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탄핵, 정면 돌파론 급선회
노 대통령 탄핵, 정면 돌파론 급선회
  • 엄광석 
  • 입력 2004-09-21 09:00
  • 승인 2004.09.2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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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은 박관용 의장이 국회를 하루 쉬겠다고 선언해 여·야 모두 소강상태였다. 농성하던 열린우리당 의원들도 하나둘 의사당을 빠져나갔고 심지어는 1박 2일로 해외를 나간 의원도 있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대부분 국회에 등원하지 않고 지도부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이 날은 개회가 안 됐지만 열린우리당은 계속 농성을 했습니다. 그러나 강도는 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당 의원들 가운데는 일부 지역구에 갔다왔다 하고, 외국에 나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원도 안 됐고, 저쪽(야당)도 이완돼, 쳐들어 올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천정배 의원의 말이다.

박의장 대표회담을 제의하다
총무회담을 열어 발의를 저지시키려다 실패한 박관용 의장은 10일 낮 청와대 김우식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건다.“9일 발의가 된 뒤 10일에는 회의를 안 하겠다고 말해 이 날 하루 동안 뭔가 이뤄야겠다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낮 12시 조금 지나 청와대 김우식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 내일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한다는데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얘기하기 전에 각 당 대표를 만나도록 하라. 그것이 순리다. 사태를 풀려면 일단 만나야 한다. 오늘 저녁도 좋고 내일 아침도 좋다. 장소는 의장공관(한남동)도 좋고 청와대도 좋고 어디든 상관없다. 대통령만 나오면 된다. 그러면 내가 4당 대표를 데리고 나가겠다. 만나면 문제가 해결된다. 아무리 나쁜 대화라도 안 만나서 대화를 안 하는 것보다는 좋다’고 하면서 내 말을 꼭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가 오지 않는 거예요. 한참을 기다리다가 잠시 목욕탕에 가면서도 연락이 올지 모르니 바꿔달라고 비서에게 휴대전화까지 맡겨놓았습니다. 그런데 5시쯤 돼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비서실장이 하는 말이 대통령이 ‘나는 지금 지쳐 있다. 의장이 노력하고 있는 것은 고맙지만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아찔했습니다.”3월 10일 청와대의 공식 일정을 보면 10시 45분, 한·스웨덴 정상회담이 있었고, 12시, 두 정상은 오찬을 함께 한다. 그리고 오후 3시, 대통령 정치 특보로 임명된 문희상 씨에 대한 위촉장 수여식이 있었고, 3시 반에는 대덕지구 특구 지정 관련 국정과제 회의가 있었다. 더 이상은 없었다.

정동영 의장이 보고했다는 내용은?
그런데 이 날 저녁 8시쯤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장을 두 시간 만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때 정 의장이 건의했다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김경재 의원의 말.“발의가 되니까 청와대 쪽에서 긴장을 했겠죠. 그래서 사과의 형식에 대해 국회 차원에서 청와대 측과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청와대는 춘추관에서 하면 될 것 아니냐는 입장이었고,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도 사과를 해야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나는 일종의 세리머니(Ceremony) 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등 원로와 정당 대표 등 10여 명을 모아 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이 대화를 하다가 발표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청와대 쪽에서도 형식은 문제가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정동영 의장이 대통령을 만나 돌파하는 수밖에 길이 없다고 말했다는 겁니다.”민주당 선대본부장을 했던 박준영 전 청와대 공보수석(현 전남지사)도 정 의장이 사과 거부 정면 돌파를 건의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 의장이 사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말에 부정적이다.

천정배 의원의 말이다.“정동영 의장이 노 대통령을 만나 사과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정 의장은 당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전했을 것으로 봅니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분위기는 야권이 저렇게 나오니 상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느 정도 유감을 표명하며 정치적으로 풀어 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달에 대해서 대통령은 ‘소란스럽다고 해서 원칙을 무시해서 되느냐, 그래선 안 된다’는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정 의장이 당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봅니다.”그렇다면 정 의장이 사과 철회를 건의했다는 얘기는 8일 기자회견에서 ‘야권의 탄핵 국면 조성은 자멸의 악수로 능히 이를 돌파할 수 있다. 탄핵안을 발의하면 선거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유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헌정 질서 중단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이 야당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사실 대통령이 사과하는 경우가 생기면 열린우리당으로서는 총선에서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한편 이 말은 대통령의 탄핵 관련 사과 거부가 대통령의 오기가 아닌 열린우리당의 선거 전략이었음을 입증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대통령더러 죽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SBS 정승민 청와대 출입기자의 증언.“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누구도 그 부분(정동영 의장이 대통령과 만나 얘기했다는 내용)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있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민주당의 주장처럼 정 의장이 노 대통령에게 사과해서는 안 된다며 총선 올인을 위한 건의를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정 의장은 ‘탄핵은 부당하니 실력으로 저지하겠다. 상황은 안 좋다’라고 얘기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입니다. 이에 대통령은 실력 저지에 대해서 ‘너무 몸싸움을 하는 것은 국민들 보기에 좋지 않으니 너무 실력저지는 하지 마라. 차라리 야당이 정 표결을 하겠다고 나서면 당당히 표결에 나서는 게 어떠냐.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노무현 대통령의 이 말에는 과연 표결이 이루어지겠느냐 하는 막연한 기대도 깔려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경호권 얘기는 나오지도 않은 시점이어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대통령은 경호권이 발동되기 전에는 사실상 표결이 어렵다고 본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해찬 의원 사과 거부를 건의하다
그런데 정 의장이 어떤 건의를 했건 이미 노 대통령은 사과할 마음이 없었다는 중요한 증언이 있다. 이해찬 의원이다.“정동영 의장이 대통령을 만나 두 시간 동안 사과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사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통령과 통화할 때 사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대통령도 동의했습니다. 사과하면 탄핵을 취소하고 사과를 안 하면 탄핵안을 가결시킨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러면 야당은 대통령이 잘못을 시인했다, 굴복했다, 라고 떠들고 다닐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고 말했습니다.”이해찬 의원이라면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단일화로 압박하려는 조선일보의 보도 의지(?)를 읽고 이를 뒤집어엎기 위해 당시 노 후보에게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선(先)제의를 건의했던 사람이다.

결국 이 건의는 성공해 단일화를 이루게 한 밑거름이 됐고, 그것이 다시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일등 공신 역할을 하게 된다. 민주화 투쟁 1세대인 이해찬 의원은 정가에서는 여권의 몇 안 되는 전략가로 꼽힌다. 날카로운 이미지와 함께 두뇌 회전이 빠르다는 얘기도 듣고 있다. 국민의 정부시절 교육부장관을 맡았을 때 추진한 평준화 시책의 산물로 나타난 ‘이해찬 1세대’라는 짐을 안고 있지만, 나름대로 소신이 뚜렷하다는 평도 있다. 그런 이해찬 의원이어서인지는 모르지만 대통령과의 이번 통화에서 사과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도 노 대통령과 코드가 일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총리로 지명됐는지도 모르겠다.

노 대통령, 김근태 대표도 만나다
그런데 이 날 노 대통령은 정동영 의장만 만난 게 아니라 김근태 원내대표도 만났다. 역시 저녁때 쯤으로 김근태 총무는 기억한다.“대통령께 긴박한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탄핵은 부당하지만 탄핵은 파국을 가져온다. 대통령이 제지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파국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사과해 달라. 다만 사과해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는 있다. 그러나 탄핵은 칼이다. 탄핵을 극복해 나가는 게 대통령으로서는 어려운 결정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이 짐을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 국민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그런 면에서 보면, 정동영 의장도, 김근태 원내대표도 이해찬 의원과는 다른 것 같다.

그러면 이때 노 대통령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대통령은 ‘국민에게는 사과 하겠다. 그러나 야당에는 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고심을 하겠다. 국민에게 설명하고 사과하면 사과하는 것만 크게 보인다. 국민에게 하는 설명은 잘 안보이게 된다’면서 문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어쨌거나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농성을 하면서도 표결까지는 안 가리라고 믿었다. 천정배 의원의 증언.“농성에 들어간 뒤에도 열린우리당 내 분위기는 진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가결까지 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진짜 가결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있었지만 역시 어렵다고 보아서 그대로 놔두자, 표결하려면 하게 두자, 어차피 3분의 2가 안 돼서 부결될 테니 그래도 표결하게 하자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가능성은 낮지만, 실제로 가결이 되면 너무 심대한 결과가 초래될 테니, 통과 확률은 낮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역시 물리적으로라도 저지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입니다.”

엄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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