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된 발언은 노 대통령이 회의에서 김영주 경제정책수석으로부터 ‘살기좋은 도시 만들기’ 계획을 보고받고는 “컨셉트를 잘 살려서 내년 지자체 선거 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지방선거와 같은 시기에 당이 전략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한 대목이다. 말하자면, 지방선거에 써먹을 수 있는 정책은 당장 발표하지 말고 잘 가지고 있다가 적절히 이용하라는 지시로, 대통령의 지방선거 개입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내용이다.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봄 국회로부터 사상 초유의 탄핵을 당한 것은 당시 ‘총선 올인’과 무관치 않았다. 17대 총선을 의식해 여당 지지 발언을 한 것이 탄핵의 빌미가 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정부에는 벌써부터 내년 지방선거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지방선거 올인’을 구상하고 있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노 대통령의 선거 개입 발언 외에도 청와대 참모진의 대거 출마설, 김두관 대통령 정무특보의 ‘지방선거 징발론’ 등이 올인 전략의 예고편으로 받아들여진다. 진보적인 학자로 꼽히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최근 “노무현 정부는 ‘선거의, 선거에 의한, 선거를 위한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비판할 만큼 참여정부의 선거 올인은 노골적이다. 심지어 강 교수는 “노 정권 자신도 기꺼이 인정하겠지만, 노 정권은 ‘올인 정권’, 아니 우리말로 ‘다걸기 정권’이며 싸움에 능하다”고 덧붙였다.
노대통령 지방선거 ‘올인’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최근 몇몇 기자와 사석에서 만나 “장관 5~6명,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참모 3~4명이 총선에 차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은밀히 들려줬다고 한다. 실제로 언론계에선 차출 대상 장관 및 청와대 참모들의 이름과 출마 지역까지 구체적으로 거명되고 있으며, 서울 여의도 정가 주변에는 이들의 명단을 적은 리스트가 돌고 있다.여권 깊숙이에서 은밀히 내려진 지방선거 총동원령에 따라 현재 출마를 검토 중인 청와대사람들은 벌써 10명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국정과제위원회에 있는 비서관(1~2급) 1명과 행정관(3급) 이하 7~8명 등이다. 이들은 대게 대도시의 구청장이나 시장·군수 등 기초단체장을 노리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지 분위기를 탐색하는 등 이미 구체적인 준비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이런 와중에 김두관 특보는 최근 지방을 순회하는 자리서 “청와대의 비서관 등 실무자들이 지방선거 채비를 하면서도 ‘11월쯤 급수를 높여 나가겠다’며 지역에 내려가지 않는다”고 ‘개탄’한 바 있다. 총동원령을 내린 입장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빨리 현장에 내려가 표밭갈이를 해 줬으면 하고 바라는데, 당사자들이 느긋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 답답하다는 말이다.
노무현 사단 총동원령
광역단체장(시·도지사)선거에 출마할 것이란 소문이 나도는 수석비서관급도 앞서 소개한대로 3~4명에 이른다. 물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다. 지난 총선 때 일부 장·차관급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 그대로 ‘징발’을 당해 김우식 비서실장(충남지사), 문재인 민정수석(부산시장), 김완기 인사수석(광주시장), 이용섭 혁신관리수석(전남지사) 등이 출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행정부의 경우 노 대통령의 돈독한 신임을 얻고 있는 진대제 정보통신부장관이 지방선거 올인의 상징적 인물로 서울시장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할 것이란 풍문이 파다하다. 대구 남구청장 출신인 이재용 환경부 장관은 아예 “대구시장선거에 출마시키기 위해 ‘경력관리’ 차원에서 환경부 장관에 발탁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다.경제부총리를 지내다 지난해 17대 총선 때 ‘올인’ 전략에 따라 경기도 수원 영통에 출마해 당선된 뒤 교육부총리가 된 김진표 부총리마저 경기지사선거를 위해 다시 징발될 것이란 얘기도 있다.
또 부산 부시장을 지낸 오거돈 해양수산부 장관은 부산시장 후보 물망에 올라 있다. 일찌감치 경남도지사선거 출마를 선언한 김두관 특보(전 행자부 장관)는 지금 ‘지방선거 총동원령’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에 앞서서도 여권의 선거 올인은 한차례 더 있을 전망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청와대 이강철 시민사회수석이다. 이 수석은 오는 10월 재·보선에서 대구 동을 출마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만류하고 있지만 본인이 지난해 총선 때 열린우리당 외부인사영입단장으로서 올인 전략을 총지휘한 만큼 자리 보전만 고집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특히 이 수석은 절친한 고향 후배인 이재용 환경장관을 발탁한 인물이므로 이 장관에게 대구시장선거에 출마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도 자신이 먼저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일각에선 대구처럼 여당이 어려운 곳에 출마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처지를 들어 ‘제 죽을 줄 알면서도 인당수에 뛰어드는 심청이’로 표현하기도 한다.
17대 총선 ‘올인’과 비슷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방선거 올인 전략은 17대 총선 올인 전략과 매우 흡사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03년 8월에 당시 청와대 이해성 홍보수석과 문학진·최도술·김만수 비서관, 백원우 행정관 등 모두 7명이 총선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이듬해 4·15 총선을 앞두고 출마지역에 이름과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추석 연휴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안한 시점 선택이었다. 최근들어 8월을 눈앞에 두고 내년 5월 지방선거에 대비해 청와대가 서둘러 ‘선거용병’ 양성에 나서고 있는 것과 연결된다.당시에도 출마 예상자로 분류됐던 인물들은 “현직에 충실할 뿐”이라며 부인하다가 막판에 “유권자의 부름에 따라”란 명분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특히 영남권에선 실제로는 여권 핵심부로부터 등을 떼밀린 경우가 많았으면서도 ‘자의’로 포장했다. 이후 그들은 대부분 ‘보은 인사’에 따라 번듯한 다른 자리를 차지했다.어쨌든 17대 총선 때도 가장 만만한 올인 카드는 청와대사람들이었다. 앞서 이해성 홍보수석 등 7명에 이어 그해 12월에는 박범계·서갑원·김현미 비서관 등이, 총선을 불과 두 달 앞둔 2004년 2월에는 문희상 비서실장·유인태 정무수석 등 총 15명이 사표를 내고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가장 외풍이 심했던 정무수석비서관실은 수석부터 비서진 전원이 총선 출마를 이유로 사퇴해야 했다. 이때 선거에 나서려고 청와대 비서실을 떠난 인물은 무려 25명에 달했다.
DJ 김중권, 김정길 출마 권유
당시 청와대에 있던 노 대통령의 386 참모는 “대선 승리는 사실 절반의 성공에 불과한 것 아니냐”며 “국회에서 입법권을 확보해야, 즉 의회정권을 쟁취해야 참여정부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은 무조건 선거에 투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노무현의 사람’들이 얼마나 급박한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는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염동연씨가 그 때 총선 출마를 꺼렸던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 정찬용 인사수석, 강금실 법무장관, 이창동 문화관광장관 등을 ‘악처’라고 지칭하며 신랄하게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다.그렇다면 대통령의 총선 올인은 노 대통령이 처음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역대 대통령들도 안정적 국정운영을 명분으로 여당의 원내 다수의석 확보를 위해 사력을 다했다. 지금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이전 대통령들은 ‘자금’을 올인하는 경우가 많았고, 노 대통령은 ‘사람’을 올인하고 있다는 것이다.국민의 정부 시절 16대 총선이 열리자 김대중 대통령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 전 의원과 김정길 정무수석을 경북 울진과 부산에 각각 여당 후보로 출마시켰지만 두 사람 다 낙선했다.
특히 영남에서 유일하게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김 전 실장에게는 막대한 선거자금을 간접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불과 10여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당시 서울에 출마한 청와대 상황실장 출신 장성민씨는 당선의 영예를 안았지만, 후에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이 상실되는 불운을 겪었다. 16대 총선에 행정부에선 김기재 행정자치장관(전국구)과 강봉균 재경장관, 남궁석 정보통신장관, 이상룡 노동장관이 나갔지만 지역구 출마자 3명 가운데 당선자는 남궁석 후보 뿐이었다. 강봉균 전 장관은 나중에 보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했다.김영삼 대통령 시절 치러진 15대 총선 때도 여당인 신한국당은 대대적인 동원령을 내렸다. 행정부에선 이홍구 국무총리(전국구)를 비롯해 홍재형 경제부총리, 김기재 총무처장관, 김용태 내무장관, 최인기 농림수산장관, 김중위 환경장관, 김성호 보건복지장관이 줄줄이 차출됐다. 특히 홍재형 전 장관은 재임 당시 금융실명제 도입을 강행하는 등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총선을 앞둔 공직자 사퇴시한 직전에 장관직에서 물러나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그는 자민련 구천서 후보에게 패배했다. 당시 청와대의 젊은 참모였던 김영춘·이성헌 비서관도 선거에 나섰지만 둘 다 낙선했다.
YS, 15대 총선 대대적 동원령
특히 YS는 이같은 인적투자 보다는 선거자금 올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었던 강삼재 전 의원은 96년 4월 총선을 위한 자금을 무려 940억원이나 YS에게 받아서 집행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결국 대통령의 선거개입, 나아가 선거 올인 논란은 역대 대통령들도 여러차례 휩싸였던 문제였던 셈이다. DJ는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야권으로부터 선거개입 논란이 일자 “미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다 허용하고 있지만, 우리는 안돼 있어 모순”이라며 “나는 대통령이자 여당의 총재로서 법에 따라 책무와 의무를 구분해서 할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YS도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야권의 공세가 계속되자 이원종 당시 정무수석을 통해 “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에서 대통령이 당적은 갖되, 선거운동을 못하게 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을 것”이라며 “대통령만 선거운동을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이전 대통령들이 여당의 총재 자격이었던데 반해, 노 대통령은 공식적으론 ‘평당원’에 불과하다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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