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소령 복귀 한 박정희 야망
6·25 때 소령 복귀 한 박정희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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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3-17 09:00
  • 승인 2004.03.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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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내 좌익 숙청’에 체포 이별의 시련과 육여사와의 만남
박정희는 1946년 5월 8일, 민간인 귀환자들과 함께 미군 상륙용 작은 배로 부산항에 도착했다. 만주에 간 후 6년 만의 귀국이다. 이제 와서 새삼 학교 선생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바로 그 때 미군정청은 신생 한국의 국방 경비대 양성을 위해 경비 사관 학교를 창설하여 옛 일본군 출신자들을 대상으로 단기 속성으로 군사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박정희는 46년 9월 경비 사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다.46년 10월에 대구에서 공산당이 지휘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즉 10·1 폭동 사건이다. 이 때 박정희의 작은 형 박상희는 공산당 간부라 하여 경찰에 살해되었다.

박정희는 이에 한을 품고 돌아섰다는 얘기도 있다.박정희는 3개월의 속성 교육을 마치고 대위로 임명되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급속도로 두각을 나타내,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전투 정보 과장이란 요직에 올랐다.그러나 정부 수립 직후인 48년 10월에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한국군 내에는 좌익 숙청의 선풍이 몰아쳤고 박정희도 체포되었다. 만주군 출신의 선배, 후배들은 박정희를 구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박정희는 전향(현실 사회에 배치되는 자신의 사상을 그 사회에 맞게 바꿈)을 결심, 군부 내 남조선 노동당 조직을 전부 자백하였다. 49년 4월, 군법 회의는 박정희에게 집행 면제의 무기 징역을 선고하면서 불명예 퇴역·군적 박탈의 판결을 내렸다.그러나 군은 박정희의 능력을 필요로 했다. 박정희는 위촉 신분으로 육군 정보과 북한반 상황 실장이 되어 북한의 정세 분석을 담당하였다.

상황 실장이라고 해도 정규직의 보임은 아니다. 정식 급료도 안 나온다. 정보 과장의 배려로 정보과의 기밀비에서 지급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여기서 생애 최대의 좌절을 맛보았다.사생활도 어두웠다. 박정희는 초혼의 처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얻었지만,, 만주 군관 학교 입학 이후는 아내와의 이별 상태였고 결국 이혼한다.소령 시절, 북한에서 월남한 미모의 여대생 이성희와 동거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박정희가 군법 회의에서 군적을 박탈당하게 되자 냉정하게 떠나갔다. 박정희는 밤마다 몹시 취해 혼자 고독감에 빠졌다. 박정희가 위촉받아 정보국에 근무했을 당시의 정보 국장은 백선엽, 이용문, 장도영 대령으로 바뀌었다.

장도영과의 만남은 후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있어서 큰 의미를 지녔다.육군을 제8기생으로 졸업한 김종필 소위(1926~)도 정보과로 배속되어, 문관 박정희의 지도를 받았다.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다. 그 후,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딸 박영옥과 결혼하였다. 죽은 형 박상희의 딸이다.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개시했다. 그 때 박정희는 어머니의 1주기 재를 올리기 위해 고향 선산에 가 있었다.박정희는 수원에서 후퇴한 육군 본부 정보국으로 부랴부랴 서둘러 귀대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현역 소령으로 복직하는 동시에 전투 정보과장으로 복귀되었다.전쟁 중인 50년 가을 대구에서 육영수와 재혼하였다.

1952년에 이미 쿠데타 계획,9년 뒤 퇴역 대상자 리스트에 올라
51년말 박정희는 육군 본부 작전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국장은 일본 육사(50기) 출신인 이용문 준장으로 박정희와는 의기 투합한 사이였다. 이용문은 일본 육군 참모 본부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닌 우수한 장교지만 전쟁 중 서울을 탈출하지 못해 국제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까지 지하에 잠복해 있었다. 그 때문에 승진이 늦어졌다.한국군 수뇌부는 출범 초기에는 만주군 출신이 아닌 38도선 이북 출신의 월남파가 요직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전시 중에 만주군 출신자 대신 일본 육사 출신자들이 떠올랐다. 이들은 경력이 있는 데다가 정치적 중립을 고집했다.

52년 봄,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대통령 직접 선거제로의 개헌을 추진하며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미국은 이승만을 퇴진시키고 장면으로 대신할 것을 고려했다. 미국의 뜻을 헤아린 군 수뇌부는 쿠데타를 계획하였다.박정희 작전부 차장은 쿠데타 실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결국 미국은 이승만 경질을 단념했기 때문에 쿠데타 계획이 무산되었다. 박정희는 이 때 ‘쿠데타’라는 수단을 빌려 단 일격으로 정권을 타도할 수도 있다는 확신을 품었다.이 사건으로 이종찬 육군 참모 총장을 비롯한 일본 육사 출신의 군 수뇌부가 경질되고, 만주군 출신자들이 세력을 얻게 됐다.박정희는 53년에 준장, 59년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영어를 못하고, 전향 경력도 있는 박정희에 대한 군 수뇌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머리가 좋고 청렴 강직하지만 융통성이 없는’ 장성이라는 평가 속에 멀잖아 소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될 형편이었다.그러나 소장파 장교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또 달랐다.

‘정권을 좇지 않고, 돈에 욕심이 없는, 국가 개조의 식견을 지닌 장군’이라는 견해가 정착되었다.당시 한국군은 인사 정체에 직면해 있었다. 한국군은 전쟁 중에 10만명에서 70만명으로 불어났다. 군 창설 때 20대 청년이 장교로 임명됐고 전쟁 중의 활약으로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었다. 전쟁 직후, 정일권 소장은 33세로 육·해·공 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될 정도였다. 다른 장군의 연령도 엇비슷했다.사관학교에서 속성 교육을 받은 장교들은 전쟁이 계속된 3년간은 급속도로 승진했으나, 휴전 후 그 승진 속도는 갑자기 멈추었다. 김종필 등 육사 8기생은 49년에 소위로 임명되어 전쟁 중 소령으로 승진했는데, 그 후에는 7년이 걸려서야 겨우 중령이 될 수 있었다.장군들의 평균 연령도 30대 후반으로, 영관급(소령, 중령, 대령의 총칭) 장교들과 같은 나이다. 어느 경우든 층층시하여서 승진 가망이 없었다. 인사 정체에 대한 소장 장교의 불만이 쌓였다.휴전 후, 한국군 내부에서 파벌 대립이 격화되었다.

정일권, 백선엽 장군 등 만주군 출신자가 주도권을 잡고는 있었지만 내부의 암투는 드셌다.군 수뇌부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가담, 독직과 부패의 스캔들에 휩싸여 있었다. 군 수뇌에 대한 소장 장교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학생 시위 운동 때에도 군의 일부에서 쿠데타 계획이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판단으로 흐지부지되었다.이승만 정권 붕괴 후, 김종필 중령 등 소장 장교는 군대 내 정비 운동을 시작했고 국방부 장관과 육군 참모 총장에게 사직 권고를 강요하기도 했다. 소장 장교들은 육군 본부 작전 참모 부장으로 취임한 박정희 소장을 리더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군의 통제를 어지럽히는 소장 장교의 군대 내 정비 운동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군대 내 정비 운동을 추진한 소장 장교들은 예비역으로 편입되고, 박정희 소장은 대구의 제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어, 61년 가을에 퇴역할 리스트에 올려졌다.이 무렵 군부는 무능한 장면 내각 타도 결의를 굳혔다. 가까운 본보기도 있었다. 바로 9년 전인 1952년, 이집트에서 나세르 중령 등 소장 장교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전복시켰다. 소장 장교들은 이집트 군사 혁명의 전례를 상세하게 연구했다. 미국도 장면 정권의 불안정한 정국 운영에 불안을 안고 있었다.‘군사 정권이라도 상관없다.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에서는 강력한 정권이 필요하다’는 것이 미국의 본심이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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