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권력은 살아있는 권력의 희생양… 냉정한 권력속성
죽은 권력은 살아있는 권력의 희생양… 냉정한 권력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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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5-08-23 09:00
  • 승인 2005.08.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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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노태우가 나한테 말 한 마디 없이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최근 출간돼 정치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나오는 내용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6공 초기 추진된 ‘5공청산’ 과정에서 자신을 백담사로 유배시키려 하는 노태우 대통령을 겨냥해 박 전 의원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 자리엔 박 전 의원 외에 최병렬 정무수석,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 김윤환 원내총무도 동석했다. 당시 야당이 5공 비리를 문제삼아 자신을 압박하고 있음에도 친구이자 후계자인 노태우 대통령이 자신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기화로 전임 정권과의 단절을 시도하자 격분한 것이다.

<#2>“노(盧) 대통령이 나이 들어 쇠약해진 노(老) 대통령을 입원하게 만들었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이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균성 폐렴 증상으로 돌연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자 “아무리 의리 없고 배려 없는 정치판이지만 정말 너무하다”며 김 전 대통령의 입원을 노무현 대통령의 책임으로 몰고 가면서 한 말이다. 참여정부 국정원이 옛안기부의 ‘X파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불법도청이 국민의 정부 때까지 있었다”고 밝히는 바람에 DJ가 충격을 받아 건강이 악화됐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을 이은 노무현 대통령의 ‘배신’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란 뉘앙스를 은근히 풍긴다.우리 헌정사에는 ‘전직 대통령 문화’가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와는 비교된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벌이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에 헌신하는 등 미국에는 분명한 전직 대통령 문화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대통령이 퇴임만 하면 마치 칩거하듯이 조용히 지내곤 한다. 전임자는 완전히 뒤로 물러 나 앉아 전면에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동양적 사고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이 보다는 항상 새로 탄생한 정권이 전임 정권을 짓밟아 차별성을 부각시켜온 정치환경 탓이 더 크다.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8일 중앙언론사 정치부장단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서 국민의 정부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에 대해 “(DJ)정권이 책임질만한 그런 과오는 없다”고 말했다. 또 “정권의 도청과 국정원 일부 조직의 도청은 구분해 논의돼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안기부의 불법도청은 그 내용이 청와대에 보고되는 등 정권 차원에서 저질러졌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엔 국정원의 불법도청이 있었더라도 청와대가 보고를 받지 않았던 것 같으니 DJ의 책임이 아니란 의미다.

노 대통령 DJ 옹호
노 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은 참여정부 국정원이 국민의 정부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실을 공식 확인한 뒤 DJ가 입원하고, 호남 민심이 악화되는가 하면, 열린우리당의 호남 출신 의원들이 크게 동요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참여정부의 ‘결백’을 강조하려고 전임 정권까지만 불법도청이 있었다고 발표했다가 예상치 못한 반발에 직면하자 서둘러 DJ와 호남 정치권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사실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DJ의 ‘열성 팬’에 가까웠다. 그를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DJ의 영원한 숙적인 YS였지만 그는 YS보다는 DJ를 더 존경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13대 국회 때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가 14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재야에 머물던 때인 1994년 펴낸 에세이집 ‘여보, 나좀 도와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DJ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하면 나는 ‘참으로 아까운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DJ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지도자의 3대 요건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권력장악 능력’, ‘살림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내가 본 DJ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공부하는 사람, 그래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사람이다. (중략)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을 손꼽으라면 나는 DJ를 주저하지 않고 추천할 것이다.”이 책에서는 YS에 대한 평가도 나온다. “YS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탁월한 정치인’이다. 물론 그 말은 훌륭한 정치 지도자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내가 말하는 탁월한 정치인이란 말은 더 쉽게 표현하면 ‘뛰어난 두목’이란 뜻이다.(중략)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조직의 뛰어난 보스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정치지도자’라는 믿음까지는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노무현 대통령은 이처럼 자신을 정치적으로 키워준 YS보다 그 때까지는 같이 일한 적도 없던 DJ를 더 높이 쳤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론 대통령 자리까지 DJ에게서 이어받은 처지지만 그 역시 권좌에 오른 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대북송금 특검 DJ 측근 단죄
DJ가 내세우는 최대 업적 가운데 하나인 대북 햇볕정책을 사실상 승계한 평화번영정책을 표방하면서도 취임 초 대북 송금 특검을 통해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DJ의 핵심 측근들을 감옥에 보냈다. DJ가 대북 송금 문제에 대해 ‘사법심사 대상 불가’ 입장을 누차 천명했음에도 특검이 강행됐다. 이 바람에 호남 민심이 급격히 이반됐고,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전반기 ‘호남 달래기’에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김대중 전 대통령은 헌정사 50년만에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에 성공했지만 전임인 김영삼 전 대통령을 그다지 박해하지 않았다. YS가 기회 있을 때마다, 심지어 외국에 나가서 강연을 할 때도 김대중 대통령을 헐뜯고, 항상 ‘김대중씨’라고 호칭하며 깎아내렸음에도 오히려 구속돼 있던 YS의 차남 현철씨를 석방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선 “양 김씨가 서로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정치보복에 나섰다가 역공을 당해 큰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나돈다. 아울러 YS가 전직 대통령의 체통도 팽개치고 현직 대통령인 DJ에게 칼날을 세운 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책’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즉, ‘공격이 최상의 방어’란 말처럼 사사건건 DJ를 걸고 넘어져야 DJ가 “현직 대통령이 자신을 헐뜯는 YS의 입을 막기 위해 탄압을 한다”는 비판여론이 무서워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란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사실 문민정부가 끝나고 국민의 정부가 처음 들어서 서슬퍼렀던 사정작업을 벌일 때 YS 본인과 주변 인물들의 비리가 상당 부분 포착됨에 따라 DJ의 동교동계 강경파들 사이에서는 “이 참에 40년 숙적 상도동계를 쓸어버리자”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IMF 외환위기 책임을 물어 YS를 청문회에 세우자”는 의견도 내부에서 제시됐다고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동교동 출신들은 전한다.

YS, 전·노 사법처리
그러나 결과적으로 YS는 DJ에게서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철저한 자기방어 덕분인데, 이는 자신이 재임 중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는 등 전임 정권과의 단절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단행한 데 따른 학습효과라고 볼 수 있다. 1996년 문민정부는 ‘역사 바로세우기’를 강도높게 추진하면서 5·18과 12·12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두 전직 대통령을 내란음모죄, 국가반란죄등을 적용해 구속시켰다. 당시 검찰에선 그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권을 스스로 포기했는데 그 와중에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파장이 확산되자 15대 총선을 앞둔 정권에서 ‘5·18특별법’이란 소급법안을 만들어 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해 쿠데타 전력의 전직 정치인을 대거 구속 수감했다.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전직 대통령 구속의 뇌관이 된 셈인데, 박철언 전 의원이 회고록을 통해 YS가 1990년 3당통합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서 40억원 이상을 받았다고 폭로함으로써 YS 자신도 비자금의 수혜자였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또 199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도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김영삼 후보 진영으로 흘러간 돈의 액수가 천문학적이란 얘기는 정치권에서 정설처럼 돼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는 1996년 15대 총선 당시 대구 지역 언론을 통해 “아버지가 YS에게 선거자금을 쓸 만큼 줬다”, “법정에서 그 내역을 밝히는 방법도 있다”며 정권을 압박했지만 YS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갈등을 얘기할 때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노태우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강원도 백담사로 귀양보낸 일이다. 사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7년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를 나오면서 나름대로 야망이 있었다. 그 야망은 ‘상왕(上王)’으로서 국정의 큰 틀을 움직여 가겠다는 것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친구이긴 하지만 육사 시절부터 항상 자신의 뒤를 따랐고, 또 자신이 자금과 조직을 몽땅 지원해 대통령까지 만들었으므로 자신이 현직 대통령을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국가원로자문회의’이고, 자신이 의장에 앉았다.하지만 정권을 잡은 노태우 대통령은 결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취임초부터 야당에서 일제히 제기한 5공청산론을 적절히 활용해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 사퇴를 유도하고, 재산을 몰수하더니 급기야 백담사로 보내 버렸다. 전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앞에 있으면 ‘귀싸대기’라도 때릴 정도로 노태우 대통령이 미웠겠지만 그 역시 처음 정권을 잡을 때는 ‘박정희’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별화를 시도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 유신정권에 몸담았던 정치인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족들로부터도 많은 재산을 환수했다. 또 장교 시절부터 자신을 총애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은근한 라이벌 의식을 느껴 재임 당시 참모들이 유신시절을 좋게 회고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바뀌면 청와대 참모들도 80% 이상 물갈이 된다. 대를 잇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행정부에서 파견된 비서관·행정관 가운데 극소수와 의전 파트 같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부서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참모가 신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한다. 이 경우 떠나는 참모들의 속마음이 좋을 리가 없는데, 이는 곧 부실한 업무인계로 나타난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 비서실에 근무하게 된 한 동교동계 참모는 “내 전임자가 상도동계 사람이었는데 인수인계는 커녕 떠날 때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며 “사무실 집기를 살펴보니 하다 못해 자신이 사비를 들여서 산 것이라면 낡은 선풍기 한 대라도 다 가져 갔더라”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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