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원자로 [뉴시스]](/news/photo/202012/434460_351529_4443.jpg)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제네바 합의와 한국형 경수로 문제
“우리 정부 북핵 해결 위해 5개 원칙 제시”
- 청와대에서 갑작스럽게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되셨다는 연락을 받고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또 임명 과정에 어떤 절차가 있었는지도 말씀해달라.
▲ 12월 크리스마스 다음에 정부 개각 발령이 났는데 사실은 그전에 통보를 미리 받았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11월7일에 서울에서 4강 대사회의가 있어서 정무 협의 차 불러서 들어와 있었고,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 조찬회의가 있었다. 조찬이 끝나고 나서 대통령 독대가 있었는데, 그때 김영삼 대통령이 11월에 개각이 불가피하다고 들어와야 한다고 하셨다. 발령이 나면 기자회견으로 기자들의 질문이 있을테니 미리 알려주신 거다. 그렇게 11월 초순에 내시를 받았고, 11월18일 일요일에 민단 신용상 단장과 하병옥 부단장과 같이 교외에 나갔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면서 부속실에 김상문 비서에게 연락을 하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개각을 내주에 한다고 했다. 그때 미리 이야기한 대로 준비를 하고 있으라며, 단 그때까지는 일절 이야기하면 안 된다면서 이야기하면 무효화된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인연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데, 물론 김영삼 대통령께서 외무위원에 오래 계셨기 때문에 잘 알지만, 개인적으로 가깝게 접촉한 것은 1990년 주소대사로 발령받기 이전에 모스크바사무소 소장으로 가 있을 때, 현장에서 여당 총재 자격으로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을 가깝게 접촉한 인연이 있어서다. 그게 제가 외무부장관으로 기용된 하나의 인연이 될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 김영삼 대통령이 외교의 방향성에 대해 내린 지침 같은 것이 있었나.
▲ 지금 머리에 남은 것은 없고, 그분 철학은 잘 알려져 있는 거니까. 말하자면 문민정부의 기존 방침에 따라서 외교를 전개하는데, 우선 안보에 있어서는 굳건하게 한·미 방위동맹의 기틀 위에서 우방과의 친선·협력외교를 전개한다는 기조로 외교를 전개했다.
- 특히 장관이 되시면서 구상하고 계셨던 외교의 방향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린다.
▲ 기본적으로는 우리 외교의 저변을 확대해가면서 우리 외교력, 외교망을 확충하는 일이 긴요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항상 우리가 외교가 좀 더 기민하고 유연하게 전개되는 것이 우리 국익 신장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북한핵 문제가 커다란 문제이기 때문에 안보를 어떻게 공공히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도 역시 동맹외교가 중요하다는 점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우리가 전개해오던 전 공산권 비동맹국가들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강화해가면서 우리 외교의 내실을 기한다는 생각은 계속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중국과의 관계, 더 나아가서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우리의 실질적인 국익과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외교를 견실하게 전개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힘들겠지만 우선 순서에 따라서 말해보겠다. 제가 장관으로 임명되기 꼭 두 달 전에 제네바합의, 북·미 간 기본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의 요체는 북한의 핵 활동을 동결하고 종국적으로는 북한이 가지고 있는 흑연감속원자로를 해체하고, 그 동결·해체의 대가로 200만 킬로와트의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것이 골간이다.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동결하면 그 대체 에너지를 위해서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공급한다는 내용이고, 경수로 1기가 완공될 단계에 가서는 그때까지 연 50만 톤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는데, 그 이후의 문제를 논의하는 내용들이 제네바합의의 대충 요체이다.
그래서 경수로를 짓기 위한 여러 절차 가운데 협정서명 3개월 이내에 하나는 경수로 공급에 관한 문제, 또 하나는 정치·군사·경제관계를 정상화하는 정치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전문가회의를 가져서 점차적으로는 개선하고 대사급까지 관계를 격상시킨다는, 그리고 이 합의가 서명되고 6개월 이내에 양쪽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짓는다는 등의 기준들이 세세히 규정되어 있다.
제네바합의에는 몇 가지 일정표가 규정되어 있는데, 그중에 서명 6개월 이내에 경수로 공급계약이 이루어진다. 첫 경수로가 될 때까지 중유를 대체에너지로서 공급한다. 그리고 중유는 서명 합의된 3개월 이내부터 제공된다. 흑연감속원자로는 제1차 경수로가 완성된 단계에는 해체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용 후 연료의 보관 방법에 관해서도 전문가 회의에서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런 분위기에 비추어서 남북 간에 대화도 다시 재개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합의 속에 들어 있다. 또 합의가 이루어지면 북한이 다시 NPT체제에 돌아와야 한다는 내용들이 적혀 있다.
그렇게 제네바합의가 됐고 그 결과 경수로 공급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우리로서는 가장 중요했다.
-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내는 동력의 가장 핵심이다.
▲ 네. 긴요한 역할이었다. 그래서 1993년에 이미 김영삼 대통령께서 8·15 경축사에서 북의 핵 투명성이 보장된다면 우리 한국은 경수로 건설에 참가할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다시 1994년 8·15 경축사 때도 똑같은 취지로 의사를 표명했다. 그래서 김일성 사망 이후에 시작된 미·북 간의 교섭과 관련해서 한국형 경수로를 건설한다는 조건으로 우리가 일부 재정적인 부담을 하겠다고, 사실은 중심적 역할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를 위해서 한·미·일 3국이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경수로 건설에 임하자고 했다. 그래서 경수로 건선을 위해 KEDO를 만들었다.
1994년 10월14일엔 우리 정부가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5개 원칙을 제시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 5개 원칙하에서 경수로 문제를 다루어왔다. 첫째는 북한의 핵 개발 동결 및 중지, 둘째는 전쟁 재발 방지와 대화를 통해 북핵 개발 문제를 해결했다. 셋째 남북 당사자 원칙에 따른 대화를 재개한다. 넷째는 과거·현재·미래의 핵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이러한 4개 조건을 전제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한국형 경수로를 공급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 제네바합의를 수용했던 전제조건이 한국형 경수로를 공급한다는 것이었나.
▲ 그렇다.
온라인뉴스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