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사실상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시나리오는 박관용 의장이 노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탄핵’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야당이 이를 선거 전략으로 이용한다는 가상이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탄핵안이 가결되지 않을 것을 상정한 시나리오다. 이 부분도 증언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청와대가 유추한 시나리오 중 하나는 박관용 의장이 여당 의원들의 저지로 의장석에 끝내 못 올라가고 중간에서 ‘노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탄핵된 것이다’라고 선언하면 그것을 야당들이 17대 총선의 이슈로 끌고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몸싸움으로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는 사람들(열린우리당)이 무슨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거냐면서 공격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곤란하다고 본 것입니다.”맞다. 야당이 탄핵안 강행 처리라는 최후의 수단을 쓰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이용했더라면, 청와대의 시나리오대로 여당은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것이다. 그런데 야당은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유가 없었다. 관 뚜껑에 못을 박지 않으면 시체가 튀어나올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판단을 흐리게 한 탓이다. 한마디로 조급증이 불러온 결과다.강용식 국회 사무총장의 증언.“사실 야당에는 이렇다할 전략가가 없었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탄핵안을 본회의에서 가결하지 않고 법사위에 넘기기만 했다면 총선 기간 내내 여당을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전략가가 없다는 주장에 한나라당의 책사(策士)라는 윤여준 의원도 동의한다.“정말 한나라당에는 전략가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저 같은 사람을 기획통이니, 전략가니, 책사라고 말했겠습니까? 듣기가 민망스러웠습니다. 한나라당에 전술에 능한 사람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안에 대해 분석하고, 종합하고, 전망하는 전략가는 없습니다.전략가가 되려면 일정 기간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열린우리당에는 운동권 시절 전략가도 있고, 선거에 관련된 프로들도 있습니다. 한나라당에는 이런 프로들이 없었습니다.”그러면서 그는 지난 대선을 예로 들었다.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여권의 단일화 때문에 졌다고 말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이회창 후보는 50만 표차로 졌는데, TV광고만 제대로 했어도 30만 표는 이쪽으로 왔을 겁니다. 그래서 전략가가 없다는 말입니다. 선거가 끝나고 민주당 관계자를 만났는데, 저를 보고 대뜸 한다는 소리가, 처음엔 겁을 먹었는데 첫날 TV광고를 보고 자신감이 생겼다면서 정말 되게 선거를 못하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윤여준 의원은, 본인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한나라당의 자타가 공인하는 전략가에 틀림없다. 정치부 기자 8년에, 공직생활 20년 중 격동의 기간 9년을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으니, 누구보다 상황 판단에 능하고, 자료를 분석, 종합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 지도부가 이런 전략가의 의견을 묵살했기 때문에 전략가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한나라당 Y의원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탄핵 강행은 안 된다, 위협만 하는 수준에서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 의총에서도 나왔지만 영남 의원들(이상배, 김종호)의 고함과 이재오, 홍준표 라인의 강경파에 휩쓸려 당 지도부가 이런 의견을 묵살했습니다.”이원창 의원은 때늦게 후회한다.“결국 야당은 탄핵이라는 전기 쇼크를 준 것인데, 그것이 (대통령을) 헐크로 만든 것입니다. 그냥 뒀더라면 식물인간이 되는 건데…”민주당의 김경재 의원도 후회막급이다.“지금 생각하면 표결까지는 가지 말고, 민주적 절차를 방해한다고만 생각이 들도록 했어야 하는 건데…”우리나라 사람들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유독 강하다. 오죽하면 최강자인 대통령이 스스로를 약자라고 했겠는가. 얼마 전 대통령은 정치적 판단을 할 때는 양심과 철학을 갖고 대의명분에 따라 하되 정 판단하기 곤란한 경우는 조금 손해 보는 쪽으로 하라는 말을 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 말도 손해 보는 사람에 대한 동정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야당은 이런 것을 몰랐다는 얘기다.
그러나 다른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홍사덕 총무.“언론이 조금만 더 정상적이었거나, 또는 언론이 비정상이라고 하더라도, 당이 단호하게 맞서서 우리의 논리를 얘기하고 올바르게 대응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당에서 겁먹은 얘기를 하니까 한마디로 기 싸움에서 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나라당이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어쨌거나 기차는 떠나 버렸다.
탄핵안에 부표를 던진 두 의원은?
다소 지엽적이긴 하지만 탄핵안 투표에 참가한 195명의 의원 중 두 사람은 부표(否票)를 던졌다. 그들이 누구일까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아무 데서도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먼저 지목되는 사람은 자민련의 김종호 의원이다. 김 의원이 부표를 던진 것으로 일찍 알려진 것은 그 자신이 부표를 던졌다고 언론에 스스로 공개한 탓이다. 김종호 의원의 배신(?)에 대해서 가장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민주당의 최명헌 의원이다.“김종호 의원은 투표 전날(11일) 자민련 대표로 유일하게 토론에 참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니까 ‘자민련은 모두 찬성으로 돌았다. 걱정할 게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종호 의원도 탄핵 찬성이라고 당에 보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투표후 신문을 보니까 탄핵에 부표를 던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신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장난이 심한 사람입니다.”그러면서 최명헌 의원은 역대 내무부 장관 출신 중 손금이 없는(?) 세 사람이 있다면서 김종호, 정종택, 강운태 의원이 그들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도 명예에 관한 문제라 인용하기가 뭣하지만 정치권에서 공공연히 흘러 다니는 얘기이니 섭섭하더라도 양해를 구한다.그렇다면 다른 한 사람은 누굴까? 민주당 인사다. 유용태 총무는 17대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된 4명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민주당 당선자 5명 중 초선이 된 이상렬 당선자는 빼고 나머지 한화갑, 김효석, 이정일, 이낙연 당선자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최명헌 의원은 두 사람을 꼽고 있다.“이낙연 의원과 박인상 의원 중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 박인상 의원은 탄핵에 극렬히 반대한 사람이어서 저는 그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낙연 의원을 지목하고 있다. 이낙연 의원을 꼽는 것은 그가 노무현 후보 대변인에 당선자 대변인을 거치면서 노 대통령과 인간적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이낙연 의원에게 청와대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의한 적이 있다. 이낙연 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 당선자가 ‘이런 말을 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또 내 제의를 거절한다고 해서 내가 섭섭하게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청와대에서 나와 함께 일하면 어떠냐, 나도 국회의원 해봤지만 그거 별거 아니더라’고 했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 이낙연 의원은 ‘아직 정치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회에 남겠다’고 노 당선자에게 완곡히 거절했다는 것이다.어쨌거나 이낙연 의원은 자신이 부표를 던진 사람으로 지목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탄핵안 발의가 부당하다고 서명을 거부한 건 사실입니다. 그 당시 당이 단합하지 않으면 깨어질 것 같아서 투표에는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균열상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전날 점심때 추미애 의원과 함께 몇 사람이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때 점심을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 투표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발의 때 서명을 안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모두 투표에는 임했습니다.”그러면서 그는 끝내 자신이 부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정치부 기자들은 대부분 이낙연 의원이 부표를 던졌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고 있다.
엄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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