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지역혁신박람회 주최측은 개막식 행사장에 참석한 인사들을 위해 오찬 리셉션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왜 부랴부랴 서울행을 재촉했을까.청와대측의 설명을 들으면 간단하게 이해가 된다. 오는 26일 치러지는 대구 동을 국회의원 재선거 때문이다. 이 선거에는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에 맞선 열린우리당 후보로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출마한다. 이강철 전 수석이 누구인가. 자타가 인정하는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다.따라서 노 대통령이 지역혁신박람회 참석차 대구에 내려간 차에 지역 인사들과 오찬을 하면서 선물이라도 던져준다면 단번에 ‘선거개입’ 시비가 일어날 것이 뻔했다. 굳이 선물을 주지 않더라도 지역인사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접촉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나라당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 대구의 ‘지역정서’를 자극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따라서 이를 우려한 청와대측이 식사 시간이 다 됐음에도 서둘러 서울행을 택하는 쪽으로 일정을 변경했다는 설명이다.
“문희상 의장도 안된다” 당부
그러나 사실은 청와대가 그런 일정을 잡기 전에 이강철 전 수석이 먼저 “대통령이 지역혁신박람회 개막식 참석차 대구에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일정은 일절 잡지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통령의 선거개입 시비 가능성도 그렇지만, 한나라당 일색인 대구 정서로 볼 때 대통령의 지원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전 수석이 “혼자 힘으로 선거를 치를테니, 문희상 의장을 비롯한 당 지도부도 일절 내려오지 말라”고 중앙당에 요청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YS때부터 ‘선물보따리’
이에 따라 당초 노 대통령이 지역혁신박람회 참석 후 대구·경북의 유지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대구 지하철 3호선 건설’을 약속한다는 내부 계획을 잡았지만 이를 모두 취소했다고 한다. 대신 이강철 전 수석이 현지에서 “지하철 3호선 건설과 관련해 대통령께 직보했다”며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 내년 예산에 반영키로 한 것으로 안다”고 생색을 냈다.이번에는 ‘무산’됐지만 대통령이 지방을 방문할 때는 ‘선물 보따리’를 들고 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는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정치인 대통령’ 시절부터다. 그 이전 ‘군 출신 대통령’ 시절에는 매년 초 대통령이 각 지방마다 ‘연두순시’(‘초도순시’라고도 했다)를 나가 매우 강압적인 자세로 시·도지사에게서 보고를 받고 이런저런 지시를 하면 그만이었다.
‘경호상’일정노출 금지
이런 변화를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는 지방자치제 도입이다. 과거 대통령이 임명한 시·도지사와 달리 주민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 선출된 시·도지사들을 상대로 대통령이라고 일방적인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지자제 실시 이후 대통령이 지방에 가면 민선 단체장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각종 기관장, 경제계·문화계·언론계 등 여론지도층과 오찬 등을 하면서 직접 대화하고 선물을 내놓게 된 것이다.대통령의 하루 일정은 대부분 사전에 공개된다. 그러나 이는 청와대 내부 행사에 한한다. 대통령이 대중에 노출되는 외부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엔 ‘경호상’의 문제로 일정의 사전 유출이 절대 금지된다. 특히 지방으로 행차하는 일정은 더욱 그렇다. 외부 행사 참석에 대한 언론의 사전 보도가 통제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각 지역언론의 경우 대통령이 해당 지역에 오는 것이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대구의 지하철 3호선 건설 문제 같은 민감한 지역현안이 걸려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당연히 지역언론으로선 사전 보도의 유혹을 느끼게 된다. 유혹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대통령의 지방일정을 미리 보도했다가 해당 언론사 청와대 출입기자가 청와대 홍보수석실로부터 몇 개월 간 출입을 정지당한 사례도 여러 차례 있었다.
1백명이상 인원 함께 수행
대통령이 지방에 갈 때면 강원도나 충청도 정도까지의 거리는 청와대에서 바로 뜨는 전용 헬기를 이용한다. 그러나 그 보다 먼 지역에 갈 때면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1호기’가 뜬다. 이 공군1호기는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갈 때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의 대형 비행기를 전세내 사용하는, 통상 ‘코드 원’으로 부르는 민간항공기와는 다르다. 공군 소속으로 대통령만을 위해 안전점검을 거듭하면서 대기하는 것이 ‘공군1호기’다.최근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문병호 의원이 대통령 전용기의 노후화를 지적, 교체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나서 주목을 끈 바 있다. 문 의원은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1호기는 21년째 사용되고 있다”며 “차기를 위해 노 대통령 말기에는 교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군1호기’는 1985년에 구입한 40인승, 보잉737기종이다. 국민의 정부시절에는 10만297km의 거리를 비행했고, 참여정부 들어서는 5만8천km를 비행했다고 한다. 물론, 청와대는 대통령의 지방 방문 일정을 잡으면 악천후 등으로 헬기나 비행기가 뜨지 못할 경우에 대비, 열차편이나 승용차편을 확보해 둔다. 특히 고속철도가 생긴 이후엔 대통령이 방문하는 지방으로 가는 노선의 객차 몇량이 항상 확보된다.대통령의 지방 방문에는 수행원과 경호원, 기자 등을 합쳐 보통 1백명 이상의 인원이 함께 이동한다. 따라서 대통령 전용 헬기가 뜰 때는 다른 몇 대의 수행 헬기가 함께 뜬다. 공군1호기가 이용될 때도 통상 ‘공군2호기’ ‘공군3호기’로 불리는 수송기가 함께 사용된다.
DJ, 호남에선 환대 영남에선 썰렁
대통령이 지방에 도착해 이동하면 교통이 통제되는 것은 물론이고, 경찰 오토바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중무장한 경호차량 등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눈길이 쏠리기 마련이다.그런데 역대 대통령들을 취재했던 기자 등에 따르면, 대통령 차량 행렬을 맞이하는 시민들의 반응은 도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가령 호남 출신인 김대중 대통령 시절 대통령 일행이 호남지방을 가면 사람들이 모두 발길을 멈추고, 심지어 집이나 상점 안에 있다가도 밖으로 나와 박수를 치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영남지방에 가면 사정이 달랐다. 차량행렬을 구경은 하지만 손을 흔들며 반기는 사람은 많지 않아 썰렁한 분위기를 보였다. 물론 영남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박정희, 지방행차 가장 즐겨
지방 초도순시를 가장 즐겨했던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현장 확인’의 중요성을 유달리 강조했던 박 대통령은 매년 초 중앙의 정부부처와 지방정부를 순시하면서 전년도의 실적을 보고받고, 신년도의 계획을 청취하는 일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지방순시와 관련해선 가는 곳마다 단골 음식점(혹은 요정)이 있었다는 등 수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노무현, 토론형식으로 바꿔
이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매년 지방 초도순시를 나갔다. 이 때는 물론 관선 단체장 시절이라 깍듯한 보고와 일방적인 지시 관행은 이어졌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시절엔 대통령이 연초에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를 순방하긴 했지만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다. 특히 1995년 지자제 도입 이후 지방을 방문해선 형식적으로나마 보고회를 토론 형식으로 진행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그러다 노무현 대통령들어선 꼭 연초에 지방을 순시하지 않고, 지방에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참석해 지역 인사들과 오찬이나 만찬 간담회, 또는 토론회를 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이마저도 올들어선 주춤하다. 대신 이해찬 국무총리에게 지방순회를 맡겼기 때문이다. 이해찬 총리는 지난 1월12일 부산을 시작으로 16개 시·도를 모두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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