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우리나라가 미국을 꺾은 다음 날인 15일 차기 대권 주자인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3점포를 쏘아올려 한국대표팀의 승리를 견인한 최희섭 선수에게 공개적으로 축하 전화를 걸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정 의장은 이날 서울 영등포 중앙당사 확대간부회의장에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급하게 통화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등장했고, 회의 석상에 앉아서도 바로 회의를 주재하지 않고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는데, 통화 상대방이 최희섭 선수였다. 이를 두고 야당에선 “스포츠를 이용한 이미지 정치”라고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역시 차기 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은 ‘황제 테니스’로 곤경에 처해 있기도 하다.
정동영 의장도 최희섭과 통화
이처럼 스포츠는 정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역대 대통령들도 스포츠를 국정운영에 적절히 활용했다.대통령과 스포츠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것이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소위 ‘3S’ 정책이다.전두환 대통령은 정권을 장악한 뒤 국민들 사이에 잠재된 불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기 위해 스크린(screen;영화)·스포츠(sport)·섹스(sex) 등 영문 이니셜이 S로 시작하는 것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애마부인’, ‘뽕’, ‘변강쇠’ 시리즈로 대표되는 에로 영화들이 대거 제작되고,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포르노 비디오가 유입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다.또 이번에 국민들에게 감동을 안겨 준 야구가 중흥기를 맞은 시점 역시 전두환 대통령 시절 3S 정책의 일환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부터다. 프로축구도 전두환 대통령 재임 때인 1983년 ‘슈퍼리그’란 이름으로 시작됐다.전두환 대통령은 엘리트 스포츠를 적극 지원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육군사관학교 시절 축구부 주장으로 골키퍼를 맡을 정도로 운동을 즐겼다.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중에도 수시로 태릉선수촌에 들러 국가대표 선수들을 격려했고, 실제로 경기장도 자주 찾았다. 각종 대회에서 선전한 선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식사 대접을 하면서 치하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전두환은 ‘체육대통령’
어느 날에는 청와대 요리사들을 대거 대동하고 태릉선수촌을 찾아 푸짐한 저녁파티를 열기도 했다. 당시 태릉선수촌에는 대통령 전용방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태릉선수촌을 방문할 때는 평소 그의 스타일대로 두둑한 봉투를 두고 가는 일도 잊지 않았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이 즐겨 본 것은 프로복싱과 축구였다.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 매치가 있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을 취소하면서까지 꼭 TV를 시청했다. 경기가 우리나라 선수의 승리로 끝나면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축하 메시지를 전하곤 했다.그의 ‘주특기’인 축구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각별했다. 박종환 감독이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 4강 신화를 이룩한 뒤에는 그의 절대적 후원자가 돼 수시로 청와대에서 어울렸다고 한다.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축구팀이나 대표팀 경기가 있으면 동대문운동장에 직접 나가 응원을 펼치는 모습이 TV에 자주 방영됐다.이런 그를 가리켜 당시 일각에서는 ‘체육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박정희, 엘리트스포츠 원조
전두환 대통령의 후임인 노태우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이전에 체육부 장관과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거치면서 체육행정을 이끈 경험이 있다.노태우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테니스광’이었다. 육사 생도 시절부터 만능스포츠맨이었지만 특히 테니스를 즐겼다.재임 시절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최부길씨가 사실상의 ‘개인코치’였다고 한다. 또 당시 인기가 높았던 유진선 선수도 청와대로 들어 가 노태우 대통령 가족과 어울려 테니스를 치곤 했다. 1989년 호주의 호크 총리 내외가 방한했을 때는 취미가 테니스임을 알고 청와대에서 부부가 각각 한 조를 이뤄 복식경기를 갖기도 했다.군 출신 대통령의 원조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은 우리나라의 엘리트 스포츠가 기반을 다진 시기였다. 1966년 태릉선수촌 설립이 대표적이다. 선수들에 대한 연금제가 도입된 것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6년이었다. 국민들의 기억에 선명한 장창선 선수의 세계레슬링선수권 대회 금메달 획득, 김기수 선수의 프로복싱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 등극도 모두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6년의 일이다.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독립운동가 출신 답게 스포츠 경기에서도 일본과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몇 년 간은 우리 선수의 일본 방문은 물론, 일본 선수의 우리나라 입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YS, 체육계 등안시해
1954년 최초의 축구 한·일전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서 “경기에서 지면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고 다짐한 것은 체육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다. 이 대통령은 개인적으론 야구를 즐겨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58년 한국을 찾은 메이저리그 야구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시범경기 때는 당시 서울운동장에 직접 나가 시구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노태우 대통령 다음의 ‘문민 대통령’들은 비교적 스포츠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김영삼 대통령은 “머리는 남의 것을 빌려도 몸은 빌리지 못한다”는 지론으로 등산과 조깅으로 몸을 단련시켰지만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집권 후 체육부를 문화부에 흡수시켜 문화체육부로 만들어 버린 것도 엘리트 스포츠를 비판적으로 보는 YS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태릉선수촌을 찾아 선수들을 격려한 것도 5년 재임 기간을 통틀어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직전이 유일했다.
DJ, 축전 한번 안보내
김대중 대통령의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무관심도 체육계의 원성을 샀다.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민들이 고통에 빠졌을 때 골프의 박세리 선수와 메이저 리그의 박찬호 선수가 잇단 승전보를 날려 위안을 삼았지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축전 하나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문화체육부란 명칭에서 ‘체육’을 빼고 문화부로 만든 것도 국민의 정부 시절이었다.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어떨까. 노 대통령 역시 엘리트 스포츠엔 관심을 끄고 있다시피 한다.지난 6일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이집트 국영 TV에 출연해 ‘좋아하는 스포츠와 취미’를 묻는 질문에 노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우리 한국팀이 나가서 우승을 많이 하는 스포츠는 다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옛날에 세일 보트를 좀 즐기기도 했고, 지금은 가끔 골프를 친다. 그러니까 실제 스포츠를 하는 것보다는 응원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노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 조선일보에 보도된 ‘호화 요트 소유’ 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또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골프와 관련한 여러 가지 소문이 청와대 밖에까지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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