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이승만은 10월 16일에 미군기로 귀국했다. 고통의 33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노 혁명가를, 정당은 좌우를 막론하고 환영했다. 앞을 다투어 당수로 추대하려 했다.이승만의 귀국 후 첫 소감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로, 조선인의 대동 단결을 힘차게 호소했다.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고국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좌우익 사이에서의 세력 싸움이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이승만은 38도선 이북 개성에 있는 선조의 성묘조차 갈 수 없었다.12월 23일, 중경 임시 정부의 김구 주석, 김규식 주석 등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은 형님, 아우로 부르면서(이승만이 김구보다 6세 연상) 친밀함을 보였지만 정국 주도권을 둘러싼 암투는 불가피했다.이승만은 먼저 좌익과, 그리고 좌우 합작을 지지하는 중간파와 충돌했다.
해방 후 1년간 남한에 있는 공산당은 ‘정식당원 60만명’을 칭할 정도로 팽배해져 있었다. 지식 계급은 좌익 사상으로 세뇌되어 있었다. 식민지 시대 때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시즘은 조선 지식인의 연결 통로였다.미군정청의 정치, 경제 분야에서의 속수무책과 실패는 이 나라의 인텔리에게 ‘사회주의가 옳다’는 환상을 증폭시켰다. 미군정청은 공산당의 활동에 경계의 시선을 보냈지만, 좌우 합작의 중도 노선에 희망을 걸었다.그러나 이승만은 당초부터 단호한 반공을 표방하였다. 그는 김구와 제휴해 46년 2월에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를 결성하고 좌익 세력에 대항하였다.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을 지지하는 주된 세력은 북의 박해를 피해 38도선을 넘어온 이른바 월남자들과 크리스천, 그리고 지주와 상공업자 등 유산 계급들이다.임시 정부의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의 아래로는 반일 우익 세력이 결집되었다.이승만은 국내 지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총독부에서 근무했던 관료 등 대일 협력의 경력이 있던 자들도 남김 없이 포용하였다.
이승만 본인은 강경한 반일 주의자면서, 지지자 안에 대일 협력자가 많았던 것은 아이러니이다.김구의 극단적인 ‘대일 협력자 숙청론’에 겁을 내던 대일 협력 경력자들은 상대적으로 보다 온건한 이승만 쪽에 붙었다.이승만은 자본주의의 본고장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자본가에게도 호의적이었다. 당시, 부호들은 과거의 대일 협력 전력의 면책을 원했을 뿐 아니라 좌우익 대립에 위기감을 느껴, 이승만과 김구에게 저택과 정치 자금을 제공하며 일신의 안전을 꾀하였다.이승만의 거처 ‘이화장’과 김구의 ‘경교장’ 등의 저택은 이들 부호들의 기부에 의한 것이다.날뛰는 공산당을 방치했던 군정청도 냉전 격화와 함께 탄압에 착수했다. 군정청은 46년 5월, 공산당의 위조지폐를 적발하고 위조지폐를 인쇄한 정판사를 습격해 관련자를 검거하였다. 이어서 9월에 공산당의 후신인 남조선 노동당(남로당) 지도부의 일제 체포에 나섰다.
그러나 남로당 지도부는 지하로 잠입해 38도선 이북으로 탈출, 해주시에서 계속해 활동하였다. 46년 1월 1일에 일어난 대구 폭동은 남로당이 무력 투쟁으로 방향 전환한 것을 나타내는 사건이다.이승만은 이에 앞서 6월 3일, 지방 유세에서 ‘남한은 즉시 자율적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반공자세를 명확히 한 것이다.그러나 미군정청은 우익 세력보다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파를 지지하였다. 중도파는 미·소 공동 위원회에 협력하여 좌우 중간 세력의 합작에 의한 남북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구상했다. 이 구상은 동경 G.H.Q (General headquarters:총사령부) 안에 있던 뉴딜파(루스벨트 대통령이 실시한 사회보장, 경제 부흥 정책)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미 군정청 최고 사령관 하지의 정치 고문 레오나드 바체도 열렬한 뉴딜 정책 지지파였다. 미군정청과 이승만, 김구 등의 우익과의 대립은 깊어 갔다. 군정청이 창설한 과도 입법원 의장에 이승만이 제외되고, 김규식이 취임했다.이로 인해 군정청 지지당이자 지주 계급을 대표하는 한민당은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남한만의 총선거’ 김구 거부, 권력에 다가선 이승만
미·소 공동 위원회는 토의에 참가시킬 정당 단체를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는 부질없는 짓을 계속했다. 미국은 이 이상의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의 의논은 헛수고로 생각하고 국제 연합에 조선 문제를 의안으로 내놓았다.미국은 전략 가치가 없는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은 수지가 안 맞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처치 곤란한 남한에서 손을 떼는 지름길은 국제 연합에 일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국제 연합은 47년 9월, 임시 조선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위원회의 감시 아래 48년 3월 31일까지 남북에서 총선거를 시행토록 결의했다.국제 연합 임시 조선 위원회는 48년 1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김일성 북한 인민 위원회 위원장은 입국을 거부했다. 1인당 1표씩 행사하는 총선거는 인구 비례로 보아 북한에 불리하다는 상황 판단에서였다.
북한에 입국을 거부당한 임시 위원회는 남한만으로 단독 선거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국제 연합은 48년 2월 26일, 압도적 다수로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총선거를 가결하였다. 곧 남한 단독 선거다.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구상이 승리를 얻었다. 즉시 독립을 열망하는 한국인 다수는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이승만은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5월 10일의 남한 단독 선거에 대해, 김구의 우파도 김규식 등의 중도파도 정면으로 맞서 반대하였다. 이들은 5월 총선거 거부를 공표했다.반대 이유는 ‘남쪽만 단독 정권을 수립하면 영토가 영구 분단된다. 한국인의 문제는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남북 요인의 회담이 선결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인 다수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감정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북한도 국제 연합 의결에 대항하여 북한만의 단독 정치 방침을 이미 정하고 있었다. 북한은 2월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헌법’ 초안을 기초하고 그 두 달 뒤에 북한 특별 인민회의가 이를 가결하는 등 착실히 준비를 진행해 갔다.이승만도 김일성도 제각기 단독 정권 수립을 지향하고 있었다. 단독 정권 수립이라는 점에서 양자의 태도와 이해는 일치하였다.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한 김구, 김규식들은 국제 연합 임시 조선 위원회에 ‘남북협상’안을 제시하는 한편, 김일성 위원장에게 남북 협상을 호소하였다.김일성은 4월 19일에 평양에서 남북 협상 연석 회의 개최를 제안하였다. 김구, 김규식 등 각 단체 대표 395명이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했을 때 이미 회의는 시작되었다.
협상 회의는 ‘한반도에서의 외국 군대 즉시 철퇴’ ‘전 조선 정치 회의의 소집’ ‘입법기관 선출과 헌법 제정’ ‘남한의 단독 선거는 절대로 민족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김구, 김규식 등 남한 대표는 실질적 토의에서 제외되는 단순한 들러리로 이용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김구, 김규식의 총선거 거부로 경쟁자가 없게 된 이승만의 승리는 확실해졌다. 총선거에 반대하여 4월 3일, 제주도에서 좌익의 지도 아래 폭동이 일어나고, 게릴라 진압 부대와의 사이에서 동족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되풀이 되었다. 이 때 죽음을 피해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 밀입국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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