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DJ 감형 조건으로 신군부 승인
레이건, DJ 감형 조건으로 신군부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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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8-12 09:00
  • 승인 2004.08.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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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김대중의 생명을 전두환 정권과 맞바꾸었나?
76년 3월, 김대중은 윤보선 전 대통령 등 재야인사와 함께 서울 명동 가톨릭 성당에서 민주 구국 선언을 공표하여 유신독제 체제를 정면에서 비판하였다.이는 유신 체제에 대한 공공연한 레지스탕스의 시작이었다. 김대중은 체포되고 징역 5년 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었으나 78년 12월 석방되었다.79년, 박 대통령 암살 사건후 서울에 짧은 봄이 찾아왔다. 정당도 매스컴도 기뻐했다. 한국은 그 자리에서 민주주의 정치로 이행할거라 착각하고, 새로운 헌법 만들기 논의에 정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정권 탈취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준비를 하였다. 정치가의 안일한 상황 인식이 파국을 부른 한 원인이다.김대중은 80년 2월 29일 공민권을 회복,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다. 김대중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운동이 군부의 개입을 부를 구실이 될지 모른다고 염려하며 학생들에게 자제를 촉구했으나 소용없었다.신군부는 5월 18일, 혼란을 이유로 계엄령을 확대하여 김대중을 체포하였다.

김대중 체포 뉴스에 격분한 광주 시민은 봉기하였다. 이 민주화 운동으로 200명에 가까운 시민이 사망하였다. 신군부는 80년 9월 군법 회의에서 김대중을 내란 음모, 반국가단체 수괴죄로 사형을 선고, 81년 1월,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이것이 확정되었다.그러나 국제 여론의 압력에 밀린 전두환 정권은 무기,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하였다.80년 1월에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김대중 감형을 조건으로 수뇌 회담 실시를 약속하였다.전 대통령은 감형 조치에 서명한 다음날 워싱턴으로 날아가 레이건과의 회담을 실현하였다. 이렇게 해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다.김대중은 청주 교도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감옥에서는 독서에 열중하였다. 김대중의 폭넓은 지식과 다수의 저술은 교도소에서의 독서 덕분이다.82년 12월 23일, 김대중은 돌연 형 집행이 정지되고 지병치료를 목적으로한 출국이 허가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대중의 도피도 미국 정부의 개입에 따른 것이다.

부산의 미국 문화공보원 방화 사건 등으로 반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신군부의 광주 사태 진압 작전을 미국이 묵인했다는 이유다. 미국은 이 반미 움직임을 염려하여 한국 정부에 김대중 석방을 요구했던 것이다.김대중은 85년 2월까지의 2년 여 동안 미국에서 사실상의 망명생활을 보냈다. 하버드대학 국제 문제연구소 객원 자격으로 체재한 2년간은 김대중에게 미국 정계와 교류를 넓히고, 지명도를 높이는 절호의 기회였다.미국의 매스컴은 종종 그를 화제로 삼았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재미 한국인 사이에서 많은 지지자를 모았다.필리핀의 야당 정치가 아키노 의원과도 친교를 맺었다. 아키노는 83년 8월에 귀국했는데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 당했다. 아키노 암살을 계기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은 국제 여론의 지탄을 받아 86년에 붕괴했다.

전라도 출신 대통령 출현하면 경상도 사람은 바다에 빠져 죽게 되고
85년 2월 12일의 총선거 나흘전인 8일 김대중은 한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하였다.제2의 아키노 사건을 염려하여 미국의 하원의원 2명과 국무성 전 인권 담당 차관보, 전 해군 제독 등 20여 명이 동행하였다.김대중 귀국의 효과는 컸다. 신민당은 선거 후 타 야당에서의 입당이 잇달아, 재적의원 103명이 되었다. 여당인 민정당의 148명과 대결할 수 있는 2대 정당 시대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여전히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87년 7월,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공민권이 회복되었다. 야당 지지표는 김대중 611만 표(27%), 김영삼 633만표(28%)로 갈려, 여당 후보 노태우의 828만 표(36%)와 큰 차이가 났다.야당의 패인은 후보 단일화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김대중은 ‘63, 67, 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는 단일화했었지만 패배하였다. 단일화하지 않아서 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투표 3주전, 버마(현 미얀마)상공에서 대한항공기가 폭파되어 추락, 범인 김현희가 체포된 사건이 유권자의 반공 알레르기를 부추겼다’고 주장한다.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88년 4월의 총선거에서 평민당은 70명(나중에 1명이 입당해 71명)을 당선시켜, 제 1야당으로 등장하였다.

여당 민정당은 125명으로 과반수(150명)에 못 미쳤다.김대중은 제2야당 총재로서 국회에 대표 연설을 하였다. 17년 만의 국회 연설이다.김대중은 광주 사태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전두환 정권의 부정부패 추궁을 요구했다. 동시에 진상을 규명해도 처벌은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소수 여당인 노 정권은 김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5공 청산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국회의 5공 청산 추궁은 89년 말까지 계속되었다.정국의 주도권을 잃은 노태우 전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당(59명), 공화당(35명)을 끌어들여 원내 다수를 회복하였다.본래 노 정권은 김대중과 합당을 모색했으나, 영·호남간 지역대립 감정의 해소가 극히 어려워 실현하지 못했다.9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804만 표를 득표. 997만 표의 김영삼 후보에게 193만표의 큰 차로 패배하였다.김대중은 그 패인을 영남 대 호남의 지역감정에서 찾았다.당시 정부 여당 간부는 ‘만일 전라도 출신의 대통령이라도 출현했다면 경상도 사람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지 않으면 안 된다’며 지역감정을 완전히 드러내는 발언을 했을 정도다.‘김대중이 용공’이라는 네거티브 선전도 이에 가세했다.

기다려온 30년
세번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다음해 1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해 클레어홀에서 6개월 간 독서와 사색에 열중하였다. 여기서도 독일 통일을 연구, 독일을 3회나 방문하여 붕괴에 시간도 안 걸린 ‘베를린 장벽’앞에 섰다.김대중은 수십 년이나 손질한 남북 3단계 통일론을 정리하고 유럽의 저명 인사와도 친분을 맺었다.정치에 대한 열망도 끊기 어려웠다. 93년 7월 그는 1년간의 유학 예정을 반년으로 중단하고 귀국했다. 정계 복귀의 발판으로 아시아 태평양 평화 재단을 창설하였다. 93년 2월에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처음엔 87%의 높은 지지율을 자랑했으나 내분이 이어져 지지율이 하락하는 가운데 94년 4월, 이회창 대표가 대통령과 대립한 끝에 사임했다.95년 3월, 여당 대표 김종필도 탈당하여 보수 신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세웠다. 격동하는 정국 속에서 김대중은 95년 9월 신정치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정계에 복귀하였다.

3김 시대의 재현이다.김대중은 9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국민회의 후보로서 조속히 입후보하였다. 여당 후보로는 이회창이 신한국당 전당 대회에서 선출되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를 불복한 이인제 최고 위원이 탈당, 국민신당을 결성, 출마하였다. 여당은 분열했다.역대 여당의 본거지인 영남 지역도 갈라졌다. 경상북도는 이회창, 경상남도는 이인제 지지로 돌아갔다. 김대중은 김종필과 제휴하고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연합이다. 연립 공약은 의원 내각제 개헌의 실현이다. 선거 바로 직전 한국 경제 위기가 표면화되었다. 한보철강 스캔들, 금융 경색(돈의 융통이 안되고 막힘)에 의한 대기업의 연쇄 부도가 이어지고, 11월에 국제 유동성 위기로 한국은 IMF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유권자는 정부 여당의 악정에 분노하였다.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1,033만 표를 득표, 이회창이 994만 표로 불과 39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을 하였다. 이인제의 득표는 493만표다.

만일 자민련과 연립하지 못하고, 반대로 여당 후보가 단일화했다면 김대중은 이기지 못했다. 아슬아슬한 승부였다.김대중은 고통 속에서도 굳은 절개로 30년을 지내고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김영삼 대통령은 스스로 문민 정부라고 호칭했다. 그에 대항하여 김대중은 자신의 정권을 ‘국민의 정부’라 이름 붙였다.김대중은 당선 다음날인 12월 19일부터 대통령직에 정식 취임하는 98년 2월 15일까지의 2개월 간 이미 사실상의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완전히 레임덕이 되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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