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3월 12일 한나라· 민주당 새벽 기습
운명의 3월 12일 한나라· 민주당 새벽 기습
  • 엄광석 
  • 입력 2004-10-25 09:00
  • 승인 2004.10.2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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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3월 12일 새벽부터 일이 치러졌다. 의장석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의원들 속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이 쳐들어간 것이다. 의장이 사회를 볼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해 두자는 작전이었다. 시간은 새벽 3시 50분.한나라당에서는 이재오 의원이 지휘했고, 김무성 의원이 현장 총감독을 했다. 민주당에서는 유용태 총무가 지휘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여당 저지조’와 ‘의장 보호조’로 나누어 일사불란하게 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새벽의 기습, 의장석 탈환 작전
의장석을 점거 중이었던 이해찬 의원의 증언이다.“밤샘 농성 끝에 지쳐서 깜빡 새벽잠이 들었는데, 한나라당의 김무성 의원 등 20여 명이 밀어닥치면서 자고 있던 우리들을 짓밟고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1차 격돌이 벌어졌지요. 이것은 YTN에 생생히 방영됐습니다. 그렇게 돼 의장석에 여·야 의원들이 뒤섞이게 된 것입니다.”이번엔 민주당의 김경재 의원.“경호권을 발동해서 단상을 점거한 의원들을 치우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고 카메라(TV)가 없을 때 국회 경위들로 하여금 슬그머니 밀어내는 식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대 활극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용태 총무와 홍사덕 총무가 새벽에 밀어내면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나는 그때 수석 부총무실에서 바둑을 두며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연일 농성으로 지친 여당 의원들을 쉽게 치워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봅니다.”한편 박관용 의장은? 그도 공관에 가지 못하고 의장실에 갇히고 만다.

“전날(11일) 본회의장에서 의사 진행을 못하고 쫓겨나와 의장실로 갔는데, 이번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이 공관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의장실 부속실에서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런데 아침에 김근태 원내대표가 의장실에 나타났다.“아침에 일어나 보니 김근태 원내대표와 김부겸 의원이 의장실로 저를 찾아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려고 나갔는데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이 막아서서 못 만났습니다. 김근태 의원도 야당 의원들이 가로막아 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되돌아가기에 이태용 정무수석을 불러, 빨리 나가서 김근태 총무에게 무슨 일로 왔는지 전화해 달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안 와요. 그래서 아, 이 사람이 쇼를 하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김근태 원내대표는 쇼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때 의장실에 갔던 것은 두 가지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박 의장이 이번 16대를 끝으로 정치에서 은퇴한다는데, 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면 의정사에 수치로 남는다. 그래서 경호권을 발동하지 않기를 기대하며, 그것이 건전한 판단이라는 걸 얘기해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또 하나는 막상 탄핵이 강행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엄청난 재난적 상황을 맞게 된다, 민주헌정 파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두려운 상황이 온다는 것을 얘기 해주고 싶어서였습니다.”

핵 강행은 국민적 저항 불러일으킨다
김근태 원내대표의 이 말은, 앞부분에서 지적한 바 있는 ‘야당의 탄핵 강압처리는 정당성을 잃게 되고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실제로 신기남 의원도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박관용 의장의 증언이다.“강용식 사무총장이 와서 그러는데, 신기남 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끌어내지 않고는 절대로 안 나간다. 우리를 경호권을 발동해서 끌어내라. 그러면 선거에서 표를 얻는다’ 라고 말입니다.”이상의 두 증언을 합쳐보면, 경호권 발동이라는 상황을 두려워하면서도, 실제로 경호권이 발동되면 선거에서는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야당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상황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선 때 정몽준 캠프에서 나왔던 ‘트로이 목마(木馬)’라는 얘기가 또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어쨌거나 의장석을 반 점거한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이제 일이 반쯤 성사됐다고 보고 의장이 본회의장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오전 9시 2분, ‘탄핵 정국에 대해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이 발표된다.

대통령 사과문은 야당만 더 자극시켜
물론 김우식 비서실장이 대신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 사과는 오히려 야당 의원들을 더 자극시키는 결과만 초래했다.오전 10시, 본회의 개정 예정시각이었지만 국회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해찬 의원의 증언. “10시에 개회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의장이 안 들어오고 조용하길래 바람도 쐴 겸 잠시 본회의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로비에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얘기를 하는데, 의석수를 확보(탄핵안 가결에 필요한 3분지 2)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탄핵안이 가결되는구나, 하는 위기감이 엄습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11시에 행동개시다’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본회의장에 들어가 11시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11시가 되니까 의장이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이 터진 겁니다.”국회의장이 본회의장으로 들어간 것은 정확히 오전 11시 5분이다. 이때 박 의장은 국회 경위들과 일부 야당 의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본회의장에 입장한다. 그리고 정확히 ‘경호권이 아닌 경위권’을 발동한다(국회에서는 ‘질서유지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경위권(질서유지권) 발동 이유
박관용 의장의 증언.“본회의장에 들어가니 의장석에 여·야 의원들이 뒤엉켜 있어 의사 진행이 어려웠습니다. 물론 내가 질서유지권(경위권)을 발동하느냐 마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과반수가 넘는 의원들이 발의한 안건을 20∼30명이 의장 단상을 막고 있다고 해서 질서유지권도 발동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의사 진행 의지를 보이지 않는 나약한 의장 아니냐, 직무를 포기하는 의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아니냐는 고민에 빠졌습니다.의장으로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의사를 진행하고 총괄하는 일입니다.다수 의사를 존중하는 의장이 좋은 의장입니다.과거처럼 날치기해서도 안 됩니다. 의장이 당당히 의무를 수행해 마지막 직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사무총장(강용식)에게 국회 경위들을 동원해 사회를 볼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박관용 의장이 단상으로 이동하자 여·야 의원들은 극렬한 몸싸움을 시작했고, 국회 경위들은 극렬히 항의하던 여당 의원들을 단상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보게 된 박관용 의장은 잠시 주저하게 된다. 홍사덕 총무와 유용태 총무로부터, 서로 조를 짜서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하나하나 끌어낼 테니까 의장은 그저 의장석에서 의사만 진행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다시 박관용 의장의 증언.“막상 농성 의원이 국회 경위들에게 질질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니까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단상에서 내려갔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두 원내총무가 어디로 가느냐고 붙들어 잡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잠시 의사국장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때 느낀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난장판을 보니 만감이 교차됐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 일생 정치를 하면서 내가 왜 이런 일을 맞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내 책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독재권력 시절 날치기를 하고 도망쳤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여유를 갖고 진행하자고 생각했습니다.”그렇다면 여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경위권) 발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박관용 의장이 전날 분명히 경호권에 관한 언급을 했는데도 말이다.

이해찬 의원의 말.“경호권 발동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의장만 보호해 사회를 보게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또 그래서 사회를 보며 투표를 강행하면 투표 행위를 막자고 했는데, 경위들을 동원해 강제로 농성 의원들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나, 유시민, 이부영, 임채정, 천정배 의원들이 밖으로 끌려나갔습니다. 이것은 범법행위입니다. 어떻게 의원을 회의장 밖으로 끌어낸단 말입니까. 이것은 의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행위입니다. 자기들만 단독 투표한 행위로, 어거지로 하려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행태로 봐서는 국회법을 어긴 심각한 공무집행 방해입니다. 그런 무리한 과정이 TV로 중계되니까 국민들이 분개한 것입니다.”

엄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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