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 시대를 한국인은 ‘5공’(제5공화국의 약칭) 이라 부른다.전두환 정권은 모든 면에서 박정희 정권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국가보위비상 대책위원회도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 직후 세운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손질한 작품이다. 언론 통폐합 조치도 61년에 실시한 언론 규제와 같은 발상에서 나왔다. 신당인 민주정의당을 창당하고 신군부 장교가 군복을 벗고 정계로 진출한 것도 똑같다. 일본의 경제 협력을 도입하고 경제 개발에 활용한 것도 비슷하다. 폭력단을 체포하여, 본보기로 엄중하게 처벌한 것도 마찬가지이다.전두환 정권은 박 정권 말기에 악화된 대미·대일 관계 수복에 착수했다.미국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코리아 게이트 사건으로 악화된 것만은 아니다. 박 대통령이 자주 국방 확립을 위해 추진한 핵 개발에 심하게 반발한 것이다. 전 대통령은 핵 개발을 포기했다. 대신 미국제 무기를 구입해 한국군을 현대화할 계획을 미국측에 약속하여, 미국의 지지를 되찾았다.김대중 납치 사건 후 악화된 대일 관계도 개선하였다.
한일 관계가 호전된 것에 이어, 전 대통령은 84년 9월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하였다. 나카소네 내각도 화답이라도 하듯 역사 교과서에 관한 한국측의 반발에 대해 배려, 후지오 마사유키 문부상을 경질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국내 정치에서는 어려움에 직면했다.박 정권의 불균형 경제 성장으로 인한 후유증이 80년대 초 분출되었다. 제2차 석유 파동도 겹쳤다. 80년은 정국 불안으로 경제 활동이 위축됐다. 심지어 흉작까지 겹쳐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5%로 떨어졌다.전두환은 공룡화된 재벌을 중화학 투자 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지원하는가 하면 경영난에 부딪힌 부실 기업을 정리하는 등 도끼를 휘둘러 댔다. 이 과정에서 정권과 재벌의 유착이 가속화되었다.위기는 찬스인가. 이 때 구원의 바람이 불어왔다.85년을 경계로 한국 경제는 숨을 되돌렸다. 85년 플라자 합의(뉴욕 플라자호텔에서 개최된 선진 5개국 재무 장관· 중앙 은행총재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에 의한 엔고(엔이 올라가고 달러가 내려가는것)가 그것이다.
국제 원유 가격과 국제 금리도 내려갔다. 달러가 안정되면 그에 따라 원화도 안정되게 된다. 달러가 내려가고, 원유가도 내려가고 국제 금리도 내려가는 3저의 경기는 한국의 수출 경쟁력을 향상시켰다. ‘Made in Korea’가 해외 시장에 넘쳤다. 한국 경제는 NIES(신흥 공업국)의 우등생이라며 인기를 모았다.전두환 대통령은 올림픽 개최에 착수했다. 온 국민이 총력전을 전개한 결과 81년 바덴바덴의 IOC(국제 올림픽 위원회)총회는 88년 올림픽 대회의 개최지를 서울로 선언했다. 성공이었다.80년대 후반, 한국은 일본에 못지 않은 호황 국면으로 치솟았다. 만성 적자였던 경상 수지는 86년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외채도 2백억 달러대로 감소됐다. 주가도 급등하여, 주가 평균 지수는 5년간 6배나 상승하였다.
박정권 수법 그대로 답습
경제가 호전됨에 따라, 국민들 사이에서 전두환 정권의 강권통합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어 갔다. 박정희의 개발 독재는 1인당 국민 소득 60달러대에서는 통할 수 있었지만 국민 소득 1,200달러로 발전한 시점에서는 시대착오다. 경제 발전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중산 계급을 양산시켰다. 소득 증대와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는 정비례한다. 박 대통령 암살후의 혼란으로 무엇보다 안정을 우선으로 생각해 신군부 정권의 등장을 받아들인 중산 계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지배에 반발한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권력에 얽힌 스캔들이 잦았다. 장영자 사건이라 불리는 대형 어음 사기 사건, 명성그룹과 영동 개발을 둘러싼 은행의 부정 융자 사건 등이 그것이다.대형 사고도 속출했다. 83년 9월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격추됐다.
승객과 승무원 269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같은 해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인 전두환 대통령 일행은 북한 테러리스트가 설치한 시한폭탄에 의해 부총리등 수행원 17명이 살해당하는 테러 사건도 생겼다.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자유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곤경에 빠졌다. 국제 여론도 전 정권의 민주화 의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다. 강경 조치를 취하면 시위로 인해 올림픽을 열 수 없다. 대회 중지를 염려한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대통령 선거 연기를 시사하는 서간을 보냈다. 국제 여론도 민주화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다.83년 이후, 정치 세력의 활동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다. 85년 2월 총선거는 ‘야당 신한국민주당(신민당)의 눈부신 진출’로 결말이 났다. 여당의 148의석에 대해 103의석을 차지하여 여당과 맞버티는 정세가 되었다. 86년 2월,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 장기 정권이 붕괴되고 아키노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이른바 피플 파워(국민의 힘에 의한 황색 혁명)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신민당은 김영삼, 김대중을 중심으로 원내와 원외에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을 비판하며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마침내 대통령 직접 선거제로의 개헌을 강력히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87년, 경찰 고문으로 인한 서울대 학생 박종철 사망 사건이 신문에 폭로되었다. 이것이 반정부 민주화 운동의 불에 기름을 부었다. 사태를 방관하던 중산 계급도 반정부 투쟁에 공감하며 합류하였다.정권 내부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였다. 전두환은 취임 당시부터 평화적 정권 교체를 분명히 밝혔다. 그의 평화적 정권 교체란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전두환은 후계자 선택에 고민했다. 최종적으로 육사 동기에 늘 자신의 뜻에 따랐고, 숙군 쿠데타(12·12 사태)에 휘하의 부대를 투입하여 국방부를 제압한 공로가 있는 노태우를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노태우는 내무, 체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온건파로 주목받고 있었다. 박종철 사건을 계기로 정권 내부에서 온건파가 우세해져, 노태우가 87년 6월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그러나 전두환은 개헌 논의 중지와 기존 헌법에 의한 체제 유지를 고집하였다. 정권의 경직된 자세는 민주화 운동을 더욱 부채질했다. 87년 6월 정권과 반정부 운동의 대립은 정점에 달했다. 6월 26일, 국민 평화 대행진은 전국 37개 도시에서 180만 명이 참가하는 역사상의 시민 시위 운동이 되었다. 군 수뇌부도 강경책에 반대했다. 전두환은 양보와 타협에 의해서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하였다.6월 29일,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 전진하기 위한 특별 선언’, 소위‘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 내용은 대통령 직접 선거제 실시와 언론의 자유화보장 등 사회 전반의 민주화 조치이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 직접 선거제 이행’을 결의한 것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자신감이었다. 정치 활동의 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지면 야당이 분열될 가능성을 읽었기 때문이다.‘김대중이 정치 활동을 재개하면 김영삼과 대립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야당은 분열될 것이고 대통령 후보는 단일화되지 않는다. 직선을 해도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다’고 하는 예측이다. 이것이 적중했다.6·29 민주화 선언에 이어, 87년 10월, 대통령 직접 선거제로 헌법이 개정됐다. 다음해인 88년 2월 전두환은 공약대로 7년 단임 대통령의 임기를 채우고 평화 속에서 퇴임하였다.그러나 드라마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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