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대 대통령 김대중은 칠전팔기의 인생이다.박해를 견뎌내고 사선을 넘는 파란만장한 반생을 보내고 고희가 지나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해외에서는 독재 정권과 싸운 민주주의의 챔피언 김대중의 평가가 높다.2000년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였다.그러나 그에 대한 견해가 극단으로 나뉜다.햇볕 정책으로 남북 화해를 모색한 ‘이상주의자’, 기득권 세력과 싸우는 ‘혁신 세력의 리더’라는 평가가 있다.다른 쪽에서는 변화가 많은 ‘데마고그’(demagogue 선동 정치가), 권력 장악을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하는 마키아벨리스트(Machiavellist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 주의의 정치가)등의 비난도 받는다.그의 평가는 국내외에서 그 정도로 낙차가 크다.그것은 그가 겪은 정치 행로의 기복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곧 , 그와 같은 평가가 가능하게끔 행동해 온 원인 제공자로서의 모습을 지녔다는 뜻이기도 하다.김대중은 1925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배로 2시간 남짓 떨어진 섬 하의도에서 출생하였다.43년에 목포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운송업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정치를 지망하여 54년 제3대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낙선하였다. 55년에는 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젊은 웅변가로서 장면 부통령에게 총애를 받아 장면의 신파에 소속하였다.장면이 대부가 되어 가톨릭에 들어가고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다.58년 총선거에서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려고 했으나 관권이 방해하여 후보자 등록조차 할 수 없었다.59년 보궐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시고 60년 7월의 총선거에서도 낙선하였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현역 의원을 젖혀 두고 원외인 김대중을 여당 민주당 대변인으로 기용하였다. 김대중은 눈에 띄게 두각을 나타냈다.61년 5월14일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은 당선됐다. 4번째의 도전에서 결국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틀 후인 5월 16일 군사 혁명이 일어나 국회는 해산되었다. 당선의 기쁨은 불과 48시간으로 끝났다.게다가 3개월간 용공(공산주의 또는 그 정책을 용인하는 일)혐의로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다.군사 정권에 대한 김대중의 한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그럭저럭 지내던 62년 5월 한 살 연상인 이희호와 결혼하였다. 김대중은 전처와 59년에 사별, 아들 둘을 거느린 홀아비였다. 이때 이희호 여사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복지사업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신혼 10일째에 김대중은 용공 혐의에 이어 또 다시 반혁명 혐의로 1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63년 총선거에서 김대중은 고향 목포에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그의 국회 활동은 눈부셨다. 김대중의 날카로운 말에 정부 각료는 당황해했다. 김대중은 야당 제일의 웅변가로, 말솜씨뿐만 아니라 수단도 좋기로 이름을 떨쳤다.정부 여당의 입장에서는 큰 장애물일 수밖에 없었다.67년 총선거에서 정부 여당은 김대중 낙선 공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목포에 박 대통령이 직접 두 번이나 들어가 여당 후보를 응원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여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렇게 해서 3선 의원이 되면서 야당에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다.70년 9월, 야당인 신민당 전당 대회의 차기 대통령 후보 선거에서 김대중은 김영삼과 경합, 1차 투표에서는 차점이었으나 결선 투포에서 후보로 선출되었다.숙명의 라이벌이 되는 김영삼과의 대결 제1라운드다.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은 기자 회견에서 남·북 교류 등의 통일 정책, 향토 예비군 폐지, 대중이 참가하는 복지 분배 정책을 주장하였다.정부 여당은 남북 교류를 주장한 김대중을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비난했다.
쑨원·김대중 납치사건
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539만 5,000표, 박정희는 634만 2,000표를 득표 김대중은 94만 7,000표 차이로 패배하였다.정부 여당은 위기감을 느꼈다. 관권, 금권을 총동원해도 94만 7,000표의 차까지 바짝 추격 당한 것이다. 1년 후 박 정권은 유신 독재체제를 단행해 대통령 간접 선거제를 이행하였다. 김대중은 유세에서 박정희의 3선 야망을 경고했는데 그대로 된 것이다.더구나 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영남 대 호남의 지역 대립 감정이 분출되었다. 정부 여당은 박 대통령 출신지인 영남 지역 주민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야당은 경제 개발에서 뒤처진 호남 주민의 소외감과 피해자 의식을 부추겼다.그 후 30여 년 한국 정치를 부식시킨 지역 대결의 시작이었다.71년 5월 총선거에서 여당 민주공화당은 과반수(113)를 넘는 123명이 당선되었다. 야당 신민당은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65명을 훨씬 넘는 89명이 당선하였다. 야당의 대승리다. 선거 운동중 김대중은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하였다. 테러 의혹이 있지만 정부는 단순한 교통사고로 처리하였다.
72년 1월 17일, 박 정권은 유신 독재 체제를 단행하였다. 이 때 김대중은 지병 치료를 위해 동경에 체류 중이었다.73년 8월 8일에 마침내 김대중은 동경의 호텔 그랜드 팔레스에서 중앙정보부원에게 납치되어 5일 후인 8월 13일 서울의 자택 앞에서 석방되었다.납치 사건은 국제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주권을 침해당한 일본은 원상 회복(김대중의 인도)을 요구하였다.미국도 박 정권의 독재에 염려를 표명하였다.그러나 한·일 양국은 정치적인 매듭을 지었다. 미 국무성 한국과장 레이놀드는 후일, 박 정권이 뒷거래로 타나카 수상에게 오사노 켄지(대한항공 주주)를 통해 3억 엔을 헌금했다고 증언하였다.납치 사건으로 김대중은 일약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납치 사건은 박 정권의 최대의 실책이었다. 경제 개발의 업적이 지워지고 국제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 사건은 77년 전의 쑨원 납치 사건과 유사하다. 1896년 10월, 청국 공사관은 런던에 체재 중인 쑨원을 납치, 공사관에 감금하여 본국으로 강제 송환시키려 했다. 쑨원은 해외에서 반청·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금 중인 쑨원은 몰래 외부에 위급함을 알렸다. 영국 외무성과 매스컴이 사건에 개입하여 쑨원은 석방되었다. 이로써 쑨원은 일약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고, 15년 후인 신해혁명 후 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서울로 강제 연행된 김대중은 그 후 14년간 연금 생활을 강요당했다. 자택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자택을 둘러싸고 경찰관 초소가 8개나 설치되고 기동대원 200명이 상주하며 출입을 체크하였다.한일 양국은 정치적 결말은 지었으나 응어리는 남아 있었다. 일본 매스컴은 박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 정치의 분수령이 되었다. 박 정권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74년 8월 15일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박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날아오는 총탄에 맞은 대통령 부인이 사망하였다. 암살 사건으로 한일 관계는 급속히 식었다.미국에서도 반 박정희 정권 분위기가 고조되었다.미 의회는 코리아 게이트 청문회를 열어 독재 정권의 어두운 부분을 폭로하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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