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고교 동문회가 중심이 되는 이 조직은 지연·학연을 중요하게 치는 우리 풍토와 맞물려 대통령 외곽조직 역할을 충실히 하곤 했다.비교적 지연·학연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참여정부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이 졸업한 부산상고 인맥의 급부상이 대표적이다. 지난 23일 한국은행 새 총재에 부산상고 출신인 이성태 부총재가 내정된 것은 ‘학맥 인사’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도 있다.가뜩이나 3월 들어서만 김장수 은행연합회 부회장(2일), 이장호 차기 부산은행장(9일) 등 부산상고 출신들이 줄줄이 중용되고 있던 참이었다. 비금융권에서도 신상우 KBO 총재 등 부산상고 인맥이 득세한 지 오래다. 이들이 조직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돕는 것은 아니지만 동문회 모임 등이 자연스럽게 대통령의 외곽조직으로 비칠 수 있다.
YS 시절엔 PK 중용
물론 대통령의 고교 인맥은 그 이전이 더 심했으면 심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목포상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이른바 ‘PK’의 주축을 이루던 경남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TK’의 성골(聖骨)이었던 경북고 등이 모두 그랬다.역대 대통령의 고교 인맥은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퍼져 한껏 위세를 떨쳤다. 기수별·직업별·지역별 모임을 수시로 가지면서 모일 때마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다. 이런 부작용으로 이들에 의한 청와대 사칭 사기 사건도 빈번했다.고교 인맥 외에 대통령 외곽조직의 원조는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득세한 ‘하나회’일 것이다.1963년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육사 11기를 주축으로 결성된 하나회는 군부세력에서 정치세력으로 변화한 대표적인 조직이며, 나중에는 두 대에 걸쳐 확고한 대통령 외곽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이후 대선 과정에서는 정당 공조직 못지 않게 사조직이 활개를 쳤고, 이들은 집권 후 곧 대통령의 외곽조직으로서 청와대 비서실 못지 않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곤 했다.
대표적인 조직이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월계수회’다. 박철언 전의원이 이끌었던 월계수회는 전성기 때 회원수가 180만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월계수회란 명칭은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해 월계관을 쓰자’는 각오에서 따왔다. 박철언 전의원이 ‘6공의 황태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대선 후 정계를 비롯해 사회 곳곳에 진출한 월계수회의 조직적 뒷받침 덕이었다.그러나 월계수회가 1988년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의 외곽조직으로 활동한 시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1990년 단행된 3당통합으로 월계수회의 버팀목이 되는 여당 내 민정계는 김영삼 대표의 민주계로부터 극심한 견제를 받았다. 당연히 월계수회의 활동범위는 좁아졌고, 조직도 축소돼 갔다.그러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한 때 월계수회의 ‘2인자’였던 강재섭 의원 등 민정계 의원들이 대거 YS진영으로 전향하는 바람에 월계수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박철언 전의원은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바 있다.
말 많았던 외곽조직 ‘월계수회’
월계수회의 빈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이 YS의 목요일 산행 모임인 ‘민주산악회’다. 1981년 YS가 결성한 민주산악회는 ‘민산’이란 약칭으로 불리면서 YS의 상도동계 중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다. 최형우·서석재·김덕룡 등 상도동의 쟁쟁한 인물들이 민산에 간여했고, 한 때 회원수가 150만명에 이르렀다.민산도 YS 집권 후에 창업 1등 공신 대접을 받았다. 청와대와 행정부·여당은 물론, 공기업에까지 민산 출신들이 속속 배치됐다. 당시 정치권에선 군 출신 대신 민산 출신들이 대거 요직을 차지하자 “등산화가 군화를 줄줄이 밀어내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그러나 민산 조직도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산 출신인 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와 날카로은 대립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분열되는 바람에 전반적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됐다.1998년 출범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에서 대통령 외곽조직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연청’이란 약칭으로 잘 알려진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였다.
연청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DJ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 주도로 결성된 뒤 1997년 대선에서 ‘DJ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 됐다.연청 출신도 김대중 대통령의 외곽조직으로 행세하면서 공기업 등의 요직에 낙하산을 타고 들어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중 연청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자 2000년에 이 조직을 민주당의 공식 기구로 편입시켜 버렸다.한가지 특이한 것은 연청 멤버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의 참여정부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연청 초대 회장과 6대 회장을 지낸 문희상 의원은 참여정부에서도 청와대 비서실장과 여당 당의장을 지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10·11대 회장을 지낸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마찬가지다.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집권 첫해 출범한 ‘인동회’(忍冬會)도 대통령의 외곽조직으로 활동했다. 인동회는 DJ가 “고초를 겪은 민주화 동지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급한 것이 계기가 돼 출범했다.DJ의 상징처럼 된 ‘인동초’(忍冬草)에서 이름을 따 왔으며, 나중에는 김영배·안동선 전의원 등 DJ 직계들이 참여하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군기를 잡았다.
‘청맥회’도 친위조직설 파다
최근 문제가 됐다가 자진해체한 참여정부의 청맥회도 노무현 대통령의 친위 외곽조직이었다는 데 별다른 이론은 없다. 이치범 환경부 장관 내정자의 ‘청맥회 회장’ 경력이 밝혀지면서 불거진 청맥회는 2개월에 한번(짝수달) 정기모임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3월 청와대와 여당 인사들이 모인 자리서 ‘당 출신 인사의 적극적인 공직 추천’을 논의한 것이 모태가 됐다는 점에서 ‘보은 인사’를 위해 만들어진 인동회와 성격이 유사하다.청맥회란 이름을 처음엔 청와대와 연결 시키는 시각도 있었지만 청맥회측은 “참여정부의 공직자로서 청렴과 분수를 지킨다는 뜻에서 모임 이름을 지었다”고 밝혔다.
자문교수단도 외곽부대로 비쳐
역대 대통령들은 이밖에도 다양한 형태의 외곽조직을 알게 모르게 가동했다. 자문교수단을 두거나, 평소 ‘관리’해 온 언론인들을 대통령이 된 후에도 따로 만나는 일 등이 모두 외곽조직 활용이라고 볼 수 있다.이 가운데 청맥회 등은 소위 ‘코드’가 맞는 인물들을 각계각층에 배치해 진솔한 여론을 수렴하고, 한편으론 어려울 때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게 일자리도 주는 차원이다.청와대의 한 핵심 참모는 참여정부 출범 초기 낙하산 인사 논란이 한창일 때 “낙하산 부대가 왜 나쁘냐. 원래 낙하산 부대의 임무가 전황이 좋지 못한 곳에 긴급 투입돼 승리를 이끌어 내는 것 아니냐”고 말한 바 있다. 즉, 공기업 등이 워낙 부패하고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개혁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을 긴급 투입해 상황을 좋게 하자는 것이란 강변이다.과거 정권도 이와 비슷한 논리로 대통령 외곽조직을 활용했지만 항상 뒤끝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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