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서울의 봄’ 또 다시 암흑기로
짧은 ‘서울의 봄’ 또 다시 암흑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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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5-07 09:00
  • 승인 2004.05.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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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정보부 장악
최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소신을 밝혔다.‘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 시간 안에 국민 대다수가 찬동하는 내용의 헌법을 만든다. 나는 전임자의 잔여 임기(84년까지)를 채우지 않는다. 되도록 빠른 시기에 헌법을 개정, 총선거를 실시한다’ 는 내용이었다.최 대통령은 개헌 일정에 대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국회 개헌 특별 위원회와 별도로 행정부에서도 개헌안을 검토한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야당의 반발을 샀다.헌법 개정에 1년 정도의 유예를 요구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야당인 신민당(총재 김영삼)은 진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준여당으로 전락한 공화당(총재 김종필)도 의혹은 마찬가지였다. ‘최 대통령이 그대로 눌러앉을 생각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를 뒤집어 보면,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스케줄 변경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여당과 야당은 ‘임기 4년, 1회에 한해 중임할 수 있는 대통령 직접 선거제와 국회 의원 임기도 4년으로 하는’ 개헌안을 정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비밀리에 정권 장악의 음모를 착착 진행하였다. 세간은 박 대통령 사후, 집권 여당이었던 공화당이 약해져 있어 야당 신민당과 대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강력한 여당을 세우기 위해 신당 결성이 불가피하다는 풍문이 나돌았다.계엄 사령부는 ‘어떠한 집단이라고 해도 정치 과열 현상을 일으켜, 현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무분별한 행동을 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여차하면 군의 개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최 대통령은, 80년 2월 29일 김대중, 윤보선 등 긴급 조치 위반에 연루된 야당 인사 684명을 복권 특사하였다.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소위 ‘3김’은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야당은 김영삼, 김대중 양파로 분열되었다. 여당인 공화당에서도 반김종필 세력이 당내 기풍 바로잡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학원에서도 자유화의 움직임이 가속됐다. 시위 운동도 빈발하였다. 대학생들은 군사 교련을 거부했다. 나아가 독재 정권에 비위를 맞추는 어용 교수를 규탄하는 등 떠들썩해졌다.시국이 어수선한데도 여당과 야당은 잠깐의 봄에 취해, 어쩔줄 몰랐다.

그러나 보라. 박 정권 붕괴는 야당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정권의 내분에 의한 것이다. 독재 정권 18년을 떠받쳤던 군부는 건재하고 여전히 최대 최강의 집단이다. 하긴 정치가의 착각에도 이유가 있다. 미국은 박 대통령 사후,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다. 설마 신군부가 미국에 대항, 정권을 탈취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박 정권의 경제 개발로 성장한 재계는 무엇보다 안정을 원했다. 누가 권력을 잡든, 먼저 재산과 안전을 보장해 주는 정권의 출현을 기해하였다.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 대리를 겸임했다. 중앙정보부는 국내외의 정보와 정치 공작을 담당하는 최강의 조직이다. 보안사령부는 군 수사, 보안 업무를 담당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수중에 거머쥐기 위해서는 정치 공작을 담당하는 중앙정보부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다.최 대통령은 전두환 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대리 겸임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서울의 짧은 봄
개헌 절차, 일정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야당이 심하게 대립했다. 여야당 모두 내분으로 옥신각신했다. 혼란은 계속되었다. 대학생 시위 운동이 과격화되는 가운데 , 노동 쟁의도 빈번했다.박 대통령 암살 이후, 80년 4월까지 일어난 노동 쟁의는 800건을 넘는다. 80년 4월 21일, 강원도 사북 동원 탄광의 노동 쟁의에서는 4천 명의 노동자가 회사 건물을 부수고 경찰과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이 때 어용 노조 간부에 대한 집단 린치(사적인 제재로 인한 살인 사건)도 보태졌다. 노조 간부의 아내가 양손이 묶여 기둥에 매인 광경이 크게 보도되었다. 재계는 공포에 떨었다. 시민도 큰 충격을 받았다. 방자한 자유는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올지 모른다. 정국 안정과 치안 유지가 매우 위급해졌다. 미국에서도 한국의 불안정한 정황에 불안을 느꼈다. 국내 정세가 험악한 길을 따라 가는 가운데, 최 대통령은 5월 10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방문에 나섰다. 대통령 취임 후 처음 있는 외유다.

해외 건설 붐이 들끓고 있던 중동 산유국 중에서 한국의 최대 시장이었던 사우디를 방문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 정국이 격동하는 속에서 1주일간이나 국내를 비웠다. 이는 최 대통령의 큰 실수였다.현대 건설은 사우디 고관에게 뇌물을 준 사건으로 사우디에서의 수주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이 이 금지 조치 철회를 요청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최 대통령과 현대그룹 소유주 정주영은 같은 강원도 출신이다. 현대그룹을 지원하기 위해 외유했다는 억측도 있었다. 대통령의 중동 순방중에 국내 시위는 점차 확대되었다. 시위대는 거침없이 서울도심으로 진출했다. 서울역과 서울 시청 앞 광장은 시위를 저지하는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다.학생 시위로 정국은 위기의 절정에 달했다. 최 대통령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 5월 16일 밤 귀국하였다.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국회 해산, 국가 보위 비상 기구 설치, 비상 계엄령의 전국 확대를 결의하였다.

최 대통령은 ‘헌정 중단은 불가능하다’ 며, 비상 계엄령의 전국 확대만 결재하였다(전국에 확대된 계엄령은, 5월 18일 오전 0시부터 시행). 최 대통령은 계엄령 확대 조치를 공포하면서 담화문을 발표했다.‘최근의 혼란이 더 이상 계속되면 국가의 기초가 근본적으로 위태로워질 염려가 있어, 국가와 사회 안정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질서 회복에 힘써야 할 정치가가 정부의 안정 유지 노력을 무시하고, 사회 불안과 선동을 자극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치 발전은 하등의 변화 없이 착실히 진행한다’ 는 내용이었다. 이 비상 계엄령 전국 확대를 구실로 신군부는 김대중을 비롯해, 문익환 목사, 김동길, 이영희 교수 등 반체제 지도자를 일제히 체포하였다. 이것이 광주 시민 봉기의 계기가 된 것이다.5월 20일, 신현확 총리 등 전각료는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 유혈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신내각 퇴진과 함께 서울의 짧은 봄이 끝났다.<다음호에 계속>

간병 일지 쓰는 팔순의 나날
아내의 약먹는 시간, 증세 메모지에 적어

83세인 최규하 전대통령이 치매에 걸린 부인 홍기 여사를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기 여사는 6년째 알츠하이머 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최 대통령보다 3년 연상인 홍 여사는 1916년생, 여든 일곱이다.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외부 출입을 꺼리던 최 대통령은 아내의 발병 후부터는 장거리 여행을 하지 않고 있다.홍 여사의 발병 후 최 전대통령은 자신의 건강에 더 신경을 썼다고 한다. 자신이 건강해야 아내를 잘 돌봐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최근 들어서는 최 대통령 역시 몸이 좋지 않은 상태다. 한국 노인들에게 많이 발병되는 허리와 다리가 아픈 요각통을 앓고 있다.최 전대통령은 메모지에 아내의 간병 일지도 쓰고 있다고 한다.

약 먹는 시간과 양, 증세 등 아내의 변화를 달력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만든 메모지에 적고 있다는 것이다.현재는 최 전대통령이 사비로 고용한 간병인 두 명이 24시간 홍 여사를 돌보고 있지만 몸이 불편해지기 전까지는 최 대통령이 직접 홍 여사의 약도 챙겨 주고 음식을 먹여주는 일까지 했다 한다. 홍 여사는 지난해 연말까지 총 6회에 걸쳐 350여일 간 병원에 입원했다. 최 전대통령은 홍 여사가 입원한 350여 일 동안 면회가 안 되는 중환자실에 있을 때만 빼고는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아내의 병실을 찾았다.최 대통령 부부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곁에서 보기에 두 분은 서로 살갑게 말은 안 해도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사랑이 넘쳐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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