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대통령 윤보선은 60년 8월 13일 제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이승만 대통령이 그 해 4월 27일에 하야하고 나서 108일째의 일이다. 대통령 부재 이래 3개월 반 동안, 허정 외무장관이 과도 내각 총리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허정은 이승만의 옛 동지로서 이승만 정권 최후의 외무 장관 출신이었다. 과도 내각은 새로운 정권 수립까지의 공백 메우기였다. 정권 타도의 선두에 섰던 학생과 시민들은 정치집단에 결집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옛 정치 세력간의 타협과 물밑의 정보 교환으로 정국이 운영되었다.과도 내각은 새로운 정권 수립까지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우선된 역할이었다.허정 내각 총리는 과도 내각의 구실에 대해 ‘혁명적 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정치적 수식어에 지나지 않았다.이승만 하야 후에도 국회는 여전히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향후 정권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민주당과 살아남으려고 하는 자유당은 뒷거래를 하였다. 양당은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현존 국회에서 내각 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민주당은 의원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다. 또 자유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는 대신 일시적이라도 자유당이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여지를 남겨 주었다.헌법 개정은 급속도로 진전되어, 6월 15일 208표 대 2표라는 압도적 표 차이로 국회에서 채택되었다. 신헌법은 ‘내각 책임제를 정부의 정체성으로 하고 대통령을 상징적 자리로 승격시킬 것’ ‘국회를 참의원과 민의원의 양원제로 구성’하고,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할 것’ ‘국무 총리와 각료는 국회 의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할 것’을 규정하였다.국회는 권력 구조의 중심이 되었고 행정부 권한은 축소되었다.
7월 29일, 신헌법에 의해 총선거가 실시된 민의원(정수 233명)은 민주당이 175명으로 정수의 3분의 2를 훨씬 웃도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자유당은 불과 2명 당선으로 사실상 소멸하였다. 혁신 세력 역시 5개 의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참의원은 정수 58명 중 민주당이 32명을 차지했고 자유당은 4명에 그쳤다.총선거 결과는 유권자가 민주당을 유일한 정치 지도 세력으로 인정한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는 민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야당이었던 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다.
대통령과 총리의 정면 대립 ‘쿠데타 성공’의 결정적 요인
민주당은 국회에서 절대적 다수를 차지한 순간, 으레 그렇듯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갈등과 내분이 표면화되었다.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었다. 구파는 해방 직후의 지주 계급 등 유산 계급을 대표한 한민당의 흐름을 이은 것으로, 지역적으로 중부와 남부 출신이 많고 김성수, 신익희, 조병옥 등이 리더였다. 그러나 그들이 잇달아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윤보선, 김도연계로 나뉜 집단 지도제로 이행되었다. 신파는 군정청과 이승만 정권의 고급 관료와 법조계 출신 등 실무에 뛰어난 신흥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가 주류로, 38도선 이북 출신이 많았고, 장면 부통령이 리더였다. 7월 29일의 총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 내의 원내 세력 분포는 구파가 신파에 비해 약간 우세하였다.새 헌법에 의하면 실질적 권력은 총리에 있다. 민주당 구파는 원내 우위를 믿고, 대통령과 총리 자리를 독점하려 하였다. 신파는 대통령직은 구파에게 양보하는 대신 총리 자리를 손에 넣으려는 작전을 세웠다.8월 12일, 국회 양원 합동 회의는 대통령에 윤보선을 선출했다.
신파는, 개성이 강한 김도연보다 명문 출신으로 대범하고 느긋한 윤보선을 다루기 쉬울 것이라고 여겨 지지했다.초점은 국무 총리 선출로 옮겨갔다. 윤보선 대통령은 총리 후보에 자파인 김도연을 지명했다. 신파는 당연히 반발하였다.캐스팅 보트(소수파 결정권)를 잡은 것은 무소속 의원 20여 명이었다. 무소속 의원 단체 ‘민정 클럽’은 신·구 양파에 지지하는 조건으로 각료 자리를 요구했다.8월 17일, 국회에서 실시된 투표 결과 김도연에 대한 총리 승인은 찬성 111표, 반대 112표로 재적 과반수 114표에 3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다. 그 이틀 후 투표에서 장면은 재적 과반수에 불과 2표 넘는 근소한 차이로 총리 승인을 받았다.그러나 이러한 총리 승인을 둘러싸고 신·구 양파의 벌어진 틈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과 신파인 장면 총리의 대립 상극은 필연이었다.어쨌든 내각 책임제인 제2공화국이 탄생되었다.제2공화국은 61년 5월 16일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겨우 10개월의 단명이었던 제2공화국의 붕괴는 신·구 양파의 항쟁 내분이 원인으로, 그것이 군부 쿠데타를 부른 것이다.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 ‘데모 반대’하는 데모까지도 성행
민주당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한 시선을 가진 유권자들의 불평과 불만은 ‘시위’라는 형태로 분출되었다. 민주당 정권 아래 한국은 시위로 해가 뜨고 시위로 해가 졌다.학생과 시민의 시위운동이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였다. 시위 운동의 위력을 실감한 그룹은 일이 있을 때마다 시위 운동을 벌였다. 담당 선생님의 행동에 항의하여 소학생(초등학생)까지 시위를 했을 정도다.민주당 정권기의 시위 운동은 1,835건, 총 97만명이 참가하였다. 매일 평균 7.3건의 시위가 발생, 3,800명이 참가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시위 운동을 막는 경찰은 약체화되어, 구경만 하고 있을 정도였다.민주당 정권은 경찰관 전체의 1할이 넘는 4,500명을 파면하였다. 게다가 정권 초기의 3개월 간에 치안 담당의 내무 장관이 3명이나 경질되었다. 행정 기구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연일 시위가 일어나는 속에서도, 국민에게 가장 충격을 안겨 준 것은 60년 10월 11일 국회 난입 시위다. 그 3일 전, 서울지방법원은 3월의 부정 선거 관련자와 4월 19일의 시위 학생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에게 판결을 선고했다. 그러나 유족, 학생, 시민단체는 너무나 가벼운 판결에 반발,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서울에서는 시위로 부상당한 학생을 선두로 국회에 난입, 혁명 입법을 제정하도록 요구했다. 국회 의원은 시위에 우왕좌왕할 뿐이었다.정부와 국회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위 운동은 학생뿐 아니다. 6·25 전쟁 때 빨치산으로 의심받아 살해된 유족도 명예 회복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집단 행동에 나섰다. 당시의 면장을, 경찰에 밀고했다는 사적인 감정 때문에 살해한 자도 있었다.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노동 쟁의는 그 전년도의 109건에서 218건으로 2배나 증가했다. 그 중에서도 교원의 노조 결성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권 시대, 교육이 정치에 이용당하는 것을 반성해 만들어진 이 교원 노조는 순식간에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하였다.매스컴을 통한 정치 비판도 절정에 달했다.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의 매스컴은 정권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계속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여론을 신경 써 매스컴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주저했었다. 신문은 자유당 정권의 그릇된 정치와 부정 선거, 이에 저항하는 시민, 학생의 움직임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원래 신문은 권력을 비판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것. 이승만 정권 시대, 반정부로 돈을 버는 것은 신문뿐이라고 했을 정도다.제2공화국이 되어 매스컴은 입법, 행정, 사법에 이어 제4의 권력이 되었다. 일간 신문은 1년 전에 비해 41개 신문에서 112개로 늘었다. 일간 통신은 12가지에서 274가지, 주간 신문은 136개에서 476개로 늘어났다. 매스컴의 난립은 사이비 기자와 악덕 기자를 헤아릴 수 없게 양산해 냈다.이승만 정권 몰락 후, 그 때까지 억압되어 있던 혁명 세력도 대두했다. 총선거에서 혁신 세력인 사회 대중당이 처음으로 4개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 당은 자주 통일을 위한 남북 교류를 결의했다.
학생들도 통일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통일에 대한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진보적 정당, 단체 등은 61년 2월, ‘민족 자주 통일 중앙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혁신 세력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를 창간하는 등 대중으로의 침투를 꾀하였다. 대학생 단체는 판문점에서 5월 20일에 남북 학생 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창하려 하였다.이러한 혁신계의 남북 교류 촉진 운동으로 미국과 국내 보수세력은 위기감이 높아졌다.학생, 혁신단체, 진보적 정당에 의한 남북 교류 운동은 북이 바라던 바다. 이것이 군부 쿠데타의 구실도 되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군부 쿠데타까지의 1년간은 실로 백가쟁명(百家爭鳴:각자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함), 백화제방(百花齊放:갖가지 학문이나 사상이 개방적으로 발표됨)의 시기였다. 그것은 또한 혼란과 무질서가 지배한 시기이기도 하다.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의 혼란을 미국은 방관만 하지 않았다. 미국이 키운 군부의 개입은 시간 문제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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