할 틈이 없어 참모들이 써 준 원고를 그대로 읽었는데, 이 마저도 실수를 많이 했다. 이순신 장군을 추념하는 자리에서 ‘한글 창제’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그의 스피치 라이터들은 연설이 끝날 때까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봐야 했다.
연설에도 카리스마 담긴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은 모든 연설에서 부드러움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잔잔한 어조로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하듯 연설을 해 스피치라이터들이 단어 선택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연설에도 카리스마가 묻어났다. 그러나 참모들이 써 준 연설문을 그대로 읽다가도 특유의 유머감각을 발휘하곤 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참모들이 써온 원고를 읽으면서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즉석에서 빼버리고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곤 했다.청와대의 스피치 라이터들은 모든 분야에 해박해야 할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전문적인 분야는 비서실의 해당 비서관실이나 정부 부처에서 제공한다. 따라서 이 보다는 대통령의 스타일을 잘 알고 거기에 맞는 문장을 쓸 줄 아는 것이 스피치 라이터의 첫째 요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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