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에서는 요인경호용 무전기 주파수가 바뀐 사실을 알게된 국정원측에서 “청와대에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문의하는 바람에 무전기 분실 사실이 드러나게 됐다는 말도 나돌았다. 이에 대해 청와대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이에 앞서 최근 1974년 발생한 8·15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당시 육탄 방어에 나선 경호원이 관심을 끌었는데 그 주인공은 그후 20년 뒤 대통령 경호실장에 오른 박상범씨였다.10ㆍ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과 버마 아웅산묘소테러 사건 등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그는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피격하던 당시 몸을 던져 박 대통령을 보호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방송을 탔다.박 전실장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5명의 대통령을 근접 경호했으며, 국가보훈처장 등을 역임한 뒤 지금은 민주평통 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무술의 달인인 그는 한때 ‘공중부양’을 한다는 소문까지 청와대 기자실에 나돌았고, 혼자서 장정 10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었다. ‘구멍뚫린 대통령 경호실’이란 지적을 받은 사건과 ‘대통령 경호원의 신화’가 돼 있는 박 전실장의 재조명을 계기로 대통령에 대한 경호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으며, 역대 정권의 경호 스타일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를 살펴본다.“대통령 경호원이라하면 까만 양복 입고, 선글라스 끼고 폼이나 잡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매일 VIP를 대신해 죽는 연습을 한다. 가끔 경호실 직원들의 가족을 초청해 경호시범을 보일 때가 있는데, 그 자리는 울음바다가 되기 십상이다. 자기 아들이, 남편이 날아오는 총알을 대신 맞기 위해 몸을 날리는 연습을 하는데 어찌 감정이 복받치지 않겠는가.”대통령 경호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한 중간 간부의 말이다. 그의 하소연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디가드’를 미화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경호원은 위험천만한 직업이다. 하물며 국가원수를 지키는 대통령 경호원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승만 : 경무대경찰서 4·19이후 경찰관파견대
대통령 경호실은 실장과 차장 산하에 ‘1실(기획관리실), 4처(경호 1·2·3·5처) 및 종합상황실과 감사관’으로 구성돼 있다. 주요 임무는 ‘현직 대통령과 그 가족의 호위, 대통령관저의 경비’다. 또 대통령선거 당선자와 그 가족의 호위를 맡고, 본인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 퇴임 후 7년 이내의 전직 대통령과 그의 배우자 및 자녀의 호위를 맡기도 한다. 아울러 경호실장이 특히 호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국내외 요인에 대한 호위도 겸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전까지 대통령의 경호는 경찰의 몫이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경무대 경찰서’가 맡았다. 4·19 의거로 내각책임제가 시행돼 국무총리의 위상이 강화됐을 때는 경무대 경찰서마저 폐지되고 서울시경 소속의 ‘청와대 경찰관 파견대’에서 윤보선 대통령의 경호를 담당했다.
현재 대통령 경호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장군을 보호하기 위해 1961년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창설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경호대’였다. 이 경호대가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5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법률 1507호인 대통령경호실법에 의거, 정부 기구인 대통령 경호실로 거듭났다.대통령 경호실은 그동안 국가통수권자의 생명을 노리는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마다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하는 것으로 심기일전을 다짐했다. 3공화국 때의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 사건(1968년), 4공화국 때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미수 사건(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1974년)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1979년), 5공화국 때의 버마 아웅산묘소 테러 사건(1983년) 등이었다.한편, 당초 경찰의 업무였던 대통령 경호를 지금은 독립된 기구인 대통령 경호실에서 맡고 있지만 참여정부들어 경호실 창설 이후 최초로 경찰출신 경호실장(김세옥)이 들어선 것은 경찰 입장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박정희 : 경호실 첫 출범 큰사건마다 조직개편
지금까지 대통령 신변보호의 총책임을 졌던 경호실장 자리에는 모두 11명이 거쳐갔고. 현재의 김세옥 실장이 12번째다. 이 가운데 군 장성 출신이 아니었던 인물은 문민정부 시절의 박상범 실장과 김세옥 실장 뿐이다.역대 경호실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헌정 이후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초대 홍정철 실장은 경호실 출범과 함께 불과 5개월만 근무하고 바통을 박종규 실장에게 넘겨준뒤 문교부장관, 공보부장관, 문화공보부장관 등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각료 생활을 했다.항상 권총을 차고 다녀 ‘피스톨 박’으로 불렸던 박종규 실장은 이후 3·4공화국 10년3개월 동안 대통령의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나중에는 대한체육회장과 IOC 위원을 지내는 등 체육계의 거목으로 활동했다.
전두환 : 그림자 장세동 장수 후일 대통령 출마까지…
1974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피스톨 박’의 후임자가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진 궁정동 10·26 사건 현장에 있었던 차지철 실장이었다. 그는 1974년 8월 경호실장이 되기 전에 6,7,8,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4선 중진으로 외무위원장까지 지낸 인물이 청와대 경호실장에 오른 것을 ‘영전’으로 인식하던 시절이었다.최규하 대통령의 과도기에는 정동호 실장이 그 자리를 맡았으며, 그 뒤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로 입성한 인물이 장세동 경호실장이다. 육사 16기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3년7개월 동안 전두환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지키면서 충성을 다했다. 나중에 육사 1년 후배인 안현태 실장에게 자리를 내주고 안기부장을 맡았으며, 지난 16대 대통령선거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경호실장 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통령후보까지 됐던 인물인 셈이다.
노태우 : 온건파 이현우 실장 최석립 후임은 대학교수로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경호실장도 비교적 온건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청와대 사람들은 기억한다. 예비역 중장인 이현우 실장이 노 대통령과 대부분의 임기를 함께 했으며(4년7개월), 후반부 5개월 동안엔 육군 헌병감 출신인 최석립 차장이 실장으로 승진해 잔여임기를 채웠다. 최석립 전 실장은 현재 한서대학교 경호비서학과 대우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영삼 : 첫 민간 출신 박상범 군출신 김광석 실장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에는 경호실장도 처음엔 ‘문민’이 맡았다가 나중에 군 출신으로 환원됐다.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으로 기록됐던 박상범 실장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경호실에 들어가 수행계장, 수행과장, 경호처장 등 한단계씩 차근차근 올라가 마침내 대통령 경호 총책임자가 된 인물이다. YS는 임기 중·후반부 경호책임은 육사 17기로 사단장과 육군대학 총장 등을 역임한 김광석 실장에게 맡겼다.국민의 정부 때는 안주섭 실장이 임기 5년 내내 김대중 대통령을 경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도 1주일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정권을 이어 유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낳았었다. 육사 24기로 예비역 중장인 안 실장은 청와대 재임 중 바쁜 틈을 쪼개 ‘고려와 거란 전쟁사’를 연구, 명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따기도 했다.특히 안 실장은 재임 중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경호실 사격훈련장으로 초청, 사격대회를 열고 뒷풀이로 폭탄주 회식 자리를 갖는 등 격의없이 어울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대중 : 안주섭 실장, 대통령 임기내내 실장 맡아
대통령 경호실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후반기에 ‘대통령 경호위원회’라는 특별기구가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국방장관, 내무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위원을 맡았는데 위원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실질적인 권력의 2인자였던 셈이다.당시 청와대 경호부대는 탱크·장갑차는 물론 전투헬기까지 갖춘 사단 규모의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다. 특히 유사시에는 민간인 신분인 대통령 경호실장이 서울 방어 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지휘할 수 있도록 돼 있었고, 경복궁에는 친위 경호부대인 ‘30경비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경호실의 강력한 파워는 일선 경호원들의 어깨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게 했다. 가령 “어느 행사장에서 젊은 경호원이 대통령에게 악수를 하기 위해 접근하려는 모 장관을 제지하는 척하면서 옆구리를 강하게 가격했는데…. 그 이유가 일전에 부탁한 민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더라”는 식의 옛날 이야기는 청와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경호실이 그처럼 막강해진 이유를 차지철 실장의 권력욕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에 못지 않게 박정희 대통령이 말년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경호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없지 않다.대통령 경호업무만 25년 동안 해 왔고, 최근 국내 ‘경호학박사’ 1호가 된 최기남 경호부장은 “최규하 전대통령은 경호수행 절차를 무시하거나 행사시 곧잘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경호사절형’인 반면, 박정희·전두환 전대통령은 경호를 적극 활용해 자신을 과시하는 ‘경호 적극형’”이라고 분류한 바 있다.
노무현 : 탈 권위주의로 경호실 권위도 추락
참여정부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경호에 애로가 있는 곳의 방문을 굳이 고집하거나, 청와대 관람객들 앞에 불쑥 모습을 나타내는가 하면, 예고없이 비서들의 모임 장소를 찾곤해 애를 먹는다고 한다. 취임초엔 대학생 기습시위로 5·18묘지 기념행사에 참석하려다 봉변을 당했고, 청와대 경내에서 웬 할머니가 대통령이 탄 승용차 창문으로 수건뭉치를 던져 넣는 사건도 있었다.특히 참여정부 들어서는 노 대통령의 탈권위주의 노선에 따라 경호실의 힘도 많이 빠졌다. 과거 같으면 대통령 비서실과 경호실 직원들이 실무적으로 부딪쳤을 때 항상 이기는 쪽은 경호실이었다. ‘VIP의 안전 문제’라는 말 한마디면 아무런 반박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업무조정을 하면서 경호실 직원이 비서실 직원에게 면박을 당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결국 경호실의 권력은 1979년 10·26을 고비로 급전직하했다. 차지철 실장은 대통령 경호실의 막강한 권력을 스스로 만들었고, 자신이 맘껏 향유하다가 마침내 무덤으로 몽땅 가져간 셈이 돼버렸다.앞으로도 대통령 경호실이 위세를 떨치는 시대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보다는 경호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는 추세에 따라 대통령 경호도 점차 민간전문가에게 넘어가는 경향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동국대에서 ‘조선시대 시위(侍衛)제도 변천에 관한 연구’로 경찰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충수 전 대통령 경호처장(51)은 경호제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대통령 경호요원 신분 보장, 경호조직 전문성 제고 및 기능 확대, 정치적 중립화, 기법의 과학화 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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