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윤보선-인간윤보선/인간 장면과 노기남
제2장 윤보선-인간윤보선/인간 장면과 노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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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2-12 09:00
  • 승인 2004.02.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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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에 시달려 하루라도 청와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2대 대통령 윤보선은 1897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윤치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치소는 대한제국 말기에 중추원 의정까지 올라간 명사다. 윤씨 일가는 사촌인 형과 아우들을 포함하여 장관, 서울 대학 총장 등을 13명이나 배출한 명문이다. 윤보선의 저택은 후에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그는 15세에 동경에서 유학하며 정규 영어 학교 등에서 공부했는데, 도중 그만두고 1918년 상해로 건너가, 이승만 등의 독립 지사와 교류하며 거액의 기부를 하여 최연소 임시 정부 의정원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였다. 독립 운동에서 고고학으로 전향한 것은 완전히 다른 방향 전환으로, 그는 수년 뒤 ‘독립투쟁을 계속해, 혁명을 위해 일생을 바칠 뜻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32년에 35세로 귀국했다. 그 후 13년간 실무에 종사하지 않고 지낸 그는 해방 후 한민당 결성에 참가했다.제1대 총선거에서는 고향 마을에서 입후보했다가 낙선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초대 서울 시장에 임명했다. 그 후 상공부 장관, 적십자사 총재 등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서도 1년을 지속하지 못했다. 한번도 벼슬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윤보선으로서는 매일의 행정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 고통이자, 매우 따분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회고록엔 ‘상공부 장관이 되고 나서 3, 4개월이 지나니 벌써 싫증이 났다’고 씌어 있다. 민주당에서는 원내 총무로 추천되었으나 번거로운 정무 잡무에 지쳐 바로 그만두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청와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진정에 시달려 ‘하루라도 빨리 청와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다.윤보선은 52년, 부산에서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지독한 정치 수법에 반발하여 결별, 야당의 입장에 섰다.

이는 한민당 간부 윤보선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54년 총선거에서 야당 의원으로 서울 중심부인 종로에서 당선되어 일약 야당 구파의 지도적 존재로 클로즈업되었다.57년에는 민주당 중앙 위원회 의장에, 59년에는 최고 위원에 선출되었다. 게다가 구파의 지도자인 조병옥이 60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윤보선에게는 구파 최고 지도자 자리가 자연스럽게 열린 것이다.윤보선이 보수 세력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민당 창설 멤버, 서울 시장, 상공부 장관 등을 역임한 관록과 정치가에게서 흔히 보이는 금전욕이 비치지 않는 깨끗한 신사 타입이었던 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그는 고생을 모르는 양가집 도련님으로 자라 사물엔 욕심이 없었지만, 관례와 서열을 중시하는 양반의 권위주의적사고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는 전임 대통령인 이승만과 매우 유사했다. 두 사람 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실무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공통되었다.내각 책임제에서의 대통령의 위치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국가 원수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나 윤보선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임 이승만 대통령처럼 권위와 예우를 요구했다. 위계 질서를 중시하는 윤보선은 대통령이라 하면 최고 권력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대통령이 여행할 때는, 특별 열차를 준비시키고 총리 이하 전 각료가 배웅하도록 지시했다. 내각 조직의 인사와 정책에 하나하나 간섭하였다. 민주당이 균열 없는 튼튼한 정당으로 단결되어 있었던 상태였다면 이는 그다지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당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윤보선은 총리 지명에서 자파(구파)인 김도연을 지명하여 부결되고 장면이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된 상태였다. 장면은 거국 내각(여야 구별 없이 모든 정치 세력을 합친 내각)을 구성하도록 촉구했다. 신파는 구파에 대해 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신·구 양파의 대립은 나날이 격화되었다. 구파는 9월에 분당을 선언했고 11월에 신민당을 결성하였다. 대통령과 총리의 불화는 나중에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제자 노기남 주교, 가톨릭 대표로서 장면의 정계진출 적극 지원
제2공화국의 실질적 권력자였던 국무총리 장면(1899~66)은 세례명 요한이 나타내는 것처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의 성장과정, 정치경력, 그리고 쿠데타에 대한 대응 등 모든 것이 가톨릭 신앙을 빼놓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장면의 부친 장기빈은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가톨릭 신자로 평안도 출신이다. 관립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말에 인천해관(세관)에서 근무했던 전형적인 중류 계급이다.장면은 수원 농림 학교 졸업 후 서울 중앙 크리스트교 청년 학관 영어과에 진학하였다. 동시에 용산 천주교 신학교의 강사가 되었다.이 신학교에서 장면에게 영어를 배운 세 살 아래 학생이 노기남(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이다. 장면은 3·1 독립운동 다음해인 1920년, 크리스트교 청년 학관을 졸업, 뉴욕 맨해튼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1925년 귀국 후, 가톨릭 평양 교구에서 어학 교사, 천주당 사무장, 청년회장 등을 역임, 31년에 서울의 가톨릭계 동성 상업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래 교장을 역임하는 한편 서울 시내의 가톨릭 관계 학교의 일을 해 왔다.한편, 신학교에서 장면이 가르친 노기남은 그 사이, 한국 최초의 가톨릭 교구장이 되어 주교로서 한국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게 되었다.제2차 대전 전야 당시, 조선 총독부는 크리스트교를 적대시하여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 교회를 박해 탄압하였다. 그 때마다 노기남 주교는 장면 교장과 함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였다. 장면은 총독부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타마오카 쯔토메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다. 일본의 탄압에 저항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신뢰와 연대감이 생겨났다.장면은 동성 상업 학교 교장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9월 9일 교구 대주교인 스펠만이 집도하는 미사가 열렸는데, 미군 장병 다수가 참가하였다.스펠만이 명동 성당에서 미사를 연 것은 한국 가톨릭의 위치를 더욱 높였다. 노기남 주교는 가톨릭 대표로서 장면의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장면은 군정청 자문 기관인 민의원 의원 25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1948년 5월, 제1대 총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때 가톨릭은 전력을 다해 장면을 지원했다. 당시, 가톨릭은 <경향신문>을 소유하고 있었다. <경향신문>은 해외 가톨릭 단체로부터 넉넉한 자금 원조를 받아 언론 기관 중에서 가장 잘 뻗어 나갔다.교육가 장면이 정치가로 전향한 것은 12월이었다.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수석으로 출석, 한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승인을 얻어내야 하는 임무가 맡겨졌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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