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와 함께 밀려온 짙은 안개 때문에 여의도 도로의 시정거리는 1㎞쯤밖에 되지 않았다. 보통 8㎞가 정상이니까 돌풍이 일어난 후의 고비사막 같았다고나 할까.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건너편 한나라당사 쪽에서 보면 정말 상여처럼 뿌옇게 보였다.초속 5m의 세찬 바람, 영상 10도 안팎의 쌀쌀한 낮 기온. 뭔가 불길한 일이 스멀스멀 진행되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은 그런 음산한 날씨였다. 3월 9일, 여의도는 그렇게 흉흉한 기운이 맴도는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그 날은 대한민국 전체가 그랬다.그때 한순간 광풍이 여의도 의사당으로 휘몰아쳤다. 겨우내 꽃망울을 잔뜩 움츠린 채로 만개를 꿈꿨던 윤중제의 벚나무 한 가지가 뚝 부러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탄핵안 전격 발의되다
오후 3시 50분, 민주당의 유용태, 한나라당의 홍사덕 의원 외 157명이 서명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대한민국 수립 57년 만에 일어난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국회는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이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열린우리당은 잇따라 의원 총회를 연다. 정신적 여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은 왜 이런 사태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지도부에 대한 성토와 함께 대책 숙의에 들어갔고, 야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발의에 서명하지 않은 의원들을 상대로 엄포와 회유를 번갈아 하면서 설득 작업을 펴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먼저 열린우리당부터 알아보자.
원내 사령탑인 김근태 원내대표의 말이다.“탄핵은 발의 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의제가 아니었습니다. 노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자는 건데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 내에서까지 반대자들이 있어 발의조차도 안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한나라당의 홍사덕 총무와도 자주 통화를 했는데 홍 총무도 ‘노 대통령을 혼내주긴 해야 되겠는데…’ 하면서 진짜 탄핵의 뉘앙스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8일 밤, ‘서명 숫자가 오버된다(과반수), 발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홍사덕 총무에 대한 배반감도 들었고,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가 이 정도밖에 안되느냐 하는 침통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을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이번엔 새 원내대표가 된 천정배 의원.“발의를 하려면 재적 의원 과반수인 137명의 서명이 필요한데, 그 숫자를 채운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어서, 실제로 발의를 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탄핵은 민주당만으로는 어림도 없고 한나라당의 공조가 있어야 하는데, 민주당 내에서조차도 탄핵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한나라당은 영남 출신의 지역주의가 필요한 사람들한테는 시도해봄직도 하겠지만 수도권 개혁파 의원들의 경우, 이것은 헌법 파괴가 분명한데, 그러면 선거(17대 총선)에서 타격이 클 것이다, 해서 반대해 발의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발의한다면서 그저 으름장만 놓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진짜 발의를 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여당 지도부의 말을 들어보면 야당 내 반대 세력 때문에 탄핵안이 발의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발의가 어려울 것이라고 본 것은 야당도 마찬가지다. 지도부가 탄핵안을 극도의 보안 속에 은밀히 추진한 까닭이다.한나라당 이원창 의원의 증언이다.“당내 소장파(남경필, 원희룡 등)들이 반대해서 발의가 안 될 줄 알았습니다. 어차피 가결되지도 않을 걸 뭐 하러 모험을 하느냐는 식이었습니다. 발의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내부적 진통과 잡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아무리 충고를 해도 마이동풍이니 발의를 해서 정신을 차리도록 해주자고 의원들이 동조한 것입니다.”이번엔 민주당 김경재 의원의 말이다.“탄핵안은 처음 발의 자체도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발의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려면 한나라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데, 저쪽의 홍사덕 총무가 표를 모아오는 바람에 된 것입니다.”그렇다면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야당의 이런 연합전선에 의한 기습 발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두 야권 지도부의 비밀스런 작전이 여·야 의원들로 하여금 탄핵안 발의 자체를 어렵다고 보게 한 원인이라는 것인데,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낌새조차 몰랐다는 것은 과하다고 할 것이다.
지금은 총리가 된 이해찬 의원의 증언을 들어보자.“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탄핵안을 발의할 것이라는 정보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야당이 가결을 못하게 되면 당 지도부가 와해되는 것이니까 위험성이 너무 크고, 또 3분의 2인 181표를 모으는 것 자체도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설혹 가결을 한다고 해도 강압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일 테니까, 그러면 정당성을 잃게 돼, 발의를 못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의총에서도 이런 얘기를 했고, 과거 동료였던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대통령 탄핵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로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된다. 이것은 쿠데타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발의를 안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한마디로 요약하면, 정보는 있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발의를 못 할 것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강압적으로 탄핵안을 처리하면 정당성을 잃게 되고, 또 그런 지적을 야당에 했다는 것은 선거와 관련해 상당히 중요한 대목으로, 이 부분은 뒤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여당이 발의를 막지 않았던 이유
그러면 여당은 발의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김근태 원내대표(총무)는 야당의 교묘한 전술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한마디로 딜레마였습니다. 정치개혁법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정치개혁법안은 밀리고 밀려 3월 9일이 마지막 시한이었는데, 의사 진행상 탄핵안 발의 보고를 한 뒤에야 정개법이 통과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탄핵안 발의를 못 하도록 막으면 정개법은 표류하게 되고, 그러면 17대 총선은 정개법에 기초한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한 것입니다. 저쪽에서 기습적으로 대응한 겁니다.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정개법을 통과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결단했습니다. 나중에 농성에 들어가면서도 심기는 매우 불편했습니다.”이상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탄핵안 발의 시점을 정한 것에서부터 야당은 두 지도부가 주도 면밀하게 탄핵안을 추진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증거는 도처에서 감지된다
한·민 탄핵 공조의 시작은?
그러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탄핵 공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에 대해서 시원스레 대답해주는 사람은 민주당의 조순형 대표다. 조순형 대표야말로 탄핵안 발의의 주도자다. 그는 신념을 갖고 탄핵안을 이끌어 나간다.“탄핵을 추진하기로 1차 결심한 것은 작년 12월 29일, 검찰의 측근 비리에 대한 수사 중간 발표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원래 검찰의 중간 수사 발표라는 것은 사실상 수사의 종결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중요 사건의 경우에는 반드시 서면으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대통령 측근 비리 사건 발표의 경우, 그렇게 중요한 사건인데도 발표문이 없이 구두로 브리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헌법상 소추 면책과 직무의 연속성 등을 고려해 공개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노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언동도 문제가 됐고, 또 측근 비리도 확인된 이상, 탄핵 사유가 된다고 본 것입니다.”그렇다. 민주당은 이때냐 저때냐, 대통령의 약점이 잡히기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노 대통령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 기회를 잡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탄핵 공조에 대한 물밑 접촉은 이때부터라고 봐야 한다.
발의 때까지 2개월이 넘는 기간이다. 이를 입증하는 증언들은 수없이 많다.먼저 민주당 이낙연 의원.“홍사덕, 유용태 라인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탄핵을 놓고 논의했던 것 같습니다. 목욕탕에서 홍사덕 총무와 자주 마주쳤는데 그때부터 ‘노 대통령으로 되겠느냐’는 말을 언뜻언뜻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저 혼내주자는 정도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됐습니다.” 민주당 최명헌 의원의 증언은 시기적으로 조 대표의 증언과 딱 맞는다.“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대미관계에 있어 여러 가지 실언을 했습니다. 일본에 가서도 실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와 얘기하다가 탄핵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최도술 측근 비리가 터졌습니다. 측근 비리와 함께 실정이 드러나면서 이대로 4∼5년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까를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최 대표도 동의하면서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맞춰 나갔습니다.”<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