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학생 시위 운동 1주년인 61년 4월 19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다’고 예측하고 그것을 구실로 쿠데타를 결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반정부 시위는 없었다. 계획은 연기되었다. 이 때, 군부 쿠데타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주모자 박정희의 이름까지 흘러나왔다.이를 들은 장면 총리는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물었다. 장도영 총장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군부에 쿠데타 등의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고 하면 총장에게 책임이 돌아간다.그러나 계획이 새어 나간 것을 안 박정희는 5월 16일 새벽 쿠데타를 결행했다.
동원한 것은 공정단(낙하산 부대)과 해병 여단의 병력 3,500명 뿐이다. 박정희가 믿고 있던 육군 제30사단은 동원 계획이 사전에 새어나가 충동할 수 없게 되었다. 쿠데타 부대는 한강을 건너, 육군 본부와 방송국을 점거하였다.장도영 참모총장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한다는 박정희의 친서를 받고, 쿠데타를 진압해야 하는 총장의 임무를 던져 버렸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배신한 것이다.후에 장도영 중장은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으로 취임했다.쿠데타는 성공했다. 미국에서도 합법적 정부인 장면 내각을 지지하는 일파와 강력한 반공 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미 중앙 정보부(CIA) 등의 사이에서 의견이 분산되었다. 최종적으로 CIA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미국은 ‘쿠데타 성공’이라는 기정사실을 인정했다.
육군 사관 학교 학생들도 교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가에서 군사 혁명을 지지하는 시위 행진을 하였다. 전두환 대위가 주도한 것이다.5월 19일, 혁명 위원회는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칭했다. 위원 32명은 육·해·공 삼군을 대표하는 장군들을 망라하였다.김종필은 반혁명을 철저히 단속하는 한국 중앙정보부(KCIA)를 신설하고 초대 부장으로 취임하였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떠받쳐 준 중앙정보부의 탄생이다.5월 20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맥루이더 미군 사령관과 5시간에 걸쳐 회담을 하였다. 미국은 박정희의 쿠데타를 최종적으로 승인하였다.이 당시 미국의 캐네디 정권은 반카스트로 정권파가 4월에 감행한 쿠바 침공 작전 실패 수습으로 다른 곳에까지 힘을 쏟아 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 군부의 쿠데타에 대처할 여유가 없었다. 미국의 지지를 획득하면 박정희에게 대외 이미지를 위해 내세운 장도영은 필요 없다.7월 3일, 박정희가 최고 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43세로 활동력이 왕성할 때다.장도영 전의장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군법 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1년 후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배신한 자는 자신 또한 배신당한다.
박정권 붕괴·김일성 생존의 아이러니
군사 정권의 혁명 공약은, (1)반공을 제1의 국가 방침으로 정하여 반공 체제를 강화, (2)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 국가와의 유대 강화, (3)부패와 악습의 일소, 국민 도의와 민족 정기를 확립, (4)기아선상의 민생고를 해결, (5)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실력을 배양, (6)이상의 과제를 성취한 후의 신속한 민정 이관 등 6항목이다.박정희 정권은 쿠데타의 대의명분으로서, 무엇보다 기아로 허덕이는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기 위한 경제 개발을 들었다. 반공 한가지 점만을 든다면 지나간 여타 정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역대 정권은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아들이면서, 무능과 부정 부패 속에서 낭비하였다.당시는, 북한이 오히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섰었다. 그렇게 되면 체제 경쟁에 패배한다. 북과의 실력 대결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경제면에서 북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박정희의 경제 개발 우선이 설정된다.
또한 경제를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계획과 통제가 필요하다.박정희는 만주국에서 키시 노무스케 등 일본의 혁명 관료 그룹이 시행했던 경제 개발을 목격했었다. 일본의 혁신 관료 그룹이 전시 경제 동원을 위해 만든 것이 기획원이다. 군사 정권도 경제 개발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여 ‘경제 기획원’이라 이름 붙였다. 경제 기획원은 박 정권 시대에 경제 참모 본부의 역할을 다하였다. 여기서 성장한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그 후의 한국 경제 정책을 이끌어갔다.이케다 하야토 내각은 소득 배증 정책을 내걸었다. 한국도 이 고도성장 노선을 모방하였다.그것은 ‘수출로 나라를 세운다’는 노선이다. 그 노선을 정하기 직전까지, 한국은 자립 경제를 지향해 수입 대체 산업의 육성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좁은 국내 시장용으로는 한계가 있다. 수입 대체에서 수출로 대담하게 발상을 바꿨다. 이로써 한국의 고도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반대로 김일성은 끝까지 대외 폐쇄의 자급자족 경제를 고집했다. 이로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북의 경제에 큰 격차가 생겼다.
그러나 수출 확대 노선은 양날이 있는 칼이다. 수출을 하려면 대외 개방을 해야 한다. 바깥바람이 들어오면 독재 체제는 풍화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 발전을 달성한 박정희 정권은 붕괴했다. 완고하게 문호를 닫고, 국민을 기아의 밑바닥에 떨어뜨린 김일성 정권은 살아남았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김일성이 살아남은 것은 쇄국 체제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경제 발전을 구실로 한 개발 독재는 본디 자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번영을 달성해도, 하지 않아도 존재 이유를 잃는다.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에는, 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가 큰 역할을 해냈다. 국교 정상화에 즈음하여 한국은 일본에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청구권 자금 5억 달러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민간 기본의 자본이 흘러 들어왔다. 60년대 후반, 한국은 연간 평균 두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은 미국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여 병력 5만명을 투입했다. 이것이 베트남 특수에 불을 붙였다.
일본 경제는 50년대, 6·25 전쟁 특수로 부흥하였다. 한국은 60년대의 베트남 특수로 도약할 수 있었다.박 정권 18년의 전반기는 경제 발전이라는 점에서 눈에 띄는 실적을 올렸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경제 성장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배경으로 한 불균형 발전에 의거한다. 단기간에 경제 개발을 달성하기 위해, 농업보다 공업, 국내보다 해외시장(수출), 국내 저축보다 해외 저축, 중소 기업보다 대기업을 우선했다. 총수익을 크게 하는 것이 선결이고 분배는 뒤로 미뤄져, 빈부의 격차는 급격히 확대되었다. 노동자 복지와 공해는 무시되었다. 뒤에, 한국을 성가시게 하는 많은 문제는 불균형 성장 방식 자체에 내장된 것이었다.<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