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별’ ‘독재의 그림자’
극단적 모순의 지도자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 현대사의 빛과 어둠을 한 몸에 모으는 인물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36년간, 그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해 조선인들에게 희망의 별이었다.그러나 해방 후,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 결과적으로 남북 분단의 영구화를 불렀다.그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친미 반공 노선을 정착시켰다. 이 국가 전략은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국제적 좌표를 정하는 방향타가 되었다. 헌법 제정에 즈음하여 대통령 중심제를 고집, 대통령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원형을 만들었다.북진 통일을 주창하면서도 준비는 전혀 없었다.6·25 전쟁(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단 4일 만에 북한 인민군에게 서울을 빼앗겼다. 수도 서울의 사수를 부르짖으면서도 시민을 내팽개치고 정부 수뇌만이 남으로 ‘ 피난’가며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서울 시민의 안전과 생명은 그 순간 폭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관권을 동원한 부정 선거로 12년간 장기 정권을 이어간 끝에, ‘정권의 평화적 교체’ 전통을 남기지 못한 채 4·19 학생 의거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승만처럼 역설적인 존재는 드물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항일 독립 투쟁을 계속하고, 정권을 잡은 다음에도 반일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 협력했던 자들을 숙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이 이승만 정권의 요직을 점령, 일본의 통치 방식을 답습하는 기이한 형태가 되었다.그는 민주주의 본고장 미국을 중심으로 40년이나 망명 생활을 했지만 정치 스타일은 왕조 시대 전제 군주의 정치 수법을 재현하였다.그는 경건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장악 유지에서는 마키아벨리즘을 철저하게 구사했다.이승만 개인은 망명 시대부터 검소, 절약의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 대통령이 되어서도 1달러의 외화 지출조차 하나하나 체크할 정도로 예산 지출도 아꼈다. 그러나 여당인 자유당은 부정 부패와 금권선거의 총본산이었다.그는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행정가로서는 실격이었다. 역사는 개인의 의지와 행동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전통과 그 시대 상황의 소산물이다. 90년에 걸친 이승만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20세기 이 나라가 직면한 모순과 상극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이승만은 대한 제국, 일본의 통치, 미군정이라는 세 차례에 걸친 지배체제의 변화를 목격, 체험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 미국에서 일시 귀국, 1912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가 37세의 장년이었다.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은 형성기인 30대까지 정해진다. 1904년 29세로 미국으로 갈 때까지 이승만은 당쟁과 음모가 활개치는 전제 군주 통치 아래서 개혁을 부르는 정치활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미국으로 간 후 33년간, 하와이, 상해, 제네바 등 세계 각지를 전전 유랑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1945년 해방 후 그가 귀국했을 때는 70세 고희의 나이였다. 게다가 73세에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85세까지 12년간을 권력의 꼭대기에서 군림하였다.건국초기는 모든 시스템을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다. 권력이 한 몸에 집중되어 있는 노령의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국가 만들기를 시작하는 국가 창성기의 권력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활동력이다. 김일성은 해방 당시 불과 33세,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43세다.더구나 이승만의 머릿속에는 대한제국 시대의 전제 통치 스타일이 화석으로 남아 있었다. 누구나 인간 형성기에 체험으로 박힌 것은 잘라 내기 힘든 것. 심지어 노인 특유의 완고함이 이에 박차를 가하였다.이런 상황은 그 한 사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의 전체의 비극이었다.프랑스 대혁명(1789)때 귀족은 단두대를 피해 잇따라 국외로 망명했다. 망명 귀족은 해외에서 25년간이나 유랑하였다. 나폴레옹 제정이 몰락, 부르봉 왕조가 복고(1814)한 다음 그들은 귀국했다. 망명 귀족은 귀국하자 대혁명 이전의 전제 지배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다. 망명 귀족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이승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의 ‘일본 패망’ 예언과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이승만은 조선 왕가를 잇는 명문가로 4대 국왕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이다. 왕족이라고는 해도 몰락한 후예로, 황해도 개성 부근의 평산에서 태어났다.당시 양반의 출세 코스는 과거였다. 이 과거 제도는 1894년, 청일 전쟁 개전 직후의 개혁(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다. 이승만이 19세 때다.과거의 급제, 입신 출세할 꿈이 단절된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미션 스쿨 배재 학당에 입학, 크리스트교와 영어를 접했다. 이것이 그의 일생의 전환기였다. 때마침 개화붐이 일었다. 이승만은 문명 개화를 알리고 보급하는 독립협회 계열의 조직 ‘협성회’에 참가했다. 189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창간에 참여하여 저널리스트로서 국권수호운동의 선두에 나섰다.같은 해, 국왕인 고종을 왕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차남 이강을 내세우려는 계획에 가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제국신문>에 기고, 처녀작인 ‘독립 정신’을 탈고하는 등 왕성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노일 전쟁이 일어난 1904년 8월 특사로 출옥해 11월에 고종의 밀사로 미국으로 갔다. 고종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의 전횡과 폭거를 호소하며 한미 수교 조약(1882)에 규정된 상호 방위 조항에 의해 한국을 지원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호소를 무시하였다. 임무는 실패로 끝났으나 이승만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 학문에 전념했다. 6년 뒤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이승만은 1910년에 귀국했으나, 조국은 일본에 합병되어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활동의 여지가 없었다. 이승만은 12년, 미니애 폴리스의 국제 메서디스트(감리교파) 대표 회의에 신도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망명객의 입장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제1차 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1919년에 개최된 파리강화 회담은 민족 자결주의와 데모크라시(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이 뉴스로 고무된 조선인은 3월 1일, 전국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바로 3·1독립 운동이다. 해외의 조선인도 일제히 호응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은 4월에 임시 정부 수립을 선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미국에 체류 중인 이승만은 1920년 12월 상해에 도착, 대통령에 취임하였다.국내에서도 비밀리에 만들어진 서울의 임시 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소련령 연해주의 임시 정부도 이승만을 국무 총리로 추대하는 등 각종 단체는 그를 최고직으로 추천하였다. 이승만의 명성은 국내외에서 널리 알려진 것이다.그러나 국내의 독립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억압당했다. 해외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망명자 단체에서 늘 그렇듯 역시 내분이 일어났다. 상해 임시 정부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한국의 신탁 통치를 요청한 사실을 들어 탄핵하였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 정부를 단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를 중심으로 재미 조선인을 모아 재미 조선 위원회를 만들어, 독립 운동에 몰두했다.1933년, 만주 사변을 토의하는 제네바 국제 연맹 회의에 임시 정부 전권 대사 자격으로 파견되어, 일본의 침략 정책을 혹독하게 규탄하였다. 이 때 일본은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다.
일본이 제 2차 세계 대전의 길로 접어든 계기다.1934년, 이승만은 제네바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1900~92)와 만나 결혼했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59세, 프란체스카 여사는 34세였다. 이승만은 일본 해군의 미국 태평양 사령부 기습 전야인 1941년에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집필, 일본이 대미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경고했다. 이 예언은 적중했다. 대전 중 그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통해 조선인에게 결의를 불러일으켰다.그러나 해외의 독립 운동은 중국 중경의 임시 정부(김구 수석)가 이승만보다 훨씬 활발한 무력 투쟁을 계속해, 국내에서의 지명도도 이승만을 능가하고 있었다.이승만을 탄핵하고 내몬 상해 임시 정부는 1929년에 재건되어, 동양 척식 회사 폭탄 사건(1929년 12월), 쇼와 천황에 대한 사쿠라몽에서의 저격 사건(1932년 1월), 상해 홍구 공원에서의 시라가와 대장 폭사 사건(1932년 4월) 등 결사 테러 활동을 지도하여 국내외에 명성을 알렸다.중국의 국민당 정부도 결사 항일 운동을 잇는 임시 정부에 호의를 나타냈다. 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중경으로 이전했던 임시 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연합국은 이 임시 정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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