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갈루치[뉴시스]](/news/photo/202012/435338_352459_4449.jpg)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제네바 합의와 한국형 경수로 문제
“워싱턴에 인공기 날릴까 걱정해”
- 한국형 경수로가 없었다면 저희로서는 제네바협의를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 그렇다. 우리가 재정적인 부담을 안아야 하니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고 국민을 납득시킬 만한 대의명분도 어려웠다. 그래서 아마 이러한 경위를 통해서 우리가 경수로 건설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상당한 재정 부담을 한다는, 그리고 한국형 경수로로 건설한다고 한 거다. 구체적으로 울진 3·4호기가 한국형 경수로가 됐다.
- 실질적으로 합의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제네바합의가 맺어지면 그에 따라서 미·북 간 연락사무소도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논의도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외의 협상 내용들도 대부분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중유지원이나 경수로 관련 협상은 다른 협상에 비해서는 잘 진척됐다. 그 과정 속에서 북한은 끊임없이 경수로에 대해서 한국형이라는 용어를 지우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 한국형이라는 표현에 굉장한 반대와 거부 반응을 보였다. 사실은 그때 충격 받은 것은 이러다가는 반년 이내에 워싱턴과 평양에 연락사무소가 생겨서, 워싱턴에 인공기가 게양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심각하게 했다. 그 합의 가운데 서울에서 평양의 미국 연락사무소를 지원한다는 군수지원 합의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판문점을 통해서 미국이 자꾸만 물자 공급을 할 거 아니냐. 그에 대해서 북한군이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북한이 제일 먼저 합의사항을 깨기 시작한 거다. 그래서 워싱턴에 인공기가 날리는 일은 없어졌다. 그때는 물론 설마, 북한이 그런 재정상황에서 워싱턴에 사무소를 두겠느냐, 뉴욕대표부가 대신할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론적으로는 인공기가 워싱턴에 날릴 수 있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 경수로 공급협정을 진행하는데, 제네바합의의 연장선상이니까 우리 한국이 개입하는 건 아니고 미국과 북한이 교섭을 했다. 따라서 우린 그 회의의 진전 상황을 전부 미국을 통해서 디브리핑 받으면서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교섭 과정이 전부 격화소양이었다. 교섭 과정에서 그 전형적인 문제들이 노출됐다. 아마 기억하실 거다. 갑자기 갈루치 대사와 윈스턴 로드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 대단했던 걸로 기억한다.
▲ 미국하고 북한 간의 합의 속에 한국형 경수로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내용을 문서화하는 것을 북한 측에서 끝까지 반대했다. 그렇게 4월20일에 베를린에서 열렸던 전문가 회의는 개리 새모어 조정관과 북한 김정우가 참여했는데 결렬됐다. 그리고 4월20일이니 제네바합의 이후 6개월이라는 시일이 벌써 지난 거다. 북한이 그걸 구실로 삼아서 그럼 평양에서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은 거절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쿠알라룸푸르에서 5월12일 회의가 재개되는데, 이때는 김계관과 토마스 허바드 부차관보가 교섭 책임자로 참여했다.
그런데 6월6일 갑작스럽게 미·북 간에 합의가 되었다고 우리에게 알려온 거다. 평양방송을 통해서도 그렇게 보도됐다. 그런데 소위 KEDO에 의한 한국형 참조발전소 규정이 애매하게 증발되어버린 거다. 또 경수로 건설에 있어서 구체적인 주계약자는 한국전력공사가 되기로 했었는데, 그 규정도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계속 미국형 경수로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쿠알라룸푸르에서 미·북간에 출발선에 돌아서서 다시 교섭을 해라. 아니면 한국은 모르겠다. 이 사업에서 손 뗄 수밖에 없지 않냐? 어떻게 대통령이 1994년 8·15 연설에서 국민에게 이야기한 사항을 우리가 외면할 수가 있냐. 그럼 우리 정부의 신임도는 어떻게 되느냐 등 정치적인 이유까지 들면서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6월6일에 쿠알라룸푸르 합의가 평양방송에서도 보도되니까, 다음 날 제가 제임스 레이니 대사를 불렀다. 그때는 충분히 청와대와도 조율이 된 후의 일인데, “이번 합의문 초안은 도저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의 중심적 역할이라는 게 불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정치상 우리로서는 수용이 불가능하다. 사전 합의 없이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문제가 발표되느냐. 그러나 만약 몇 가지 조건이 반영이 된다면 재고는 하겠다”라고 했다.
그 조건은 “KEDO가 참조발전소를 선정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을 명기해라. 공급계약자의 구체적인 역할을 명기해라. 그리고 만약 이 초안의 합의가 그대로 이행된다면 미국이 북한의 위협에, 소위 핵 동결을 풀겠다든가 하는 위협에 굴복하는 나쁜 선례가 된다. 그리고 우리 견해로는 북한이 그런 위협을 하더라도 지금 여러 사정으로 봐서 핵 동결을 풀 상황은 아니다. 그러니까 미국도 좀 더 버틸 건 버티고, 밀건 밀어달라”는 조건을 이야기했다. 우리 한국이 여차하면 발을 빼겠다고 한 거다.
그러니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급하게 전화를 했다. 훗날 우리에게 전해진 것으로는, 그 대화 내용이 “공 장관과 레이니 대사간에 이야기된 한국 측 입장은 잘 알아들었다. 쿠알라룸푸르에 수정 교섭 지시를 내리겠다. 그리고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갈루치 대사와 윈스턴 로드 차관보를 급히 보내겠다”라고 했다. “미국과 북한 간의 초안에는 KEDO가 노형을 선정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기술적인 표현으로서 충분히 반영이 되어 있다”고 하고,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보장하는 내용도 충분히 들어 있다”는 식으로 미국이 설명을 했다.
미국 쪽으로서도 이 합의가 빨리 이루어져야지 대외적으로 설명도 되기 때문에 너무나 사소한 문제로 결렬할 수도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그래서 핵교섭의 책임교섭자와 지역 차관보인 윈스턴 로드를 한국으로 보냈다. 그때 전화 대화를 보면 김영삼 대통령이 우리가 유연성을 발휘했는데도 참조발전소라든가 우리 한국의 중심적 역할이라는 게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는 불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한국과 합의 없는 상황에서 북한하고 중요한 합의를 한다면 동맹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토로했다.
- 강하게 말씀하신다.
▲ 이때가 제네바합의 이후의 과정에서 제일 큰 위기였을 거다. 윈스턴 로드 차관보와 갈루치 대사가 와서 설명을 하는 데 그 초안 속에도 충분히 그러한 의미가 있다고 하는 거다. 이 초안을 읽어서 우리 언론들도 한국이 바라던 것은 그래도 충족되었다고 느낄 만큼 충분히 반영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눈에는 아무리 읽어봐도 그렇게는 안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이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대통령과 함께 오찬을 했다. 윈스턴 로드 차관보와 갈루치 대사, 그리고 레이니 대사와 우리 측 관계자가 참여해서 조찬을 하면서 수습책을 논의했다.
온라인뉴스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