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 DJ 납치, 현대사의 오욕
중앙정보부 DJ 납치, 현대사의 오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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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4-08 09:00
  • 승인 2004.04.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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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징후 반정부 운동
유신 독재 아래에서의 시국은 시작부터 좌절의 국면에 빠져 들었다.73년 말, 제 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 세계적 불황이 시작되었다. 고도성장을 계속해 온 한국 경제는 침체되었다.석유 파동으로 한국은 외채 위기에 직면하였다. 박 정권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기반은 경제 발전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재야 세력과 대학생, 종교인의 활동은 드세졌다. 박 정권은 계속해서 긴급 조치를 발동했다. 반정부 분자를 체포하고 비상 군법 회의에서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저항 운동은 그에 굴하지 않고 강해졌다.해외에서도 김대중이 앞장선 반정부 운동 역시 활발해졌다.

73년 8월 8일 동경의 호텔 그랜드 팔레스에서 김대중이 중앙 정보부원에게 납치되었고 닷새 후에 서울 자택 앞에서 눈이 가려진채 석방되었다. 김대중의 납치 사건으로 밀월 관계에 있던 한일 양국 관계를 단번에 악화시켰다. 원래 일본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에게 호의적이었다. 키사 노부스케, 시이나 에츠사부로 등 자민당 거물과 전 대본영(大本塋:전시에 천황 밑에 있던 최고 통수 기관) 참모 세지마리 류조는 만주에서 함께 근무했던 인연이 있다. 이들은 같은 만주에서 귀국했고 같은 일본군출신인 박정희를 지지했다. 한일 협력 위원회까지 만들어 박정희를 지원하였다. 우익의 사상적 지도자 야쓰오카 마사노리도 박 정권 나라 세우기에 공감하였다.

그와 반대로 일본의 진보적 문화인은 이전부터 북한의 후원자로서, 박 정권을 매도해오고 있었다. 일본의 보수 세력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본의 주권 침해라며 분개하였다. 그러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주권 침해라면 한국을 합병한 일본 쪽이 주권을 더욱 침해한 게 아니냐’ 고 반론하였다.결국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 정권과 다나카 가쿠에이내각의 뒷거래로 정치적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박 정권은 ‘(김대중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는 약속을 파기하고 김대중을 수감하였다. 일본 매스컴은 박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문세광, 대통령 저격 육여사 서거 - 반일 극대화
74년 8월 15일 독립 기념식 행사장에서 재일 한국인 청년 문세광에 의한 박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육영수 여사가 날아온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범인이 사용한 권총은 일본 경찰에서 훔친 것이다. 한국 정부는 격노하였다. 정부는 납치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서 몹시 비난받은 반사 작용으로 반일 감정이 쌓여 있던 때였다. 군중은 주한 일본 대사관에 난입하여 일장기를 태워 버렸다.‘김대중 납치 사건-일본 내에서 일본 주권 침해 여론 - 반한감정 고조’ 에 이은, ‘문세광의 일본 경찰에서 총기 절도-박 대통령 암살 미수-육 여사 서거-반일 감정 극대화’ 라는 형세가 맞물리면서 한일 관계는 완전히 식어 버렸다.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유신 독재에 대한 미국의 반감을 돌리고 주한 미군 삭감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면으로까지 사태가 전개되었다. 박 정권은 재미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의 여론을 달래고 국회와 행정부 관리의 매수를 도모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후에 일어나 이 스캔들은 ‘코리아게이트’라 불렸다. 한미 관계는 더욱 험악하게 되었다.

미국 상원의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관한 청문회에서, 삼선 개헌 당시의 중앙정보부장이며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이 박 정권의 치부를 모조리 털어놓아 충격을 던졌다.미국은 ‘주한 미군 철수’를 박 정권에 대한 압박용 ‘무기’ 로 활용했다. 이에 박정희는 자주 국방에 대한 집념을 불살랐다. 그는 극비로 미사일과 핵 개발을 추진하였다. 미국은 격노했다. 미국은 약소국의 핵 보유와 확산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간섭으로 핵 개발은 중단되었다. 박 정권에 대한 미국의 의심은 점점 더 깊어졌다.국내에서 박 정권을 떠받치던 군부에서도 이상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 측근간에도 권력 투쟁이 노골화되었다. 그 결과 대통령의 심복이자 수도 경비 사령관인 윤필용 소장이 체포되어 권력을 상실하였다. 남북 대화를 성취시켜 유신 체제만들기에 공적을 세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책임을 떠맡아야 했고 결국 해임되었다. 대통령 부인 사망의 책임을 물어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도 경질되었다.

후임으로 차지철 의원이 기용되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5·16 당시 공정단(낙하산 부대) 대위로서 쿠데타 당시부터 박 대통령이 총애하고 있었다. 김종필 총리도 75년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으로는 외교관출신인 최규하 대통령 보좌관이 임명되었다. 중앙정보부장으로는 대통령과 동향이자 경비사관학교 동기생인 김재규(육군 소장 출신)가 등용되었다.육영수 여사 사망 후, 박정희는 고독과 의심으로 시달렸다. 근심을 달랠 수 있는 건 술밖에 없다. 원래 애주가였던 그는 술과 여자를 멀리하지 못했다. 부인이 살아 있을 때에도 술과 여자로 부인을 힘들게 한 적이 있었다. 부부 싸움이 있기도 했다.

그나마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리며 남편의 통제 역할까지 했던 육 여사가 눈을 감은 후에는, 박 대통령의 술자리 횟수는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대통령 관저에서 조금 떨어진 멋이 풍기는 가옥(궁정동 안가)에서 여성의 시중을 받으며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그 준비를 하는 것이 중앙정보부 의전실의 업무다. 이러한 특수 용도의 집은 아지트의 별칭인 안전 가옥 이라 불렸다. 과연 첩보 공작 담당다운 명칭이다.이 중앙정보부는 한국의 정보와 기밀 공작을 한 손에 장악하던 최강의 조직이다. 대통령 외 누구의 지배, 간섭도 받을 수 없다. 예산은 기밀, 베일에 싸여 있다. 부장은 사실상, 정권의 2인자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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