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개월의 단명이었지만 장면 내각은 결과적으로 훗날 군사 정권의 외교, 경제 정책의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놓는 셈이되었다.이승만 정권의 반일 외교와는 전혀 달리 일본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몰두하였다. 장면 내각이 발족되고 2주 후인 9월 6일 고자카 젠타로 외상이 방한했다. 해방 후 일본 정부 고관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양국의 외무 장관은 국교 정상화를 위해 한일 회담의 재개를 합의하였다. 또, 이승만 정권 붕괴 직후인 5월 4일에는 일본 보도기관 특파원의 한국 입국이 인정되었다.한일 회담 재개는 양국에 있어서의 긴급 과제였다. 50년대에 고도 성장을 계속해 온 일본은 새로운 시장 개척이 필요했다. 경제 재건에 몰두하던 장면 내각도 일본에서의 외자 도입의 필요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60년 10월 제5차 한일 회담이 동경에서 개최됐다. 대일 청구권이라는 명칭으로 배상금 문제를 토의했으나, 일본은 아직 장면 내각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고 여겨 회담의 진행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배상’이라는 명칭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청구권’이라는 단어가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국교 정상화 이전에도 일본의 민간 차관 도입과 재일 한국인 자본의 반입을 결정했다.61년 초 일본은 대한 경제 사절단 파견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국내에 큰 반대 운동을 일으켜 무산되었다.5월 6일 노다 우이치 의원을 단장으로 한 국회의원 일행이 방한하여 양국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일행 중에는 대전에서 소개 공사(공습 피해를 위해 집중된 시설 등을 분산)를 맡았던 다나카 가쿠에이 의원도 있었다. 다나카는 당시 군수였던 김영선 재무장관과 재회하여 옛정을 되살렸다.그러나 그들 일행이 귀국한 직후 쿠데타가 일어나, 대일 청구권 정상화는 박정희 정권이 되어서 이루어졌다. 그 때 대일 청구권은 5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로 타결되었다.이에 대해 장면 내각의 외무 장관이었던 정일형은 ‘장면 내각 때, 한일 회담에서 한국은 12억 달러를 요구, 일본은 8억달러를 제시하여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단 3억 달러로 타협했다. 매국적 행위다’고 호되게 비판하였다.
대일 화해로의 방향 전환은 미국의 압력이 있든 아니든 장면 내각에서 시작되었다.그 한편에서 장면 내각은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워 경제 개발을 중점적으로 진행했다.미국의 30년대 뉴딜 정책의 테네시강 개발(TVA) 계획을 텍스트로 삼았다. 실업 대책을 위해 댐·도로 건설, 농지 개간, 수자원 개발 등 공공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국토 건설 사업에 실업 중인 청년들을 동원하였다.장면 내각의 김영선 재무 장관은 공개석상에서 ‘한국이 경제면에서 북한보다 3년은 뒤처져 있다’는 것을 구체적 숫자를 들어 솔직히 인정하며 ‘북한과의 경제 전쟁에서 뒤처져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연설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장면 내각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했고 계획안을 4월에 거의 완성했다.
이 계획안의 대부분은 미국 원조를 생각해 세우고 있었다. 이 계획안대로 실무자가 미국에 가 미국 당국과의 협의 중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계획은 햇빛도 보지 못하고 폐기되었다.그러나 군사 정권은 이 계획안에 덤벼들었다.경제 재건을 공약으로 내건 군사 정권은 경제 건설의 청사진이 필요했다. 장면 내각에서 세운 5개년 계획을 표지만 바꿨다.군사 정권은 쿠데타 2개월째인 61년 7월 22일, 경제 개발을 담당할 경제 기획원을 신설, 62년부터 시작되는 종합 경제 재건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장기 집권을 떠받쳐 주는 경제 개발의 시나리오가 되었다.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임 후 대표적 저항 세력 캐네디의 측면 후원에도 선거 패배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후에도 10개월 간 대통령 자리에 머물렀다. 군부는 장면 내각을 쫓아내고, 국회 정당 등의 정치활동을 일체 금지했으나 윤 대통령은 유임시켰다. 이는 내각 책임제 아래서의 대통령은 국정 수행에 직접적 책임이 없다는 이유다.그러나 속셈은 대통령이 체제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헌법 기관이기 때문에 유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외국 정부로부터 새로운 정권을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된다.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고, 이 기구가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을 장악하였다. 윤대통령은 완전히 소외되었다. 군부는 쿠데타의 명분으로 반공과 부패, 구악의 일소를 내세워 이 임무를 달성하면 청렴하고 양심적인 정치가에게 정권을 내주고, 본래의 임무로 복귀한다고 공약하였다.윤 대통령은 군부를 향해 ‘되도록 빨리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도록’ 재촉했으나 묵살 당했다.
총부리로 권력을 탈취한 군사 정권은 그렇게 간단히 권력을 내버리지 않는다.쿠데타 10개월 후인 62년 3월, 군사 정권은 정치 활동 정화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쿠데타 이전에 활동했던 대부분의 인사에게 68년까지 6년간 정치활동을 금지하게 하는 것이다. 민정으로 이행하는 데 대비해 기존 정치가의 활동을 막고, 군 출신의 신인을 유리하게 한 내용이다.최고 회의에서 만든 이 법안은 최종적으로는 대통령의 서명이 필요하다. 윤보선은 법안 서명 후 동법의 취지에 항의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했다.이후 윤보선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저항 세력의 대표가 되었다. 군사 정권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민정으로 이행할 것을 약속하였다.63년 1월부터 정치 활동이 자유화되었다. 민간 정치가는 반군사 정권을 표어로 내세워 대통령 선거에 맞섰다. 예전의 민주당 구파와 윤보선 주위에 모인 신파는 윤보선이 쿠데타를 묵인, 또는 동조했다고 비난하며 허정을 내세웠다.그러나 대세는 윤보선 지지로 흘렀다. 허정은 투표 직전 후보를 사퇴했고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대결이 되었다.케네디 정권은 군사 정권에 반대해 음으로 양으로 윤보선 후보를 지원하였다.군사 정권은 민정 이행을 공약했으나, 은밀히 군정 연장을 계획하였다.
미국은 이에 신경이 곤두서 경제 원조 공약을 연기하는 등 압력을 가하였다. 63년 여름은 흉작으로 식량 가격이 폭등하였다.선거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물가 안정이 지상과제다.군사 정권은 극비리에 미쓰이물산과 교섭, 캐나다산 밀 10만톤, 64만 달러 분을 연체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도입하였다. 밀 판매 대금은 여당 선거 자금으로 활용되었다.윤보선 후보는 선거 유세 중에 박정희 후보의 좌익 전과를 폭로하였다. 이것이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사상 논쟁으로 불린 이 폭로는 오히려 윤보선에게 마이너스가 되었다. 한국인 중에는 해방 후 일시적이지만 좌익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윤보선의 폭로에 반발하였다.선거결과, 박정희와 윤보선은 438만여표 대 454만표로, 윤보선은 불과 15만 6천표의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어서 11월에 실시한 총선거에서는 윤보선이 이끄는 민정당이 야당 제1당이 되어, 야당 리더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다.‘확실한 야당’ 노선이 오히려 위축 불러, ‘긴급 조치 위반’ 징역 8년 선고박정희 정권은 64년이 되어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윤보선이 이끄는 민정당은 한일 회담을 매국 외교로 매도하며, 대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윤보선은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의 선두에 서서 조약의 국회 비준을 막기 위해 의원직을 사임했다.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는 일본과 한국측의 절실한 과제였던 것 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냉전 전략에 있어서도 한일 국교 정상화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미국은 윤보선을 버렸다.윤보선의 극단적인 투쟁 방식에 대해 야당 내 온건파는 불만이었다. 야당이 합동으로 세운 민주당 결성 대회에서 윤보선은 당수로 뽑히지 못했다.67년 5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다시 야당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경제 개발의 실적을 내세우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116만 표의 큰 차이로 패배하였다.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구민주당 신파의 흐름에 편성해 김대중이 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으로써, 사실상 윤보선의 정계에서의 경력은 끝이 났다.윤보선이 택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확실한 야당’이라는 정치 노선은 야당 온건파의 지지를 얻지 못해, 야당 세력을 위축시켰다.72년, 박정희 정권은 유신 독재 체제를 단행하였다. 유신 독재체제 아래에서 국회의 야당 활동은 극히 제한되었다. 국회 내의 야당, 즉 합법적 활동이 인정되는 야당은 현실 타협 노선으로 흘렀다.독재에 대한 투쟁은 국회 밖에서 정치 활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윤보선은 원로로서 김대중 등과 함께, 재야의 반유신 독재 체제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때문에 74년, 76년에 잇달아 대통령 긴급 조치 위반 등의 죄명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박 정권도 대통령 경험자인 고령의 윤보선을 수감하는 것은 주저했다.
윤보선은 계속해서 재야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여, 재야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군사 정권 탄생에 일조를 한 윤보선이 그 말년에, 군사 정권 타도의 선두에 선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윤보선은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의 최후를 마친 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90년에 92세의 고령으로 눈을 감은 윤보선은 역대 대통령의 묘지인 국립 묘지에의 매장을 거부하였다. 박정희와 같은 묘지에 매장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보였다. 전임 대통령으로서의 최소한의 의지다.제2공화국이 무너지면서 내각 책임제도 사라졌다.쿠데타를 진압할 수 없었던 것은 이원화된 권력 탓으로 돌려졌다.한국인 사이에 내각 책임제에 대한 거부반응의 전통이 생겨났다.그러나 제도가 아니라 운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실무 경력이 없고, 수라장을 헤쳐 나간 적이 없는 명문 출신의 아마추어 정치가는 위기 관리 능력이 부족하다. 난세에 맞지 않는다. 양이 끄는 이리 떼보다 이리가 끄는 양 떼가 강하다고 한다. ‘서울의 봄’이라고 하는, 해방 후 가장 자유로운 정치 활동이 허락되었었던 제2공화국의 짧은 내각 책임제 실험은 그것을 증명한다.쿠데타로 실각한 장면은 그 후 칩거하다가, 5년 후인 1966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쿠데타를 막지 못했던 장면의 무능함에 대한 세간의 비난은 아직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1999년 장면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그를 재평가하는 운동이 생겨났다. 100주년 기념 집회에 김대중 전대통령도 참석하여 추도사를 읽었다. 김대중은 장면에게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장면은 인간으로서는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러나 난세의 정치가로서는 실격이 아니었을까?<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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