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절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특보급 등 고위 참모들 사이에 일어난 권력투쟁,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비서실과 경호실의 힘겨루기 등이다.그렇지만 참여정부 들어서는 청와대 내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날 소지는 사실상 없어졌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권력을 대폭 축소시킨 마당에 다툼을 벌일 ‘파이’ 자체가 거의 없는 셈이다. 말 그대로 비서실은 국정업무 보좌에, 경호실은 대통령 신변보호에만 매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다만 주로 비서관·행정관급 사이에 일어나는 참모들의 ‘사소한’ 알력은 과거 정권 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줄어들지 않았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선 권력다툼이 없어진 대신 이런저런 알력과 갈등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갈등은 관료 출신 참모들과 정치권 출신 참모들의 대립이다. 이런 현상은 과거 정권에서도 있어 왔지만 특히 참여정부들어 심해졌다. 국가고시를 거쳐 20~30년 동안 공직생활을 한 직원과 학생운동을 하다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도운 뒤 청와대에 입성한 동급 직원의 나이 차이, 경륜 차이를 감안하면 두 그룹의 관계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또 같은 정치권 출신이라도 청와대 참모진의 핵심을 이루는 386세대와 비(非)386세대, 주류를 이루는 연세대 동문과 타대학 출신, 부산·경남 인맥과 타지역 출신 등으로 갈라져 갈등을 겪기도 한다. 심지어 학생운동 시절 같은 노선을 걸었던 참모들끼리 “우리는 OO계열”이니 하면서 따로 어울리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386 참모들끼리도 파벌화
정태인 전비서관은 ‘레디앙’ 등 여러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협상의 무리한 추진을 사례로 들며 대통령 비서실을 연일 공격하고 있다. 정 전비서관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를 서두르는 이유에 대해 “청와대가 재경부에 둘러싸여 있고 재경부는 삼성 로비에 놀아나는 집단이기 때문”이라며 “L 의원이 재경부·삼성과 착 달라붙어서 그런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최측근이 그런 짓을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누가 봐도 그가 지목한 L 의원은 이광재 의원임을 알 수 있다. 이 의원은 2002년 대선 당시 삼성으로부터 5억원을 받은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나아가 그는 “사실 386들이 운동을 했고 정의감은 있지만, 아는 것도 많지 않고 전문성도 없다”며 “로비와 압력이 다 386들을 통해 올라온다”고 폭로했다.
정 전비서관은 서울대 78학번 경제학과 출신으로, 과동기인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대학강사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야당 시절 ‘경제과외’를 하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지냈다. 당시 인수위에선 ‘정태인 논개론’이 화제가 됐는데, 이는 자신이 희생해서라도 반개혁적 인사를 쫓아내겠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던 것 같다.이후 그는 청와대에서 동북아위원회 기획조정실장으로 일하다, 국민경제자문회의 비서관을 끝으로 청와대를 떠났다. 특히 지난해 5월 행담도개발 의혹 사건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다가, 지난 2월 1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따라서 이번 ‘폭로’를 놓고 그가 업무와 연관된 일로 기소된 것이 빌미가 돼 청와대를 떠나는 과정에서 비서실을 장악하고 있던 386 참모들에게 쌓이고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게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청와대 386 참모들이 “원래 그런 사람이다. 자기 생각을 기필코 어떤 식으로든지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라는 등 냉소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청와대에서 특정 대통령을 모셨던 참모가 아무리 청와대를 떠났다고 해서 자신과 함께 일했던 참모들에게 독기 품은 비판을 가한 것은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정 전비서관은 참여정부 초기에 국정상황실장으로 있던 이광재 의원과 청와대 비서실에서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따라서 정 전 비서관의 이 의원을 비롯한 노 대통령 핵심 측근에 대한 비판은 곧 자신이 보좌했던 대통령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통령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참여정부 청와대는 최근 또다른 한 참모의 ‘변절’ 때문에 속앓이를 한 적이 있다. 청와대에서 2년반 가까이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했던 허명환 전 사회정책 행정관(3급)이 5월31일 치러지는 포항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공천을 신청한 데 따른 것이다.허 전행정관이 한나라당행을 택한 것은 순전히 당선 가능성 때문이다. 포항은 이른바 TK 정서가 지배하는 곳으로, 여당인 열린우리당 후보로는 당선이 어렵고 ‘한나라당 공천= 당선’이란 등식이 성립하는 곳이다.본인 스스로는 행정고시를 통해 정부에 들어온 직업관료인 만큼 청와대에서 근무했다고해서 현정부와 색깔이 같다고 볼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정치인 출신 참모들과는 ‘출신성분’부터 차이가 난다는 의미다. 하지만 청와대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자치단체에 내려보내는 교부금을 나눠주고, 노 대통령의 지방순시 일정을 기획하는 ‘사회정책 행정관’이란 핵심 부서에서 일하던 참모란 점에서 적잖이 당황해 하고 있다.참여정부 전반기에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에선 박기환 행정비서관(포항) 등 상당수 청와대 참모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올인 지침에 따라 사정이 어려운 곳에 출마했다가 ‘장렬히 산화’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정치권 출신이었다. 관료 출신과 정치권 출신 참모들의 사명감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사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태동 단계에서부터 핵심 참모들이 다수 떨어져 나갔다. 인수위 시절 대변인이었던 민주당 이낙연 의원처럼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분리 과정에서 등을 돌린 참모들과 민주당 노무현 대선후보의 공보특보였던 유종필 전 민주당 대변인 등이 그들이다.
유종필 전대변인도 폭로
특히 유 전대변인은 참여정부 출범 초기인 지난 2003년10월16일 민주당 대변인으로 있을 당시 몇몇 기자들을 만난 자리서 이번에 정태인 전 비서관이 그랬던 것처럼 노 대통령 386참모들의 도덕성을 강하게 비난해 화제가 됐었다. 당시 그가 한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대선 이후 12월에는 (노 후보) 참모들이 이성을 잃은 듯했다. 여기 저기서 돈벼락이 떨어지니 정신 차릴 수 있었겠느냐. 당시 마치 이참에 못 먹으면 안될 것처럼 달려들더라. 한마디로 펄펄 날아다니더라. 파도가 몰아치면 입을 다물고 있어도 짠물이 들어가는 데 입을 벌리고 있었으니 얼마나 들어갔겠느냐.”유 대변인의 말이 전해지자 대선캠프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당시 김만수 청와대 춘추관장(현 청와대 대변인)은 “(유 대변인이) 헛 것을 본 것 같다”고 했다. 또 김현미 정무2 비서관(현 국회의원)은 “짠물 한번 마셔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유 대변인은 “돈벼락 맞을 위치에 있지 않았던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더라. 진짜 측근 참모들은 아무 말도 없지 않느냐”며 물러서지 않았다.대통령의 참모들도 서로 알력과 갈등을 겪다가 처지가 달라지면 상대방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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